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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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趙京蘭

1969년 서울 출생.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코끼리를 찾아서』 『국자 이야기』 『풍선을 샀어』,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혀』 『복어』 등이 있음.

 

 

 

성냥의 시대

 

 

그가 J읍으로 돌아온 것은 삼년 만이었다. 떠날 때와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나무를 만지게 된 건 다른 이유였지만 그 이유를 금방 알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손바닥에 마주 대고 있는 나무피는 이태리 포플러였다. 롤러에 넣고 돌린 나무는 매끄럽지도 까슬거리지도 않았다. 손바닥을 대고 있자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미했다 점차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원래 은빛을 띤 나무는 껍질을 벗기면 미색에 가까워진다. 그런 미색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는 두루마리처럼 얇게 만들어낸 나무피 한장을 앞에 두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긴 때가 있지만 이제 그것은 버릇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는 겉껍질이 벗겨진 나무에 대해 계속 생각하려고 했다. 적절한 말은 적절할 때 떠오르지 않았다. 집중하기도 어려워졌다. 지금 누가 자신을 본다면 기도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무는 바닥에 기왓장처럼 쌓여 있었다. 절단기 속으로 나무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비는 내리고 스위치를 다 올려도 공장 안은 크게 밝아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마지막에 관해 말해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궁금하긴 하냐.

최사장은 물었다. 셔츠 주머니 속에서 성냥갑을 꺼냈다. 성냥개비 하나를 마찰판에 대고 슬쩍 밀었다. 불꽃이 피었다. 최사장의 얼굴이 일순 환한 주황색으로 빛났다. 누구든 성냥을 하나 켜고 있을 때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짧은 순간이다.

아저씨.

사장이라고 불러라.

틈을 주지 않아도 좋았다. 아버지의 마지막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최사장이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상사인. 언젠가 아버지는 자신이 최사장을 처음 좋아하게 된 게 귀 때문이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최사장의 귀는 큰 데다가 당나귀 귀처럼 앞쪽으로 쏠려 있다. 그 모양을 보고 있자면 어떤 이야기도 다 들어주고 끄덕이듯 귀를 살짝 움직여 그 이야기를 영원히 덮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런 사람 밑에 들어가 일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채 스무살이 되기 전의 아버지는. 그 말을 하는 아버지는 예의 그 모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최사장의 귀 안쪽에서 흰털이 삐져나와 보였다. 아버지의 귀는 어땠는지, 담배를 쥔 아버지 손가락은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고 그것은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아버지와 통화를 한 것은 부음을 듣기 한달 전이었다. 어쩌면 한계절 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언제나 자신할 수 없었다. 한밤중이었고 그는 다리 사이에 이불을 끼고 누워 있다가 벨소리 때문에 급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떠냐.

아버지가 물었다.

좋아요, 다 좋아요.

그는 말했다. 목청을 높였을 수도 있다. 귀가 어두운 아버지보다 더. 뭐든지 다 좋다고 생각하는 게 최선이라고 여기던 때였다. 아버지가 전화를 해온 시기는 좋지 않았다. 전화는 언제나 그럴 때만 오긴 했다.

다 좋다고? 그래, 그래.

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일까.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물건을 배달하러 다니는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날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필요한 물건을 전해주는 일이 얼마나 보람있는지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다. 먼저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그렇듯 아버지도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 자신이 필요한 말을 하고 싶어했다.

나도 늙었다.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소리가 너무 컸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한 전화 같았다. 그래도 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는 그 속엣말을 들었을지 모른다. 부음을 들었을 때 맨 먼저 그 생각이 스쳤다. 아버지의 부음은 자, 이래도 안 내려올 거냐?라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건 한달이나 한계절 뒤의 일이다. 그 마지막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자신이 물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필요한’이 아니라 ‘기다리는’이라고 말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날은 정말 괜찮은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한 후회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발견된 장소는 목재를 쌓아놓는 공장 뒷마당이었다고 한다. 정문 쪽에서 보자면 자물쇠가 달린 낮은 철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공터였다. 형식적인 문이기는 했지만 공터는 동네 골목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태리 포플러에 관심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단속을 하지 않아도 쌓아놓은 목재가 없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한때 J읍을 대표하다시피 했던 성냥공장이 언제 문을 닫을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최사장은 일년에 한번씩 사만에서 오만 사이(才, さい) 분량의 나무를 사들이곤 했다. 한 사이를 열두 자라고 치면 대충 셈해도 열 트럭 분량이 넘는다. 사들이는 나무의 양이 해마다 줄어들기는 했다.

공장 사람이라면 뒷마당에서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 모르고 자식은 부모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한 관계라고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른이 된 것을 느꼈고 기다렸다는 듯 집을 떠났다. 부모라고 해봐야 처음부터 아버지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나 베어진 포플러들이 쌓여 있는 공장 뒷마당의 아버지에 관해서라면, 조금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아버지에 관해 알고 있는 전부일지도 몰랐기 때문에 잊을 수도 없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있으면 아버지는 성냥통을 들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고민거리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묶어놓은 목재 더미에 앉아 하나씩 하나씩 성냥을 켜곤 했다. 고민 한가지를 성냥 하나가 켜졌다 꺼지는 순간만큼, 결정할 일도 성냥 하나가 켜졌다 꺼지는 찰나만큼만 생각했다 결정짓는 게 아버지 버릇이었다. 저물녘,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신성한 의식처럼 보였다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하는 등의 표현을 쓸 수 있다면 좋았을까. 그러나 말없이, 혼자, 목재에 걸터앉아 골똘히 성냥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은 J읍에서 가장 멍청하고 바보 같아 보였다. 뭐든 너무 오래 생각하면 병든다고 아버지는 말했지만 때로는 앉은자리에서 성냥 한통을 다 써버릴 때도 있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점심시간이었고 아버지는 도시락을 꺼내놓는 동료들 사이를 지나 뒷마당으로 나가는 철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 때문에 모두들 그런 줄 알았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도, 그 한참 후에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목재 더미에 가슴팍을 댄 채 쓰러져 있었다. 오른 발치에 떨어져 있던 성냥통은 대략 650개쯤의 성냥개비가 들어 있는 제품이었다. 사각 성냥통엔 두 면에만 적린(赤燐)을 바른다. 나머지 두 면에는 아버지가 매달 골라 새기는 그 달의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 ‘인간은 오직 노동에 의해서만 세상을 편안히 지낼 수 있다.’ 아우어바흐라는 사람의 말이었다. 그다음 문구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편안을 누릴 수 없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말이었다. 아버지는 일부러 목재 더미 위에 엎드려 잠이라도 자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잎이 다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벌목한 가을 나무들이었다. 속이 비어 있는 나무. 이태리 포플러는 잎이 나 있을 땐 힘이 없어 쓰지 못한다. 불이 가장 잘 붙을 때도 가을 나무일 때다. 아버지는 한손에 성냥통을 들고 있었을 거였고 적린이 없어도 서로 부딪치면 마찰을 일으켜 불을 낼 수 있는 게 성냥개비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죽음이었다. 불이 나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공장 사람들은 그런 말로 아버지의 죽음을 지나쳐가고 싶어했다. 불이 안 난 건 천만다행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여길 게 틀림없었다. 불을 만들어야 하는 공장은 그 자체가 언제나 화재 위험을 안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쨌거나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아버지 말이 맞을 때도 있었다. 뭐든 한가지를 너무 오래 생각하면 힘들어진다. 정말 그렇다. 아버지의 죽음을 마무리짓고 싶어하느라 그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만약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일들이 650개나 되는 성냥을 다 그어대야 할 만큼 있었다면 심장이 마비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하천이 많은 곳이었다. 둘러싼 산맥들 때문에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았다. 여름에 가장 덥고 겨울에 가장 추운 데였다. 흐린 날과 강수량이 적어 사과나 자두 재배에 적합했다. 겨울은 말할 수 없이 길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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