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중국 국내문제의 냉전시대적 배경
중화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성찰
첸 리췬 錢理群
전 뻬이징대학 중문과 교수. 루 쉰을 중심으로 한 중국근현대문학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체험과 현실인식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왔다. 저서로 『知我者謂我心憂』 『1948, 天地玄黃』 등이 있음.
이번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게다가 발표까지 한다는 것이 저로선 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주제가 제 전공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심포지엄 의제와 제 연구를 어떻게든 끌어다 붙일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곧 저우 쭤런(周作人)이 말한 ‘탑제(搭題)’1)인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오 쩌뚱(毛澤東)과 당시의 중국을 연구할 때 한가지 현상에 주목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마오 쩌뚱이 중국 국내문제를 처리할 때 늘 국제문제를 고려했고, 거기엔 냉전이라는 국제정세의 배경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것이 ‘중국 국내문제의 냉전시대적 배경’이라는 주제입니다만, 실은 이것도 제가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대륙의 저명한 역사가 양 쿠이쑹(楊奎松)의 『‘중간지대’의 혁명: 국제적 거대구도하에서 본 중국공산당 성공의 길』(中間地帶的革命: 中國革命的策略在國際背景下的演變, 1991)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일부 내용은 양선생의 연구성과를 활용한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 분야에 전문적인 연구를 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저 그런 자료를 접하고 몇몇 결정적 시기 마오 쩌뚱의 전략결정에 냉전상황이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었는지 지엽적인 얘기를 할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1. 1946~47년
2차대전이 종결되고 중국의 항일전쟁도 끝난 뒤 중국 국내의 최대 전략문제는 바로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이 ‘전(戰)’할 것인가 ‘화(和)’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마오 쩌뚱이 이끈 중국혁명 자체의 논리와 그 자신의 개인적인 바람에 따르면 그 답은 당연히 전쟁을 통해 최종적으로 국민당의 통치를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적 압박에 부딪힙니다. 미국과 소련 양대국 모두 중국내전으로 3차대전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지지하에 국무장관 마셜(G. Marshall)을 중국에 파견하여 중재에 나섭니다. 중국문제에 중국의 국민당, 공산당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미소 양국이 결정권을 쥐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잘못됐다 싶은 건 못 참는 마오 쩌뚱으로선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그가 자기의 의지에 따라 중국문제를 수습하려면 우선 국내외를 향해, 그리고 공산당 내부를 향해 두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습니다. 첫째는 내전이 개시되면 미국이 출병할 것인가 하는 문제, 둘째는 중국의 내전이 3차대전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여부였습니다. 이에 마오 쩌뚱은 1946년 8월 미국기자 애너 스트롱(Anna L. Strong)과의 대담에서, 냉전 개시단계의 국제정세에 대해 자신의 판단과 분석을 내놓습니다.2) 마오는 이후 널리 회자된 “미 제국주의와 모든 반동파는 전부 종이호랑이”라는 단언 말고도 처음으로 ‘중간지대’ 이론을 내놓았는데, 실은 이것이 더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광활한 지대가 가로놓여 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의 많은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이 그 속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세가지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첫째, “미국 반동파는 이들(중간지대) 국가를 힘으로 굴복시키기 전에는 소련을 침공하자는 말은 꺼낼 수 없을 것이다.”3) 그러므로 미소 양국은 모순과 투쟁 속에서 타협을 구할 수밖에 없고 중국내전은 결코 또 한번의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킬 리 없다.
둘째, 소련과 미국의 대치는 역으로 미국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고, 미국이 출병하여 국민당을 도와 내전을 벌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셋째, 중국을 대표로 하는 중간지대의 혁명은, 소련을 리더로 하는 민주・반제혁명진영의 역량을 강화하여 직접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역량 대비에 영향을 주고, 아울러 미래세계의 향방에 영향을 줄 터이다.4)
요컨대, 마오 쩌뚱은 바로 이런 ‘중간지대’ 이론에 의해 계발되고 힘을 얻으며 자주독립적으로 중국혁명의 최후승리를 이끈 것입니다. 아울러 2차대전 이후의 국제문제를 관찰하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었는데, 바로 미소 양대국의 대립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중간지대’ 국가들의 역할에도 주목한다는 점입니다. 이들 중간지대 국가는 각자 서로 다른 수준으로 미소 양국의 영향과 제약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독자적인 이해관계가 있었고 국제적 사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마오 쩌뚱은 의식적으로 아예 중국을 ‘중간지대’ 국가의 자리에 갖다놓습니다. 이런 자리매김은, 중국 입장에서는 ‘일변도(一邊倒)’5)를 분명히해서 소련을 리더로 하는 사회주의진영 국가들의 외교 및 국내정책의 동반자가 되면서도 자연스럽게 일종의 제약을 가하는 역할도 함으로써, 소련과의 동맹관계를 보증하는 동시에 상대적 독립성도 확보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반둥회의에서 중국이 ‘평화공존’ 5개 원칙을 제안하고 비동맹국운동에 시종 지지를 표명한 것은 모두 자신의 독자성을 위해 필요한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1956년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이후 마오 쩌뚱은 즉각 하나의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소련의 사회주의모델 외에 중국 스스로의 발전적 사회주의모델을 구축하고자 미국과 소련의 외부에서 ‘제3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려 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에게서 이야기된 부분이지요. 저는 이 문제를 파고들면서 한가지 자료에 주목했는데, 마오 쩌뚱의 사고맥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왕 리(王力)가 『반사록(反思錄)』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1956년 8월 중국은 휘트먼(W. Whitman)의 시집 『풀잎』의 역자 추 투난(楚圖南)을 단장으로 하는 대규모 예술단을 남미에 파견하며 왕 리가 부단장 겸 비서장을 맡도록 결정합니다. 당시 왕은 중앙국제활동지도위원회의 부비서장으로 있었는데, 이 위원회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대외연락부장 왕 자샹(王稼祥)이 직접 마오 쩌뚱에게 책임보고를 하는 조직이었던바, 이는 마오의 전략적 결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왕에 따르면 당시 이미 미국정부의 초청을 받은 상태였고 남미 방문 후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답니다.6) 그러나 대표단이 한창 아르헨띠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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