신예소설가 특집

최진영 崔眞英
1981년생.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 있음. metaphor81@hanmail.net
첫사랑
열여섯살 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나는 집에서 오분 거리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데, 남자애 서너명이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작은 동네에 초등학교라곤 두개뿐이었으니까.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일부러 발끝만 보고 걸었다. 남자애랑 말을 섞는 건 열두살 이후로 끊었으니까. 저희끼리 요란하게 떠들며 내 옆을 지나가던 남자애 중 하나가
“야!”
하고 나를 불렀다. 그땐 이성의 이름은 전부 ‘야’로 통했다. 나는 돌아보는 대신 걸음을 살짝 늦췄다.
“이 새끼가 씨발 존나 사랑한단다!”
묵직한 웃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뒤를 돌아봤다. 내 눈치를 보던 남자애들이 서로 옷을 잡아당기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려가면서 또 소리쳤다.
“야, 존나 보고 싶었대!”
나는 그들을 향해 신발주머니를 홱 집어던졌다. 흙길에 내동댕이쳐진 주머니에서 낡아빠진 삼선 슬리퍼가 또르륵 굴러나왔다. 그들이 뛰어간 자리로 노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나는 가만히 선 채 흙바닥의 슬리퍼 두짝을 집요하게 노려봤다. 그걸 내 손으로 주워서 도로 신발주머니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았던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나를 ‘씨발 존나 사랑’한다는 애가 누구인지라도 알았다면 최소한 억울하진 않았을 거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래서 자꾸만 “돈이나 가족보다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그럼 하느님하고나 살 것이지 나랑은 도대체 왜 사느냐”고 대꾸한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나는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닌 엄마와 사는 이유를 안다. 그건 바로 아버지가 짝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짝사랑이 뭐 별건가?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듣지 못하면 그게 바로 짝사랑이지.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방법은 딱 하나다. 아버지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하지만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사랑에 죽고 사는 철부지라도 아버지와 연적이 될 순 없으니까. 하느님이 아무리 꽃미남에 피부미남에 막강파워를 가진 최고권력자라도 그짓만은 못하겠다. 나는 아버지와 연적이 되는 대신 하느님과 연적이 되는 쪽을 선택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대신 질투하는 쪽을 택했다, 이 말이다. 왜냐, 내겐 하느님보다 아버지가 더 중요하니까.
엄마는 돈을 사랑한다. 그게, 아버지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 말에 따르면, 돈은 전지전능하며 영원불변하다. 그러니까, 음, 신 같은 거다. 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없으니까, 엄마의 사랑도 짝사랑이다. 그래도 엄마는 지치지 않고 사랑한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유일한 소망은 죽어서 하느님 품에 안기는 거다. 엄마는 죽기 전에 돈방석에 앉는 것이고.
아버지와 엄마의 사랑은 지나치게 완벽해서 나를 외롭게 했다. 솔직히 나라고 하느님이나 돈과 연적이 되고 싶겠나. 자존심 구겨지게. 외로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별짓을 다 해봤다. 반항도 해보고 착한 척도 해보고 아픈 척도 해보고 성숙한 척도 해봤지만, 그 모든 척은 나를 ‘성격은 지랄 같고 변덕은 죽 끓듯 하는 애’로 만들어버렸다. 절망과 오기로 똘똘 뭉친 표정만 믿고 한 시절을 다 보내고서야 나는, 사랑을 받으려면 일단 무엇이든 사랑하고 봐야 한다는 간명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과 달리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할수록 더 외로워졌다. 그저 외로울 뿐이라면 꾹 참고 말겠는데, 사랑할 때의 외로움은 꼭 경멸이나 굴욕감과 함께 왔다. 상대가 바람을 피우거나 사기를 칠 때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이기적으로 굴 때도, 혹은 그럴듯한 데이트를 한 뒤 평온한 상태로 잠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감정의 끝물에서는 외로움의 맛이 났다. 그것 역시 사랑의 일부라 생각하고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나는 매번 미성숙과 구멍 뚫린 욕구 쪽으로 몸과 맘을 틀었다. 하느님 대신 아버지를 택한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랑이 죽고 살 때마다 나는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무생물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부모님도 외로웠던 거고, 외로운 것이 싫어 무생물을 사랑했던 거다. 무생물은 나를 배신하지 않고, 항상 내 곁에 있으며,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실망시키지도 않는다.
옛 애인 중엔 내게 사랑한다는 말보다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한 사람도 있었다. 지긋지긋하니까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사람 앞에서 나는, 헤어지려면 우선 사랑한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길길이 날뛰자 그 사람은 적선하듯 “그래, 그거 했다. 됐냐?”라는 말을 던지곤 곧바로 자리를 떴다. 나는 끝까지 쫓아가 그의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뽑아냈다. 구차하고 구질구질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라도 복수해야 했으니까(아름다운 이별 따위 개나 갖다주라지!). 그는 아마 ‘사랑’이란 단어에 알레르기가 생겼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라며 표독하게 쫓아다니던 내가 떠오르겠지. 아, 진짜. 나라고 사랑을 그렇게 푸대접하고 싶었겠나. 애태우고 주저하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사랑이란 말은 아끼고 아꼈다가 일기장에나 간신히 쓰던 때가 내게도 분명 있었다.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다. 겨우 십년. 십년 전의 일이다.
*
처음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은 후 삼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나를 ‘씨발 존나 사랑’했던 남자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만성 변비와 두통 때문에 언제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살았다. 친구는 별로 없었고 성적은 평균을 유지했으며 밤마다 죽고 싶다는 내용의 일기를 쓰던 때였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푸른 논과 낮은 집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커다란 산이 있었다. 늘 변함없는 그 풍경도 나를 죽고 싶게 했던 것 같다. 산 너머엔 내가 사는 마을과 똑같은 마을이 있을 것이고, 그 너머엔 또 그런 곳이 있을 것이었다. 스무살이 되고 서른살이 되는 건, 가파른 산을 넘어 모든 것이 똑같지만 이름만 다른 마을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예쁘지도 않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반드시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그렇다고 남들이 가는 길을 의심 없이 따라갈 용기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나 설렘 같은 건 모두 남 얘기였다. 계절마다 미세하게 변하는 색깔과 냄새와 별자리는 나를 흥분과 좌절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조금씩 말고, 한순간에 확 바뀌길 바랐다. 사소한 변화에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기엔 내가 너무 권태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