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맑스의 비판적 유물론과 ‘단일한 과학’
유재건 柳在建
부산대 사학과 교수. 주요 논문으로 「맑스와 월러스틴」 「통일시대의 개혁과 진보」 「미국 패권의 위기와 세계사적 전환」 등이 있음.
jkyoo@pusan.ac.kr
1. 머리말
오늘날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을 극복하는 과제의 모색에서 19세기의 인물 칼 맑스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묻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기 시대에 이미 단일한 과학의 수립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어떤 뜻에서 과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란 얼핏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맑스의 사상적 발전과정에 대한, 즉 변화나 단절 여부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맑스가 인간과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하는 단일한 과학을 제창한 것은 두번인데,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이하 『초고』)와 1845~46년 엥겔스와의 공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다. 그런데 바로 이 두 저술 간의 사상적 대립관계 여부—종종 인간주의 철학과 유물론적 과학으로 대비되어—는 맑스를 둘러싼 논쟁 가운데서도 극심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양 저술에서 단일한 과학을 주장하는 전반적인 논조도 약간 다르다.
역사 자체는 자연사의 현실적(wirklich, 혹은 진정한) 일부고 또한 자연이 인간으로 생성되어가는 현실적 일부다. 앞으로 인간과학이 자연과학을 포괄하듯이 자연과학은 인간과학을 포괄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과학이 존재할 것이다.(강조는 맑스)
우리는 오직 하나의 단일한 과학(eine einzige Wissenschaft), 즉 역사과학만을 알고 있다. 역사는 자연사와 인간사라는 두 측면에서 볼 수 있고 그렇게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양 측면은 분리 불가능하다. 자연사와 인간사는 인간이 생존하는 한 서로 의존한다. 자연과학이라 일컬어지는 자연사는 지금 여기서 우리 관심사는 아니다.1)
두 저술 간 차이는 겉보기에도 드러나는데, 가령 『초고』는 철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분열된 현실을 비판하는 반면, 『독일 이데올로기』는 ‘철학’의 종언을 공언하면서 처음으로 유물론적 역사관의 윤곽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맑스가 ‘단일한 과학’을 주장한 참뜻을 알고자 할 때 어느 쪽에 의지하는가에 따라 견해가 갈리고, 게다가 논자들 스스로 어떤 과학관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옹호와 비판이 겹쳐져 논쟁이 얽혀 있는 실정이다. 물론, 맑스가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한다고 한 『자본』의 주장은 어딘가 『초고』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초고』에 대해서조차 하버마스(J. Habermas)처럼 인간과학을 자연과학이 포괄한다는 발상에 『자본』에서 드러나는 실증주의가 잠재되어 있다고 보는 이도 있는가 하면, 알뛰쎄르(L. Althusser)처럼 『초고』를 인간주의 철학의 문제틀에 사로잡힌 저술로 규정하고 맑스의 과학적 저술에서 배제하는 이도 있다.2)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 사상의 ‘인식론적 단절’이 일어난다고 보는 알뛰쎄르는 인간과 사회를 특정한 관계들의 복합체로 보는 역사과학이 등장하면서 인간주의적 문제틀은 폐기되었다고 간주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하버마스와 알뛰쎄르는 상반되는 성향의 철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비판과 지지로 나뉘긴 하지만) 과학주의자로서의 맑스 상(像)을 각인시켜주는 데는 일치하는 셈이다.
여기서 이 논란에 깊이 들어갈 겨를은 없다. 내 생각에는 위의 두 저술 간에 단절 같은 것은 없으며, 둘 다 맑스가 자처한 ‘반(反)철학’ ‘반(反)체계’의 ‘새로운 유물론’의 관점에서 단일한 과학을 제창했다고 본다. 이 유물론을 맑스의 취지대로 구분 없이 ‘비판적 유물론’ ‘실천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 가운데 그 어떤 것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적 유물론의 입지점으로 인해 사회를 복합적 관계로 분석하는 역사과학이 가능해졌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 과학은 과학주의와는 근원적으로 대립된다. 실제로 알뛰쎄르가 과학의 독자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로 간주한 인간의 실천적 관심, 경험, 선과 미의 추구 같은 것들이야말로 맑스가 과학의 토대로 보았던 것들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점에서는 알뛰쎄르가 철두철미 철학자답게 맑스의 어떤 한 측면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우리에게 뭔가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준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은 그토록 논란 많은 이 문제에 대해 알뛰쎄르식의 ‘징후적 독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학자에게 익숙한 사료와의 대화를 통해 맑스 사상이 대략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추적해보려는 것이다.
2. 비판적 유물론과 과학
맑스가 근대과학의 본성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시작한 것은 1844년에 쓴 『초고』에서다. 다소 혼란스럽고 현란한 문투의 이 미완의 노트는 근대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이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의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사실상 맑스는 헤겔 철학이 근대적 이성주의, 더 나아가 오늘날 의미의 과학주의를 대변한다고 보고 있다. 흔히 헤겔의 철학과 맑스의 과학이 대비되지만, 맑스에게 헤겔의 보편철학은 과학주의와 표리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에 대한 그의 비판의 요점은 논리적 추상에 의해 사물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화폐가 모든 사물의 차이를 무시하고 개별성을 전도시키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맑스는 헤겔의 논리학을 정신의 화폐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초고』는 근대인식론 전반, 인식과 대상의 일치를 진리로 보는 진리관 자체에 대해서까지 비판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왜 진리의 거처가 두뇌 속에 있느냐는 물음이다. 맑스의 비판의 요점은 헤겔의 철학에선 ‘진정한’ 인간활동은 지식활동이기에 인간의 ‘참모습’이 자기의식으로, 사물은 의식대상으로 상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맑스의 물음은 단순해 보인다. 인간의 사고는 자연적, 지적 유기체인 인간이 현실과 맺는 여러 방식의 활동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왜 ‘참된 것’이 관념인가 하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연과학뿐 아니라 예술, 그리고 실천적 활동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헤겔 철학에선 지식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3) 맑스의 이런 생각은 “근대의 근본과정은 세계를 상(像)으로 정복하는 것”이라 규정하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생각과도 유사하다.4) 근대과학이 낯선 자연을 정복하듯이, 헤겔 철학은 인간주체 앞의 대상세계의 대상성 자체를 낯선 소외로 전제하고 그것을 정신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는 헤겔이 사물을 지식대상으로 삼는 바람에 사물의 온전한 감성이 망각되고 있음을 계속 문제삼는다. 가령, 헤겔의 자연철학은 자연을 지식으로 극복(즉 개념파악)해야 할 낯선 외재성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연의 자기표현성이 망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목적은 추상의 확인이다…… 헤겔에선 자연의 외재성(Äußerlichkeit)이 스스로를 표현하여 빛과 감성적 인간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감성(Sinnlichkeit)으로 이해되선 안된다. 여기서 외재성이란 소외, 잘못, 있어서는 안될 위반의 의미다. 왜냐하면 참된 것(das Wahre)은 관념이기 때문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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