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식민주의와 근대의 특권화를 넘어서

황종연의 반론에 답하며

 

 

김흥규 金興圭

고려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문학과 역사적 인간』 『한국 고전문학과 비평의 성찰』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등이 있음.

gardener@korea.ac.kr

 

 

1. 머리말

 

나는 2008년 가을부터 2010년까지 세편의 논쟁적인 글을 발표했다. 한국 민족주의와 근대문학 성립에 관련하여 1990년대 후반 이래 주목받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탈민족주의적 성향의, 그리고 개인차가 있는 대로 다분히 포스트모던하기도 한 담론들 중 일부가 그 대상이었다.1)

이들을 쓰기 얼마전부터 근래의 수년간 나 자신이 반성적으로 정리한 학문적 입장은 1970, 80년대의 한국사/한국문학 연구를 주도해온 내재적 발전론과 민족 단위의 인식구도에 치우친 시각이 그 나름의 공헌과 함께 문제점 또한 산출했으며, 이를 겨냥한 90년대 후반 이래의 비판은 큰 줄거리에서 경청할 만한 재정향의 필요를 일깨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서도 새로운 동향에 대해 내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들에게서 양해할 만한 수준을 넘는 ‘과도교정(過度矯正)’이 종종 발생하고, 근년에는 그것이 관성화되는 추이마저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쪽으로 굽은 것을 펴고자 반대쪽으로 지나치게 당겨서 새로운 기형을 만드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의도한 바가 그렇기에 내 글들에 대해 반론이 나온다면 토론을 통해 우리의 시야를 좀더 풍부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없지 않았다. 하지만 황종연(黃鍾淵)이 응답으로 내놓은 「문제는 역시 근대다」(『문학동네』 2011년 봄호)2)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황종연은 이 글에서 여러 개별 사항들에 대한 변명과 궤변적 수준의 반박에 골몰할 뿐, 논의의 거시적 구도에 대해서는 별로 진전된 견해를 내놓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나의 문제제기를 “70, 80년대 한국학계에 식민주의 사관과의 싸움 속에서 형성된 낡은 비판모델의 지루한 연명(延命)”으로 몰아붙이고(「문제는」 447면), ‘폐쇄적 내발론 대 트랜스내셔널한 개방적 시야’라는 90년대적 틀짓기에 의지하여 자기를 방어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하고 이미 발표된 세편의 글마다 서두에 밝혔듯이 내 입론의 출발점은 민족주의적・내발론적 사고모델의 실효(失效)를 기정사실화한 위에서 우리의 탐구가 어떻게 하면 시공간적 경계의 앞뒤와 안팎 중 일부를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균형된 역사 이해에 접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나는 신기욱(申起旭), 헨리 임, 황종연, 윤선태(尹善泰), 김철(金哲) 등의 문제 저작들이 근대와 식민적 타자에 과도한 비중을 부여하는 한편 전근대로부터 이월된 기억・유산과 피식민자들의 작인(作因, agency)은 소홀히하는 ‘과도교정’의 편향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황종연은 이를 반박할 만한 배려의 균형을 입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신라론이 “식민지시대 조선어 텍스트에 표상된 신라를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접촉하는 지식의 경계 위에 놓고 보려는 시도”(「문제는」 435면)였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그런 의도가 실천된 것처럼 자처한다.

 

나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 신라라는 관념을 포함한, 현재 한국인 일반의 신라관에 영향을 미친 관념과 이미지의 중요한 일부(강조는 인용자)가 근대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학과 고고학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설 중 하나로 삼아 (…) 연구를 수행했다.(「문제는」 425면)

 

하지만 위의 인용에 보이는 “중요한 일부”라는 표현은 ‘식민주의의 특권화’라는 비판을 받고 나서 뒤늦게 착용한 수사적 안전벨트의 혐의가 짙다. ‘중요한 일부’란 ‘무시할 수 없는 여타 부분들’을 전제하는 표현인데, 그의 논문 「신라의 발견」은 이와 달리 일본 식민주의가 만들어낸 신라 표상의 압도적 작용력을 주장하는 데 몰두했다. ‘근대 한국의 민족적 상상물의 식민지적 기원’이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그가 조명한 ‘경계’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 나름의 지적 자원과 담론 기동력이 희박한 2차적 주체처럼 간주된다. 그런 가운데서 거론된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그 영향력이 불확실한 “한 망명지식인”으로 주변화되고, 문일평(文一平, 1888~1936)은 식민사학의 담론을 재가공해서 유통시킨 부가사업자처럼 예시되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경계 위에 놓고’ 어느 한쪽을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입체적으로 보아야 할 당위성이 원론적으로나마 시인된 것은 의미있는 진전일 듯하다. 본고는 이 진전을 실질화하는 데 긴요한 논점들의 시비를 좀더 가려보고자 한다. 다만 황종연의 반론에서 언급된 사항들은 일일이 재론하기란 불필요하게 번거로운 일이므로, 이하의 본론에서는 ‘신라통일론’ ‘민족주의 생성의 조건’ ‘민족주의 대두와 전근대의 유산’ 문제를 상호연관된 소주제로 삼아 주요 쟁점을 살피고 좀더 확장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4)

 

 

2. 신라통일과 민족주의 담론

 

황종연은 그의 동료 윤선태와 생각을 같이하면서 “신라가 조선반도의 영토 지배라는 점에서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위상을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일본인 동양사가들의 연구에서였다”고 주장하고, 그 선구자로 하야시 타이스께(林泰輔, 1854~1922)를 들었다.5)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이 7세기말 이래의 금석문에서부터 18세기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신라통일도(新羅統一圖)」까지 다수의 증거를 제시하며 신라의 삼국(삼한)통일이라는 관념이 이미 오랜 내력을 가진 것임을 밝히자, 윤선태는 자신의 주장을 축소 조정했다. 그 요지는 ‘당(唐)이 요동으로 퇴각한 시점(676)에 신라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하야시에게서 처음 나왔으며, 신라통일 시점에 관한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통설은 바로 이것을 수용한 결과’라는 것이다.6) 황종연은 문일평이 신라통일의 요인으로 인화(人和)를 강조한 것이 하야시의 『초오센시』(朝鮮史, 1892)를 참조한 것처럼 보이게 썼다가 하야시가 『동국통감(東國通鑑)(1484) 등의 사론(史論)을 짜깁기했을 뿐이라는 점이 지적되자(「신라통일」 390~92면), 이들의 연결고리로 자신이 주목한 바는 통일 시점 문제였다고 했다. 즉 문일평이 “하야시 타이스께와 같은 방식으로 신라의 통일을 설명”했다는 것은 하야시가 1912년에 낸 『초오센쭈우시』(朝鮮通史)에서 당 세력의 철수를 통일 시점으로 본 것과 문일평의 견해가 상통함을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