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다시 동아시아를 말한다

 

민중시각과 민중연대

 

 

쑨 꺼 孫歌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 중국현대문일본근현대사상비교문화 전공. 국내 소개된 저서로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등이 있다.

 

 

201011월 하순, 대만의 진먼따오(金門島)에는 동아시아 각 지역에서 온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특수한 지리공간에서 이들은 ‘냉전의 역사와 문화’라는 제목 아래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창작과비평』(한국), 『케시까지』(け, 오끼나와),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일본 토오꾜오), 『대만사회연구』(臺灣社會硏究季刊, 대만 타이뻬이), 『러펑쉬에슈』(熱風學術, 중국 샹하이) 등 각지에서 영향력있는 잡지의 편집인과 필자, 그리고 대만과 동아시아 기타 지역에서 온 젊은 청중이 참여했다.

이번 진먼에서 열린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는 2006년 서울, 2008년 타이뻬이에 이어 세번째로 열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는 조금 특별했다. 그 특별함은 그간 국가담론 속에서 늘 주변지역으로 치부되었던 진먼(金門)과 오끼나와(沖繩) 두 곳이 회의의 중심화제였다는 데 있다. 중국대륙과 일본이 토론의 중심이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늘 동아시아의 주변지역으로 여겨지던 한국과 대만조차도 이번에는 주변 축에 끼지 못했다. 민족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담론틀 안에서는 항상 가려져 있던 진먼과 오끼나와가 이번 회의에서는 과거 혹은 지금도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참석자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주목이 역사적 성찰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은 단지 두 지역이 냉전구조 속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두 지역과 민족국가 정체성 사이에 존재하는 비틀린 관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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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먼은 행정구역으로는 대만에 속하지만 대만 본섬보다 중국대륙의 푸젠성(福建省)에 더 가까운 섬이다. 이곳은 국민당이 내전에서 실패하고 대만으로 퇴각할 때 끝까지 고수했던 반공전선으로서 1949년부터 1956년까지 군사관제(軍事管制)를 실시했으며, 1956년부터 1992년까지는 군사화된 통치가 이루어지던 준전시상태의 섬이다. 이곳에서 비행기로 타이뻬이의 쑹샨(松山)공항까지는 거의 한시간이 걸리지만 대륙 샤먼(厦門)의 우퉁항(通港)까지는 배편으로도 30분밖에 안 걸린다. 진먼 서북쪽 해안에서는 샤먼의 고층건물들이 또렷이 보이는지라 밤이면 샤먼의 야경을 감상하려는 유람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1958년부터 중국대륙은 진먼에 ‘격일(隔日)포격’을 실시했으며, 실탄에서 선전물에 이르기까지 공격은 20여년간 계속되었다. 국민당 군대 역시 이곳에서 샤먼과 취안저우(泉州) 일대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그 때문에 이 지역 양안 민중들 사이에는 모두 “첫번째 폭탄에나 맞아버려라!”라는 끔찍한 저주가 일상적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처럼 기나긴 전시상황 속에서 진먼은 완전히 전쟁에 적합한 환경으로 무장되었고 일반인들의 삶 역시 전쟁에 의해 구성되었다. 섬 안의 주요 지역은 지하가 모두 파헤쳐져서 지상의 거의 모든 중요한 건물들은 몇킬로미터나 되는 땅굴로 연결되어 있다. 연해지역에 쫙 깔린 지뢰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상태다. 양안관계가 완화되고 샤먼과 진먼 사이에 ‘소삼통(小三通)1이 실현됨에 따라 양안 민중들 사이의 교류가 늘었고, 덕분에 진먼 사람들은 대륙으로 건너가 집을 사거나 일자리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탈냉전’ 후에도 진먼은 군사화의 흔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곳의 민중은 군사화가 가져온 부정적 결과들을 떠안는 한편 이제 그간의 역사를 서술하기에 적합한 서사양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오끼나와의 전후 역사는 진먼보다 더 복잡하다. 1951년 일본은 연합국과 쌘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주권을 회복하는 대신 오끼나와를 미국의 관리하에 두기로 했다. 1972년 오끼나와는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진정한 독립과 자유를 얻지는 못했다. 이른바 ‘전후’ 시기에 미국 민정부(民政府)의 관리하에 있었을 때나 일본의 일개 현(縣)으로 존재할 때나 오끼나와는 늘 전쟁상태였고, 미군기지는 언제나 오끼나와인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2010년은 오끼나와인의 미군기지 반대투쟁이 거세진 해였다. 후뗀마(普天間) 비행장을 헤노꼬(邊野古)로 이전한다는 일본과 미국의 합의에 반대하고 미군기지 퇴출을 위해 오끼나와 민중은 지속적으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벌여왔다. 얼마전 실시된 오끼나와현 지사 선거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기지문제가 경선 구호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한 이 투쟁은 오늘까지도 최종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고, 오끼나와인은 여전히 한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패권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오끼나와는 한국사회와 좀더 닮았다. 회의에서 기조강연을 했던 오끼나와대학 전 총장이자 저명한 기지반대운동가인 아라사끼 모리떼루(新崎盛輝)도 이 점을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1995년 미군사병의 오끼나와 소녀 강간사건을 계기로 오끼나와 민중의 대대적인 항의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한국의 기지

  1. 2000년 12월 13일 대만정부가 진먼, 마쭈(馬祖) 지역과 대륙간 왕래를 일부 허용하기 위해 발표한 통신・통상・통항 정책의 속칭. 그에 비해 훨씬 폭넓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양안 왕래정책은 ‘대삼통(大三通)’이라 부르며 대륙과 대만의 합의에 따라 2008년 12월부터 실행되었다—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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