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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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 李施帛

경기 여주 출생. 1988년 『동양문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종을 훔치다』, 소설집 『누가 말을 죽였을까』 『갈보 콩』 등이 있음. seeback@paran.com

 

 

 

잔설(殘雪)

 

 

아무리 하늘에 계신 양반이라지만 해도 너무한 일이 아니냔 말이다. 무슨 놈의 눈을 시도 때도 없이 뿌려대니 견딜 수가 있겠는가. 뿌리려면 한번에 퍼붓든가, 꼭두새벽부터 넉가래를 붙들고 손이 부르트도록 치우고 나면 구름 사이로 빠끔히 내다보고는 내처 붓기를 벌써 사나흘째다. 하늘님도 넉가래를 배에 대고 밀다가 덜커덕 돌부리에 걸려 ‘악!’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이 핑 돌아보셔야 땅바닥에 엎드려 지내는 인간들 사정을 헤아리려나.

모르기는 제 몸에서 내어놓은 자식도 마찬가지였다. 눈발이 펄펄 내리는 아침부터 밥상도 받기 전에 차를 끌고나가는 아들 진철에게 ‘너는 노상 생기는 것두 이 워째 그리 바쁘냐’고 한마디했더니, 아버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다고 두덜거리던 것이다. 알지 못하는 건 너라고, 네까짓 게 알기는 뭘 안다고 나대느냐고 한마디 더하려던 김영감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느덧 입에서 내어놓으면 잔소리요, 걱정해서 해주는 말도 싫은 소리로만 들릴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날이 어지간히 눅으면서 전나무 우듬지에 얹혔던 눈이 지나가는 바람도 없이 길바닥에 툭툭 내려앉는 걸 김영감은 언 발로 일삼아 걷어찼다. 그 통에 몇 남지 않은 잎을 매달고 겨우내 가랑거리던 졸참나무에 얹혀 젖은 깃을 털어대던 박새 한마리가 오두방정을 떨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짓까불며 날아다녔다. 웬만큼 쏟아냈는지 두텁던 구름이 멀게지며 꼭 아침 밥상머리에서 젓가락으로 가르마 빗어넘기는 퇴기 이마빡 같기도 하고, 반쯤 얼어서 물크러진 달걀노른자 닮은 겨울 해가 때꾼한 얼굴을 오랜만에 내밀었다. 밤낮으로 서걱거리던 억새들을 지지르고 허옇게 쌓였던 눈들이 설핏한 햇귀에 마지못해 숨통을 거뭇거뭇 내어놓았다. 예전 같으면 보리밭을 푸근히 덮어 농사에 도움이 된다고나 하지만, 이제 보리는커녕 멀쩡한 논을 메워 소나무나 길러먹는 시절에는 그야말로 객쩍게 내려 부질없이 녹아버리는 눈이었다. 삯 없는 땀만 흘려댄 탓인지 목이 말라 김영감은 노간주나무 울에 얹힌 눈 한줌을 쥐어 입에 넣었다. 삼동에도 강 파헤치기 바쁜 굴삭기들이 뿜어댄 매연 탓인지 눈에서도 기름내가 은근히 배어나는 듯했다. 김영감은 강에서 퍼낸 토사들이 허옇게 눈에 덮여 난데없는 설산을 이룬 강 언저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 무슨 급한 소식이라도 있나 싶어 텔레비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자니, 방송마다 손녀딸 같은 것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와 혀 짧은 소리로 갓난쟁이 시늉을 내는 통에 공연히 곁에서 넋놓고 들여다보는 마누라만 퉁바리를 주고 말았다. 한쪽에선 서로 포를 쏴가며 사람이 죽네, 집이 부서지네 하는 판에 단추 하나만 누르면 단박에 지붕을 뚫고 대포알이 떨어질 방 안에선 천하태평이다.

“아, 산사람은 살어야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약 대신 욕 먹을 말토막만 골라 하는 마누라를 흘겨보며 한마디 퍼부으려는데, 방문이 기척도 없이 벌컥 열린다.

“초저녁부텀 문 걸어잠그구 뭘 허신댜?”

이세(里稅) 걷을 때나 친히 찾아다니는 이장이 툇마루를 깔고앉은 채 겨우내 구레나룻 농사만 무성히 지은 얼굴을 불쑥 들이민다.

“공연히 마나님 귀찮게 허지 마시구 회관으루 막갈리나 자시러 나오셔유.”

가뜩이나 출출하던 판에 귀가 솔깃해 용무도 묻지 않고 그 길로 이장을 따라나선다.

겨우내 돈 안되는 안노인들 몇몇이 돈 안 드는 이야기나 늘어놓으며 공동으로 돌리는 보일러 방에서 엉덩이나 지지는 마을회관 문 앞에 모처럼 신발들이 수북하다. 그 가운데 낯익은 구두 하나를 발견한 김영감은 목을 디밀어 방 안 윗자리에 일찌감치 와 앉은 아들 진철을 걸터듬는다. 마당 그득하니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져도 손 하나 까딱 않더니 이런 자리에는 어김없이 일등이다. 무슨 회의라면 빠지지 않고 끼어앉아 돈 한푼 안 생기는 입품만 팔러 다니는 아들이 김영감은 영 마뜩찮았다. 남들은 듣기 좋은 말로 언변 좋고 똑똑하다지만 자고로 가진 것 없이 입만 바른 것들이 갈 데라고는 포도청밖에 더 있던가. 남의 자식들처럼 구순하니 머리 숙이고 있다가 공것으로 굴러다니는 눈먼 돈이나 두꺼비처럼 더끔더끔 집어삼키는 것이야말로 똑똑한 짓이 아니겠는가. 쉰을 바라보는 자식이건만 늙은 애비가 보기에 그런 헛똑똑이가 없었다.

내년에 쓸 부산물 비료 신청을 받고나서 이장이 지나가는 말처럼 전한다.

“그리구 뭔 일 있으믄 저기 노인요양원으루 피하래유.”

“뭔 일?”

“아, 연평도 거시기유.”

“아니, 창운리서는 꽃다방으루 가랜대는데.”

“옘비, 누구는 지린내 나는 노인네들 기저귀 갈구, 팔자 좋은 것들은 분냄새 풍기는 미쓰 박이 타다주는 커피 마시믄서 데레비루 중계방송 귀경허것네.”

“용인인가 워디서는 고인돌 밑으루 기들어간대는디, 거보담은 훨 낫지, 뭘.”

“아주 게서 나올 것두 이 폭 파묻히믄 되것네.”

일년 내내 들여다보는 것이라곤 그저 텔레비전뿐이니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안방 차고앉은 노인들이 더 빠삭했다.

“그나저나 그것들은 강도나 다름지. 쌀 안 준다구 포를 쏴대?”

“아, 시상에 배고픈 것덜 이길 장사 있어? 어채피 굶어죽을 판에 이판사판으루 한판해보자는 데야……”

“까짓것들이 한판헐 심이나 있것어? 땅크건 뭐건 지름이 어 죄 세워놨다는디.”

“땅크보담 더 무선 것이 그지여. 천만이 깡통 뚜딜기구 내려와봐. 여나 그나 단체할인으루 싸그리 거덜나구 말지.”

“내려오긴 워딜 내려와. 여두 길바닥에 신문지 깔구 자빠진 것들이 수두룩헌디.”

“모르믄 가만들이나 기셔. 재주는 뭐가 부리구 시방 재미는 뙤놈이 볼 판이여.”

“뙤놈이구 양키구 간에 즌쟁 나믄 봄에 가기루 헌 동니 관광은 워뜨케 되는겨?”

한바탕 연평도에 대포 쏘아댄 이야기를 콩 주워먹듯 삼켜대는 중에 누군가 안쪽에서 새된 소리를 내지른다. 돌아보니 진철이다.

“이장 선거는 은제 허나유?”

이장 자리라는 것이 제발로 못해먹겠다고 걷어치우기 전에는 몇해고 우려먹기 마련인데, 지난가을에 이장이 집을 아랫말로 옮기면서 구시렁거리는 소리들이 돌아다녔다. 이장은 서울로 떠난 제 형네 집에 눌러살았는데, 느닷없이 사업자금에 몰린 형이 집을 팔겠다는 바람에 부랴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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