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세계문학, 동아시아문학, 한국문학

 

 

백지운 白池雲

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중문학. 역서로 『위미』 『열렬한 책읽기』 등이 있다.

 

심진경 沈眞卿

문학평론가. 평론집 『떠도는 목소리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있다.

 

이현우李玄雨

한림대 연구교수, 러시아문학. 저서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 『책을 읽을 자유』 등이 있다.

 

김영희金英姬

문학평론가. KAIST 교수, 영문학. 저서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 『세계문학론』(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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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균

 

김영희 (사회) 반갑습니다. 오늘 대화의 주제는 지금의 세계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입니다. 세계문학이라는 것이 개념도 복잡하고 폭넓은 주제지만, 전공이 다른 네 사람이 서로 보완해가면서, 이론적인 문제도 짚어보고 비교적 최근에 발표되거나 소개된 작품들을 논의하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좌담의 규모상 작품은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한・중・일의 몇몇 소설에 국한하기로 했는데, 일본문학 전문가를 모시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만, 작품을 선하는 과정에서는 그런 분들의 도움도 구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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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眞卿 문학평론가. 평론집 『떠도는 목소리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있다.

지난 2007년 『창비』 겨울호에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라는 특집을 마련했는데, 윤지관(尹志寬) 임홍배(林洪培) 두분의 대담 ‘세계문학의 이념은 살아 있다’에서 이 문제에 관련된 주제를 두루 다룬 바 있습니다. 그후 창비에서는 이 특집을 발판으로 얼마 전 『세계문학론』(창비담론총서 4)이라는 단행본도 냈는데, 저와 이현우 선생님이 여기 참여했죠. 그밖에도 영미문학 학술지 『안과밖』의 작년 하반기 특집 ‘세계문학을 다시 묻는다’와 각종 학술대회 및 국제문학인회의 등에서 논의가 이어지고 있고, 심진경 선생님이 편집위원으로 계시는 『자음과모음』이나 『세계의 문학』에서 중국 및 일본과 작품 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을 염두에 두면서 논의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발전시켜보자는 것이 오늘 대화의 주된 취지입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세계문학담론이 부각되는 현상과 그 배경에서 대해서부터 시작해볼까요?

 

 

세계문학담론의 부상

 

심진경 이번 대담을 준비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세계문학론의 출발점이 결국 ‘한국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아닐까 하는 것이었어요. 한국문학을 단지 자국 내에 제한된 국지적 차원의 문학이 아니라 좀더 넓은 지평에서 사유해보자, 기존의 문제제기를 새롭게 구성해보자라는 것으로요. 그런데 왜 굳이 세계문학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론』에 실린 여러 글을 보면 세계문학은 고정불변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민족문학의 개입에 따라 그 판단기준이나 보편성의 의미가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이고, 그런 차원에서 운동이나 실천으로 해석하는 것 같아요. 과거 민족문학론이 창비의 주요 문학담론으로서 활기를 띠었는데, 그것이 시대 변화에 적응하면서 지구화에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한 방법론으로 세계문학론을 제기하고 자기갱신을 시도한다라는 느낌도 받거든요.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세계문학 자체가 아니라 한국문학의 현실인 것 같아요. 지금 한국문학의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는 세계문학론이라면 허구적인 이론적 구성물에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그런 거대한 틀을 들이댔을 때 한국문학이 제대로 논의될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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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玄雨 한림대 연구교수, 러시아문학. 저서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 『책을 읽을 자유』 등이 있다.

 

이현우 저도 한국문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한데, 이념이나 담론으로서의 세계문학은 보편적인 문제제기라기보다 굉장히 독특한, 한국적인 시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러시아나 여러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세계문학이란 용어가 세계문학론으로서 구체화된 사례는 아주 드문 것 같아요. 러시아에서도 러시아문학과 외국문학을 합쳐서 세계문학이라고 개념을 잡고 있거든요. 백낙청(白樂晴) 선생이 쓰신 ‘괴테-맑스적 기획으로서의 세계문학’이라는 것은 상당히 새로운 관점이에요. 아마 그런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신 게 백낙청 선생이 아닐까 싶어요. 서구에서 세계문학을 보는 시각과 우리의 시각이 다른데, 그건 단적으로 한국어가 마이너 언어이기 때문에 갖는 문제의식이거든요. 일본이나 중국만 하더라도 우리보다는 그런 부담이 덜하지 않나 생각해요. 우리가 세계문학에서 지분을 가져야 한다, 거기에 참여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의식이 있는 듯싶어요. 그 경우에 우리가 세계문학에 참여한다면 어떤 언어로 참여할 것인지도 문제입니다. 물론 한국어로 참여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영어나 불어, 독어 등 서구언어로 번역된 작품으로 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판단기준이 된다면, 세계문학담론의 구성 자체에 우리의 상대적인 콤플렉스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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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池雲 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중문학. 역서로 『위미』 『열렬한 책읽기』 등이 있다.

 

백지운 세계문학론의 제안이 한국문학에 대한 고민과 관련되어 있다는 두분 말씀에 저도 동감이에요. 문제는 한국문학을 새롭게 보는 틀이 왜 세계문학이냐인데, 최근 창비 바깥에서도 세계문학에 대한 제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신승엽 선생이 민족문학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적 대안으로 제기한 게 있지요. 과거 주류담론으로 자리했던 민족문학론이 더이상 한국문학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동질화라는 새로운 현실이 세계문학이라는 시야를 요청한다는 것이죠.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에는 60년대 백낙청 선생이 제기했던 시민문학으로 되돌아가자는 논의도 있었어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 문제의식의 출발점엔 동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민족문학론의 시의성이 사라진 건 분명한데 민족문학에 대한 각 층위의 대항담론들까지 함께 사라지면서 한국문학계는 오랫동안 담론의 진공상태였거든요. 이 진공상태를 돌파하려면 역시 민족문학론의 하강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튼, 우리 삶의 현실, 우리 문학의 현실을 어떤 틀로 이론화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고, 그것을 돌파하려고 모색하던 중에 세계문학론이 나오게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金英姬 문학평론가. KAIST 교수, 영문학. 저서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 『세계문학론』(공저) 등이 있다.

金英姬
문학평론가. KAIST 교수, 영문학. 저서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 『세계문학론』(공저) 등이 있다.

 

김영희 담론이 나온 배경을 주로 말씀하셨는데, 근래 세계문학이라는 문제틀이 부각된 데는 해외문학과 한국문학의 소통이 쌍방향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적인 상황도 중요할 듯합니다. 그러면서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이라는 과제가 부각되고 그와 관련된 논의들도 꽤 있었지요. 이번 책도 그 일환이지만, 창비에서는 이 문제를 더 포괄적으로 보자, 세계문학 자체도 지구화 국면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 아래, 한국문학의 갱신과 서구 중심의 세계문학 질서에의 개입을 함께 고민해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문학론이라 는 것이 민족문학론의 공백을 메운다기보다, 민족문학론의 출발부터 함께했던 세계문학적 시야를 달라진 조건에 맞게 확대하고 구체화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고 봅니다.

‘괴테-맑스적 기획’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여기서 비롯된 것일 텐데, 둘을 묶어 부를 때는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라는 객관적 현실인식과 그에 제대로 대응하는 세계문학을 앞당기자는 실천적 문제의식이 함께 강조되는 잇점이 있겠지요. 괴테와 맑스의 발상이 서로 상통한다는 인식 자체는 일부 서구 논자들도 내세우는만큼 한국에 국한된 것은 아니겠고, 굳이 우리 논의의 특성을 말한다면, 세계문학을 국민문학/민족문학과 별개라고 여기거나 대립되는 실체로 보는 게 아니라 튼실한 세계문학을 일궈나가기 위해서도 국민문학적 성취들이 핵심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정도랄까요. 아무튼, 괴테든 맑스든 실천적 기획으로서 세계문학을 이야기했다면, 이런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세계문학에 대한 가장 흔한 상(像)은 아직도 세계문학전집 식의 것일 테니까요. 세계문학이라는 말의 용법 자체가 한가지가 아닌 셈인데, 이쯤에서 개념 정리를 좀 하고 지나가면 어떨까 싶네요.

 

 

세계문학의 몇가지 개념

 

이현우 세계문학이란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혼용되는데 대략 이렇게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는, 외국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foreign literature)이 있고 둘째, 서구문학의 정전(正典)이지만 구색 맞추기로 아시아권 작품을 끼워넣는 식의 세계문학전집에 해당하는 세계문학(world classics)이 있습니다. 셋째, 괴테가 발명해낸 고유한 개념인 세계문학(Weltliteratur, world literature)이 있고 넷째, 지구문학(global literature)이라고 할 만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문학이 있겠고요. 세계적 규모의 문학시장이 형성되면서 꼬엘류(P. Coelho)나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같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나타났는데, 이건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거죠. 과거 국민문학의 거장들은 자국 내에서 유통되었죠. 셰익스피어만 하더라도 나중에 가서야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은 것이잖아요. 지금은 마치 영화가 동시개봉되듯이 문학작품도 전세계에서 실시간으로 번역 출간되고 수백만부가 팔리는 현상이 나타나죠. 이 모든 걸 통칭해서 세계문학이라고 부르다 보니 개념의 혼란이 있는 것 같아요. 실제 작품을 볼 때 지향점이나 이념으로서의 세계문학과 ‘세계의 문학’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심진경 기본적으로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넷째의 지구문학을 제외하고 둘째, 셋째 개념이 일종의 ‘좋은 문학’, 상업성에 치우치지 않는 문학적 기준을 성취하면서도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내는 문학을 가리키겠지요. 괴테 식의 개념도 국민문학이면서 세계수준의 성취를 이룬 문학이라는 점에서 좋은 문학이지만, 좋은 문학이 다 세계문학이 되지는 않죠. 번역 문제도 있고, 자국 내에서는 뛰어난 평가를 받았어도 보편적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을 세계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겠습니다. 무엇이 세계문학인가라는 규정보다는 세계문학의 개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충돌 자체를 주목하면서 거기서 생산되는 담론으로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백지운 월드 클래식이란 건 지금도 통용되지만, 괴테가 살던 시절과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어요. 일국 내에서 성취를 이룬 작품이 오랜 시간 뒤 세계문학으로 평가받는 게 과거의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내가 동시에 같은 작품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마련됐다는 것이 큰 차이지요. 전혀 다른 장소에 사는 다른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공유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죠. 괴테나 맑스 시대에는 세계문학이 이념형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이 현실로 육박하고 있어요. 오히려 세계문학의 물적 토대는 있는데 이념은 없는,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영희 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념’ 내지 ‘기획’으로서의 세계문학 개념이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그럴 때 세계문학에 대한 고민이 방향성을 가질 수 있겠죠. 그렇지만 다른 개념들에도 각각 특정한 실천적 과제를 부각하는 잠재력이 있고, 그런 점에서는 이들을 함께 사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세계문학’이라면 대체로 세계에서 산출된 문학의 총화, 세계의 모든 문학을 지칭하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탁월한 문학 즉 ‘세계문학 정전(正典)’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전자와 같은 중립적인 용법과 후자의 가치판단적인 용법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들여다보면 서구중심적인 현재의 세계문학질서의 문제성이 더 부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