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김승일 김상혁 이제니 이준규의 시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우울을 애도하다」 「21세기 오감도(烏瞰圖), 21세기 소년 탄생기(誕生記)」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사건 이후

 

2000년대 한국시단에는 기존의 시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경향의 시들이 출현했다. 이에 비평계는 ‘미래파’(권혁웅), ‘다른 서정’(이장욱), ‘뉴웨이브’(신형철)란 명명을 통해 새로운 시들에 답하는 비평적 담론들을 선보인 바 있다. 그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기존의 비평적 언어들로는 명명 불가능한 새로운 시적 현상이 흡사 사건처럼 발생했다는 데는 입을 모았다. 물론 반론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적 경향을 긍정하는 저 담론들의 명명법과 가치평가에 의문을 표했을 뿐, 이질적 경향의 시들이 출현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한국 시단을 위해서는 꽤나 반길 만한 사태였다. 오랜만에 시단에 형성된, 비평들의 불화와 대립은 한국시의 주류에 대한 판단에 혼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한국 시의 주류가 위치하는 장소는 텅 빈 자리가 될 수 있었다. 단순한 질문이 이를 증명한다. 지금 한국 시의 주류란 무엇인가. 낯선 것으로 분류되는 시적 경향인가, 아니면 그것과 구분되던 전통적 서정시인가. 답을 하기가 애매할 것이다. 이 애매함은 여유의 다른 이름이며, 우리 시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증거다.

한국 시사에 등장한 저 ‘텅 빈 자리’는 여러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새로운 시적 경향을 형식화할 때 말해질 수 있는 것 또한 ‘텅 빈 자리’의 발견이기에 그렇다. 신형철(申亨澈)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자아와 주체의 구분 논리를 빌려와, 새로운 시적 경향에서 발견되는 의미론적 공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새로운 세대의 많은 시들에는 ‘나’가 없다. 그들은 자명한 ‘나’를 지우면서 미지의 ‘나’를 찾아간다.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넘어 점멸하듯 출현하는 주체성의 영역을 탐험한다.”1) 기존 세대의 시와 새로운 세대의 시를 성급하게 이분화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당시의 시들이 ‘나’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를 좀더 뚜렷하게 드러내 보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권혁웅과 이장욱의 비평에서도 말해진 바 있듯, 새로운 경향의 시들은 하나의 목소리가 일관된 진술 속에 의미론적 소실점을 향해 내달리는 방법에서 벗어나 여러개의 목소리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현실의 움직임을 상대하며 때로는 모이고 또 때로는 더 분산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분명 새로운 세대의 시들은 기존의 시들과의 관계에서 주체에 대한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 단절이 풍부한 감각적 사유를 도래시킬 가능성을 예감하게 했다. 다시 말해, 우리 시에 내재한 텅 빈 자리에서부터 다양한 주체들의 출현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그후 5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시는 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을까. 그사이 우리 시에는 정말 다양한 주체들이 출현했을까.

 

 

죽음을 고하여 죽음을 완결하라

 

우리 시들 안에 텅 빈 자리가 마련되었고, 그것이 또한 각각의 시편들 속에서도 발견되는 형식적 특징이라 할지라도, 이 현상을 곧바로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빈 자리란 늘 어느 한 주도적 힘에 의해 채워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고, 더구나 그 주도적 힘의 성격이 우리가 진정 원하는 모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젝(S. Žiek)이 여러 글에서 언급했듯 이상(理想)의 몰락은 종종 기이한 이상의 대체를 불러오지 않던가. 그러니 우리는 이 상황을 바로 수긍할 것이 아니라 좀더 회의해보야야 한다. 이 텅 빈 곳으로부터 진정 새롭고 다양한 주체가 형성되는가의 문제를 의심하고 조사해야 한다. 조사라고? 그렇다.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지닌 철학자 바디우(A. Badiou)가 철학의 한 역할을 사건에의 개입과 명명을 통해 사건의 진정한 새로움을 조사하는 일이라 한 바 있듯, 문학비평 또한 텍스트들에서 비롯된 유사 사건과 유사 주체들에 속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문학의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때때로 철저한 사후조사를 실행해야 한다.

미래파 담론이 한창일 때 시의 형식적 변화로 언급된 바 중 하나가 장광설의 출현이었다. 권혁웅(權赫雄)은 이에 대해 “단형의 틀에 우겨넣기에는 시의 전언이 너무 풍부”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우리의 시단이 다양한 발화들로 채워지기를 기대하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기대는 섣부른 것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한명의 시인이 한편의 시에서 여러 종류의 전언을 발설할 수 있다고 해서, 여러명의 시인이 각자의 시에서 다채로운 이야기를 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장이지는 「차이의 수사, 범용성의 수사」에서 젊은 시인들이 알레고리적으로 장황하게 발설하는 시들이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2) 이를 비평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기우로 치부하기엔 다소 걸리는 점이 있다. 실은 이 질문은 새로운 시적 경향의 출현과 관련된 담론들이 태동할 때쯤 이미 제기된 적이 있었다. 당시 진은영(陳恩英)은 새로운 경향의 시들이 전복적이라기보다 다소 빤한 문학적 수사를 지겹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진 바 있다3). 개인적으로 저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