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 2

 

‘천사-되기’에서 ‘무식한 시인-되기’로

평론가, 시인, 문맹자의 문학적 정치들

 

 

심보선 沈甫宣 시인.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초』가 있음. bosobored@gmail.com

 

 

1. 평론가들: 천사-되기의 꿈

 

“모든 것이 한 시인의 고뇌로부터 시작”했다.1) 나에게 이 말은 문학과 정치에 관하여 최근에 평론가들이 한 말 중 가장 눈에 띄었다. 물론 이 평론가(신형철)는 문학과 정치에 대한 논의 전체의 기원을 한 시인의 고뇌에 정초시킨 것은 아니리라. 다만 그가 판단하건대 그 논의들이 중요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하나의 기원을 한 시인의 고뇌에서 찾은 것이리라. 사실 다른 몇몇 평론가들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평론가들은 대체로 “해야 한다”라는 정언명령의 형태로 자신들의 의견을 시인들에게 제시했다. 예를 들어 백낙청(白樂晴)은 “말들의 운행”에 천착하는 “특공대의 용맹”(김행숙이나 김언과 같은 소위 실험시를 쓰는 시인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에게 “대중과 함께하는 좀더 다양한 공부와 사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권고했다.2) 그리고 아래와 같은 보다 구체적인 권고도 있었다.

시쓰기는 고통받는 이웃에게로, 노동자에게로, 자연에로, 사물에로, 시간에로, 장소에로, 언어에로, 이 모든 것들과 연결된 나 자신에게로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노력과 좌절 사이에서,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서 폭주하는 균열과 전율을 살아내고 기록해야 한다.3)

 

이들은 시인의 고뇌를 “공부와 사업” “노력과 좌절” 같은 다분히 ‘주의주의’(voluntarism)적인 용어들로 표현한다. 어쩌면 이들은 모든 시인이 자기만의 고뇌를 단단한 씨앗처럼 품은 열매이기를, 그리하여 시인 각자가 그 이후 전개될 사건의 유일무이한 기원이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평론가들이 말하는 문학과 정치에 대한 시인의 고뇌는 수학적으로 비유하면 ‘자아로부터 타자로 다가가는 고뇌’라는 벡터(vector)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학적 양과 달리 시인의 고뇌를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는 없다. 어느 시인의 고뇌가 가장 강한가? 개별적 고뇌들을 합하면 공동체의 고뇌가 되는가? 한국 시인들의 고뇌는 외국 시인들의 고뇌에 비해 얼마나 강한가? 그 고뇌가 귀속되는 장소 또한 불분명하다. 그 고뇌는 시인의 내면에 귀속되는가? 시인의 삶에 귀속되는가? 시쓰기라는 행위에 귀속되는가? 혹은 그 모든 것에 동시에 귀속되는가?

이렇듯 고뇌라는 것은 정체불명이다. 실제로 백낙청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정치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작가가 생활에서는 어떻게 실험하고 작품으로는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해 정해진 답은 없고, 창작을 위해 어떤 생활을 해야 된다고 강요하는 일은 백해무익이기 쉽다. 이 대목에서도 각자 자기 방식으로 치열한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4) 그러므로 ‘시인들이여, 더 많이 더 잘 고뇌하라!’ 식의 포괄적이고 모호한 요청으로 압축되는 주의주의적인 정언명령은 정작 그 명령의 직접적 대상인 시인들의 시쓰기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평론가들은 실제적인 효력을 갖지 못하는 주의주의적 정언명령을 구사하는가? 이 주의주의적 정언명령은 혹시 다른 효용을 갖는 것은 아닌가?

평론가들은 문학과 정치에 대한 시인의 고뇌—무엇으로 확정될 수도 없고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는 벡터값—를 두고 불가능한 셈을 하면서 하나의 우회로를 선택한다. 그것은 특정 시인들의 특정 시들을, 그들의 문학적이고도 정치적인 고뇌에 대한 ‘근삿값’으로 도입하는 일이다. 문학과 정치를 논하는 지면에서 평론가들은 문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두 바람직한 ‘본보기 시’를 선별하고 해석한다. 그러나 정작 주목할 것은 ‘공부하고 사업하고 노력하고 좌절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 본보기 시의 효용이다. 평론가들은 일군의 시들을 시인의 고뇌를 표상하는 본보기로 선별하고 해석하는데, 이 선별과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가 서로 경합하고 참조하면서 또다른 논의를 이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문학과 정치에 대한 논의는 켜켜이 축적되어 모종의 정당성을 지닌 담론으로 사회화된다. 이것이 바로 주의주의적 정언명령의 진정한 효과다. 고뇌라는 불확정적인 공백을 설정한 후 그것을 간접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다양한 텍스트를 도입하는 끊임없는 ‘차연’(diffrance) 속에서 문학과 정치에 대한 평론은 쓰이고 또 쓰이는 것이다.

문학과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련의 평론들은 무엇보다 문학제도의 전통적 분할선들—시인과 독자, 시인과 평론가, 시인과 시인, 텍스트와 텍스트,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분리를 문제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단순하고도 명백한 증거는 선별과 해석 대상이 되는 텍스트가 예외없이 등단한 시인들—그것도 대체로 알려진 시인들—의 시라는 사실이다. 제도적 절차를 거쳐 선택된 시인들을 한번 더 걸러낸 뒤 이들의 시에 내리는 평가, 즉 “배제적 합의성”(랑씨에르)이라 부를 수 있는 정식에 따라 문학과 정치라는 테마가 다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새 술은 새 포대에!”라고 재청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새 술”은 없었다. 문학과 정치라는 테마는 문학이라는 술판에서 가장 오래된 술 중의 하나다. 그러나 가장 위험해 보이는 이 술, 문학의 자율적 위상을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이 독주(毒酒)야말로 실은 ‘문학(술)판’을 다른 (술)판들과 분리시키고 나아가 그 분리로부터 문학(술)판이 사회적 위신을 획득하도록 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해왔다. 어떻게 문학과 정치라는 테마가 문학제도의 ‘분리’를 가져오고 동시에 ‘분리의 이윤’을 문학에 가져다주는가?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아무러한 반성 없이, 9시에 회사 문에 들어서서, 잡담하고 점심 먹고 5시에 퇴근하는, 그런 일과가 월, 화, 수, 목…… 계속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에,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뒤를 보지 못하는 갇힌 의식에, 문학은 그것이 진실된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아니 더 나아가서 문학은 그것의 존재가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과의 거리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드러낸다. 그 거리야말로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이다. 불가능한 꿈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삶은 비천하고 추하다.5)

 

위의 인용문은 1977년에 출간된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김현에 따르면 문학은 언제나 꿈과 현실과의 “거리”를 둔 채, 그 거리를 하나의 “척도”로 견지하여 ‘세계의 비참’을 견딜 수 없는 추문으로 드러낸다. 이때 문학은 천사이다. 엄밀히 말하면 천사가 되는 아름답고 불가능한 꿈이다. 어디까지나 꿈이기 때문에 문학의 ‘천사-되기의 꿈’은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 무능력으로 인해 세계의 비참이 드러난다. 자신을 접근 불가능하고 아름다운 꿈으로 드높임으로써 세계를 더욱 비참하게 폭로하는 것이 문학의 정치이다.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은 그와 거리를 두고(비록 팔은 뻗겠지만) 그가 현실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탈주로에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문학과 정치에 대한 시인의 고뇌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평론가들은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시인의 노력과 좌절, 공부와 사업을 시 텍스트가 내는 “자체제작 소리”(김수이)를 ‘간접적 증거’로 삼아 판별한다. 그들은 시라는 제작된 꿈에서 천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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