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장르의 표면장력 위로 질주하는 소설들
강지희 姜知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되기’」가 있음.
iskyyou@hanmail.net
1. 회의를 회의하는 소설들
최근 일련의 작가들은 그간 소위 ‘B급’ 또는 ‘장르문학’이라 얘기되던 외부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호기심과 경계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이미 소설은 영화나 게임 같은 대중문화나 정크(junk) 같은 하위문화적 요소를 차용해왔다. 그러나 그간의 소설들이 하위문화에서 기호나 이미지 같은 표층을 부분적으로 빌려와 비트는 데 치중했다면, 최근 소설들은 오히려 장르문학이라는 틀 안에 스스로를 기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 소설이 잡종적 장르임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혼합되며 몸을 부풀려나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지만,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분리되어 있던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적극적인 만남은 분명 이 시대 새로운 경향임이 틀림없다.
SF(Science fiction) 진영에서 먼저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최근 순수문학 잡지들에 적극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배명훈(裵明勳)뿐 아니라, 탐정소설이나 공포소설의 문법을 상기시키는 이장욱(李章旭)과 최제훈의 몇몇 소설이 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우주 출신의 주인공이 외계 함대와 우주전쟁을 벌인다거나, 산장에 고립된 인물들이 알 수 없는 살인마에게 하나씩 살해당하는 상황 등은 SF나 탐정소설에서는 이미 일종의 끌리셰(cliché)가 되었으나 기존 한국문학에서는 다소 낯설고 당혹스러운 설정이다. 여기에는 주인공이 우주를 택하기까지 지구에서 루저로서 얼마나 지난한 생을 살아야 했는가에 대한 설명도, 살인자의 고뇌도, 살해된 이들에 대한 애도도 없다. 그래서 때때로 등장인물들은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끌롭스끼(V. Shklovsky)가 말했던 것처럼 게임의 장기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건의 잔혹성과 개체의 개별적인 고통보다는 서사가 진행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펙터클이나 스릴감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장르의 문법이 원심력을 구성하고 있는 이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꼬기또(cogito)에 대한 부정의식을 구심력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계속되는 ‘존재한다. 존재한다. 존재한다……’ 사이에 예측된 실수가 끼어들었다. 빈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칸이었다. 그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원이 계속 공급되는데도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존재는 외부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그 공백을 대신 채워줄 착각을 구하지 못했다.
—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안녕, 인공존재!』, 북하우스 2010, 132면
네가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봐! 해보라구! 아니면 미친 듯이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 그러면 생각하는 넌 남을 거 아냐!
—이장욱 「동경소년」, 『고백의 제왕』, 창비 2010, 36면
“하루도 처음엔 믿기 힘들었어. 그렇게 생생했던 현실이 모두 자신의 환각이 만들어낸 연극무대였다니. 반면 전혀 기억에도 없는 폐광이니 매몰이니 하는 것들이 자신이 겪은 현실이었다니. 혼란스러웠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걸 의심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의심하는 나 자신까지도 의심해야 했으니까.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유령이 된 기분이었지.”
—최제훈 「π」,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266면
위 인용문들에서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까르뜨의 꼬기또 명제를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데까르뜨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회의가 절정에 이른 끝에 의심할 수 없는 ‘사유하는 자아’의 확실성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소설들에서 존재는 회의나 사유로써 뚜렷해지고 구원되는 대신 오히려 희미해지며 불확실한 지점으로 내던져진다. 「안녕, 인공존재!」에서 ‘조약’이라는 제품의 존재가 증명되는 때는 역설적이게도 제품이 자신에 대해 사고하기를 멈춘 순간이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완전히 망각된 순간이다. 「동경소년」에서도 ‘나’는 안간힘을 다해서 유끼를 생각하고 유끼에게도 생각함으로써 존재하기를 강요하지만 그럼에도 유끼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π」의 화자 역시 자신에 대한 사유를 통해 현실과 환각을 구별해낼 수가 없으며 되레 무한히 현실을 재창조할 뿐이다. 이들은 인간의 인식으로 파악 불가능한 지점, 사고하고 행위할수록 모든 상황이 불확실해지고 악화되는 악몽 같은 지점과 마주하고 있다. 이제 소설들은 폐쇄회로에 갇힌 채, 회의로 시작된 모더니즘을 회의하기 시작한다.
이런 부정의식과 장르문학적 문법이 만나면서 근래 소설들에서 증발된 듯 보였던 서사성이 다시 살아나는 중이다. 우주전쟁이 벌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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