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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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殷熙耕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등이 있음. silverpaperbox@gmail.com

 

 

 장편연재 2

태연한 인생

 

 

제2부 그들 각자의 극장

 

 

1. 고통과 고독의 세계

 

류는 부모가 유학한 나라의 시민권자로 태어났다. 류가 자란 도시에서는 일년의 절반 동안 비가 내렸다. 우기를 알리는 차가운 빗방울과 함께 가을이 시작되면 비는 겨울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름이 끝나갈 때 사람들은 뒷마당에 있던 피크닉 테이블과 해먹을 차고로 집어넣었다. 잔디깎이와 자전거와 낚싯대도 함께 차고 구석으로 들어갔고 굳게 닫힌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졌다. 비는 온종일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길고 지루한 시간을 예고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린 채 느릿느릿 걸어 지나갈 뿐 거리는 텅 비기 시작했다. 점점 일조량이 부족해졌고 우울증 환자가 병원 대기실을 채웠다. 따뜻한 곳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이 내버려둔 빈집에 홈리스들이 숨어들어 어둠속에서 겨울을 났다는 신문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도시는 그 시기에 전국에서 가장 높은 독서율과 자살률을 기록했다. 모든 일이 봄이 온 뒤로 미뤄진 탓에 삶은 무력했고 그것은 도시 전체를 웅크린 회색 동굴처럼 음울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비가 그쳤다. 동물원 앞 언덕길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서 저 멀리 이루 말할 수 없는 푸른빛의 바다에 금화살 같은 햇살이 가득 고이는 날이 왔고 모두가 일제히 반바지 차림에 썬크림을 바르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것은 어둑어둑한 실내에서 그칠 줄 모르는 비를 바라보며 긴 겨울을 지내본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시린 찬란이었다.

그 도시의 봄은 크레파스의 색깔 같았다. 마치 난생처음 크레파스를 선물받은 아이가 상자에서 이것저것 아무거나 꺼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물에 아낌없이 색칠을 해놓은 것 같았다. 숲과 잔디와 바다와 꽃과 하늘과 산과 호수가 맨 처음 이름 붙여진 그대로의 초록과 연두와 노랑과 파랑과 하늘색으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푸르름 속을 한차례의 핑크빛 벚꽃 축제가 흔들고 지나간 뒤에는 호수에 뜬 요트의 흰 돛과 언덕 위를 달리는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이 하루 종일 햇빛을 튕겨냈다.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는 마치 거대한 아이스크림이 스쿠프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대로 허공에서 얼어붙은 모양으로 도시의 짙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뒷마당의 잔디밭에는 다시 파라솔이 펼쳐지고 고양이를 약올리기에 바쁜 다람쥐가 삼나무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튤립과 수선화가 피고 스프링클러가 하늘 높이 물줄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런 눈부신 봄날 중 어느 하루 류의 가족도 분주하게 피크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 류는 주방에서 짐을 꾸리는 어머니를 도와 심부름을 했다. 어머니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큰 아이스박스에 바비큐용 고기와 쌜러드 야채와 안주거리 들이 든 밀폐통을 넣으면서 류에게는 작은 아이스박스를 챙기게 했다. 거기에는 캔맥주와 음료수와 과일이 채워졌다. 후식으로 구워먹을 감자와 옥수수와 마시멜로우와 칩 봉지는 따로 비닐백에 챙겨져 있었다. 수영복과 세면도구가 든 옷가방은 이미 캠핑 도구와 함께 아버지가 차에 실어놓았다.

류의 가족은 일주일간 야영을 하며 해안도로를 따라 서쪽 바다를 일주할 계획이었다. 이웃의 세 가족이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지난겨울 카드놀이를 하면서 이 여행을 생각해낸 아버지의 제안에 따라 그날 카드놀이의 판돈은 세 가족이 함께 여행할 수 있는 밴을 렌트하는 데 쓰였다. 류의 가족을 빼고 다른 두 집에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12인승이면 충분했다.

드라이브웨이에 세워진 밴 주변에는 이미 반바지와 쌘들 차림의 이웃 아저씨들이 모여 서서 들뜬 목소리로 여행지와 날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류의 아버지는 말은 많지 않았지만 웃음소리만은 거기 있는 누구보다 컸다.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류는 드라이브웨이를 향해 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도 좋고 피크닉도 캠핑도 다 좋았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와 일주일 동안이나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류가 한번 더 들뜬 표정으로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어머니는 더이상 도울 게 없으니 아버지에게 가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류는 어머니 곁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작년에 학교에 들어간 류는 주방에서 어머니를 돕는 것이 더 어른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집 안으로 들어와 주방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웃집 아줌마들이 도착해서 짐을 싣고 있다며 구석에 챙겨놓은 아이스박스와 가방을 들었다. 작은 아이스박스까지 한꺼번에 옆구리에 끼려고 하자 어머니는 자신이 들 테니 두고 가라고 말했다.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짐을 들고 나가면서 아버지는 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얼굴 그대로 어머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어머니는 아버지 뒤쪽에 조금 열려 있던 현관문으로 다가가 그것을 활짝 열어젖혔다.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었지만 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문단속을 한 다음 식탁 의자에 걸려 있던 류의 피크닉 모자를 건네주고 욕실에 들어가 손을 씻고 거울을 보는 것으로 어머니의 출발 준비는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현관에서 실내화를 쌘들로 갈아신던 어머니는 잠깐 동작을 멈추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인 챙기는 걸 잊었던 것이다. 류는 이미 현관문 밖으로 한걸음 나가 있었다. 어머니는 류에게 차에 먼저 가 있으라고 말한 뒤 쌘들을 신은 채 지하계단으로 통하는 복도로 몸을 돌렸다. 류는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밴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세 집의 짐을 모두 실은 아저씨들이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밴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은 뒤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가 가볍게 경적을 울렸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아저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 일이야말로 자기 몫이라고 생각한 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열려 있던 차문으로 나오자마자 드라이브웨이의 자갈을 밟으며 집을 향해 달려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부산했던 기운과 여행 짐이 모두 빠져나가 어쩐지 텅 비어 보이는 실내가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뭔지 모를 서늘한 정적이 류의 몸을 감쌌다.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류의 발밑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실내화가 밟혔다. 한쪽 무릎이 현관에 내놓여 있던 와인 박스를 건드렸는지 병 주둥이가 가볍게 쨍강 소리를 냈다.

어머니는 주방 벽에 붙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거친 말을 하고 있는 게 막연히 느껴졌다. 어머니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었고 집 안으로 들어온 류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 같았으므로 류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어머니가 조용히 전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을 때까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식탁 의자에 앉는 어머니의 씰루엣이 보였다. 어머니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쪽 손은 마치 조의를 표하듯 왼쪽 가슴 위에 사선으로 올려놓은 채였다. 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 금방이라도 오줌을 쌀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불현듯 류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류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의자에서 일어났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류의 곁을 지나쳐 천천히 와인 박스 쪽으로 걸어가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그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막 차 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 류와 어머니가 차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이웃들이 한마디씩 쾌활하게 인사를 던졌다. 모두 여행을 앞두고 들떠 있었다. 누군가 멋진 써니 데이이니 어머니가 꾸물거린 것쯤 용서해주겠다며 농담을 던졌고 그런 싱거운 말 한마디만으로도 차 안에는 한바탕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트렁크에 와인 박스를 실어놓고 뒤에 들어온 아버지가 피크닉 준비를 온통 떠맡았다는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꾸물거린다가 되느냐고 싱거운 농담을 거들었다. 어머니는 차 안의 모두처럼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여름 내내 써니 데이가 계속될 테니 자신을 용서해줄 날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대꾸하기도 했다. 그러나 옆에 앉은 아버지가 안전띠를 매주기 위해 어머니 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 류는 보았다. 아버지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은 백화점 쇼윈도우의 디스플레이 인형에 박힌 유리 눈알처럼 차가웠다. 철컥 소리와 함께 버클이 채워진 뒤 아버지는 고개를 들었고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차 안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나왔기 때문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오른쪽 손은 아까부터 왼쪽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안전띠를 붙잡는 것처럼 보였지만 손가락 끝이 마치 골절된 뼈를 누르듯 구부러져 있었다. 그 여행에 대한 류의 기억은 그것이 거의 전부였다.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며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이상할 만큼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기억에 남을 만큼 즐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은 여행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여행 내내 자연스럽지 않거나 특별한 사건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날 어머니가 받은 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류는 훗날 그 전화를 건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어 알게 되었다. 흔하디흔한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일주일간 만날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떠나기 전날 밤 당시의 애인을 만났고 가족여행이란 말에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가 어머니에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며 여행을 훼방하려 했던 것이다. 자신의 가정이 있었던 그 여자는 결혼을 깨려는 의도까지는 없었다. 여행을 망치는 작은 수확만으로도 무례한 침입을 행사할 만큼 급하고 천박한 여자였고 자신이 남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악의의 권력적 측면에 도취해 있었다. 자신이 품은 악의가 아니면 절대로 남에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종류의 여자였다. 부동산 중개인이었던 여자가 매물로 내놓은 류의 집을 둘러보러 왔을 때 어머니는 외출중이었다. 류는 하이스쿨 동급생의 엄마이기도 한 그 여자를 형식적으로 집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식탁에 앉아 류가 내온 차를 마시며 십여년 전 봄날 여행을 환기시킨 것은 어이없게도 한때 류의 가족 중 한 사람과 연인이었다는 것을 친분관계로 암시하여 부동산 거래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속셈에서였다. 그 여자의 십여년 전 애인이 누구였으며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때 부모는 이혼해 있었고 열여덟살인 류는 이미 아버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의 말을 듣자 류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그 봄날 지금 여자가 앉은 것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어머니의 씰루엣이었다.

어머니는 함께 여행을 떠나기 직전 남편의 부정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 남편 곁에서 꼼짝없이 일주일을 보내야 했다. 차 안에서 여행지에서 그리고 텐트 안에서. 그 여행은 부부들끼리의 휴가였다. 이웃 부부들이 그렇듯 커플 게임에서 아버지와 한팀이 되어 호흡을 맞춰야 하고 옆에 붙어앉아서 술잔을 부딪쳐야 하고 아버지가 운전을 맡을 때는 조수석에 앉아 지도를 펼치고 의견을 나눠가며 함께 길을 찾아야 했다. 그 여행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부정과의 여행이었으며 그것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어머니의 눈앞에서 끊임없이 존재를 증명하도록 각본이 짜여진 셈이었다. 전화를 끊고 어머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행들은 한껏 들뜬 경적소리로 출발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머니는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이 맡은 배역의 감정을 잡은 다음 천천히 무대로 걸어나갔다.

 

고통의 서사

어머니의 결혼생활에서 류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점이었다. 어머니는 그 봄날의 피크닉처럼 많은 순간 자신을 배우로 바꿔서 고통 속을 통과해나가려 했다. 진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것을 밝히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어떤 변명도 요구하지 않았다. 거의 혼자 힘으로 지켜나가던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힘은 어머니 편이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여 아버지라는 가장을 각성하게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류에게 아버지를 비난하는 일도 없었으므로 류와 아버지 관계의 독자성은 지켜졌다. 류의 집에는 사소한 일상의 갈등과 반목은 있었지만 격렬한 다툼 후에야 도래하는 화해와 용서의 감동적이고 뜨거운 서사 같은 것은 없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어머니는 그 여자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묻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라고 무시해버렸나? 그러기에는 그 소식은 전혀 터무니없지가 않았다. 아버지를 사랑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뜨겁게 반응해야 했다. 만약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고 또 믿지도 않게 되었다면 왜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것도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는 어머니의 합리적이고 깔끔한 성격과 맞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책임감이나 헌신, 도덕적 우월감, 자존심이나 위악, 사회적 평판 그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었다. 그런 소모적 감정이나 공허한 명분 때문에 고통을 참아내면서 인생을 낭비할 만큼 어머니는 어리석지도 무능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어머니가 믿지 않게 된 것은 아버지뿐 아니라 아버지를 포함한 타자로서의 모든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이사를 가든 어차피 같은 세계였고 천국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아버지 방에는 책과 음반이 많았다. 그 취미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요구했다. 집에 있는 동안에 아버지는 자기의 공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 있곤 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도 좋아했다. 취향이 맞는 흥미로운 새 친구를 만나 흥분하곤 했지만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별로 없었다. 새 친구들과 만나고 작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취미를 발견하고 새로운 물건을 사들이고 새로운 기능에 심취했지만 그것들 모두는 이내 새롭지 않게 되었다. 그런 라이프스타일과 교제 패턴에는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그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가계의 많은 부분을 어머니가 맡고 있어 조건이 좋은 편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조건이 나쁠 때는 나쁜 대로 그 안에서 다른 방식과 규모로 자기의 세계를 만들었다. 때로 그 세계엔 어머니와 공유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황당함과 치졸, 뻔뻔스러움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그것을 어머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아무런 주저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간혹 불편하거나 난처해 보이긴 했지만 고통스러워 보인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집에서도 늘 바빴다. 공부를 하거나 식탁을 차리거나 옷장을 정리하거나 파티를 준비하거나 류의 숙제를 도와주거나 세차를 하거나 마당의 민들레를 뽑거나 수표책을 주문하거나 학생들의 과제물에 점수를 매기거나 이웃에게 차를 대접하거나 각종 고지서를 처리하거나, 언제나 동시에 두가지 이상의 일을 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불현듯 그 모든 걸 덮어버리고 차에 시동을 걸어 극장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류를 혼자 집에 남겨두어야 할 상황에는 옆자리에 태우고 함께 나갔다.

극장에서 어머니는 스크린에 몰두했다.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다음 상영시각을 기다려 두번씩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극장에 도착해서 무엇이든 가장 빨리 상영되는 영화를 택하는데도 그런 태도는 언제나 똑같았다. 어두운 극장에 들어가 의자에 앉는 순간 침묵이 지나쳐 숨소리까지 죽였으며 옆에 앉은 류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류는 잠들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어머니는 왼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작은 기척이 잠든 류를 깨우곤 했다. 류는 지루했지만 어머니가 바빠 보이지 않는 게 왠지 좋았으므로 투정하지 않았다. 때로 류가 잠들지 않고 끝까지 볼 수 있는 영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까지도 한장면이라도 놓칠세라 눈을 떼지 않았다. 류와 달리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류는 어른들이 어린애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언젠가 류는 유난히 재미없는 영화를 만나 첫 장면이 시작되자마자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중간쯤 깼는데 그 이후로 다시 잠들지 못해 어머니와 함께 영화 후반부를 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어머니가 손목시계를 보려고 팔을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류는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크린에서 반사되는 빛이 시곗바늘과 어머니의 얼굴을 동시에 비췄다. 어머니의 얼굴은 영화에 몰두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무표정했고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류의 시선이 불현듯 어머니의 오른팔에서 멈춰졌다. 그것은 어머니의 왼쪽 가슴 위에 사선으로 얹혀 있었는데 손끝이 쇄골 근처를 파고들듯 구부려진 채 무엇인가를 꾹 누르고 있었다.

류는 어머니의 방문을 불쑥 열었을 때 어머니가 그런 자세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는 것을 몇번 본 적이 있었다. 요리를 하다가 갑자기 씽크 모서리에 기대서서, 그리고 류를 태우고 운전을 하던 중에 차를 길 한쪽에 세우고 그렇게 잠시 앉아 있는 것도 보았다. 특히 언젠가 저녁 공원을 산책하면서는 몇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는 것이었다. 다친 게 아닌지 류가 물었을 때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래전 다친 곳이 갑자기 아플 때가 있어. 괜찮아. 소독을 하면 돼, 류. 차갑고 따갑지만 소독을 하면 병균이 잠든단다. 병균은 깨우면 안되니까 가만히 있는 것뿐이야. 류가 어린애다운 과격함과 정의감에 차서 병균을 죽여버리라고 주장했고 어머니는 병이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어두운 극장의 구석자리에 앉아 어머니가 보고 있었던 것은 영화가 아니라 스크린일 뿐이었다. 영사기가 돌며 보여주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이었고 그동안 어머니의 왼쪽 가슴 아래에서는 자기 삶에서 고통을 추출하는 원심분리기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때로 영화상영 1회분의 시간을 더 설정해야 했지만 매번 어머니는 영화가 끝난 뒤 고통이라는 침전물이 담긴 자신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환한 극장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제 몫의 인생 속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 침전물이 고통이 아니라 고독이었다는 걸 류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가난한 유학생이 외국인의 입주가정부가 되어서 창밖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어떤 여름 오후. 스러지는 햇빛 아래 나무의 긴 그림자가 자신의 인생의 퇴락처럼 힘겹게 빛과 모양을 유지하려 애쓰며 바래가던 날, 어머니는 자기 앞에 다가와 있는 상실의 세계를 보아버렸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틀을 지켜야 하고 동의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에 따라야 한다.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상실은 고통의 형태로 왔다가 고독의 방식으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어두운 극장의 의자에 앉아 모든 것이 흘러가고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고통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전될 것이었다. 하지만 원심분리기 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추출되고 있는 부유물은 고통으로 보이는 고독이었다. 그 봄날의 피크닉처럼 그것들은 오랜 우기 끝에 찾아온 찬란 뒤에 그 불길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고독, 불연속선

조의를 표하는 듯한 어머니의 그 몸짓이 다시 떠오른 것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직장에서 첫번째 여름휴가를 받아 유럽으로 떠나던 비행기 안에서였다. 여행의 일정은 모두 K가 짠 것이었다. K와는 대학 졸업반 때 만나 3년을 사귀어온 사이지만 서로의 일이 바빠서 휴가를 함께 떠나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비행기 옆좌석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게 오랜 시간 류를 자기 곁에 묶어놓을 수 있겠느냐며 되도록 비행시간이 긴 나라를 택했다고 농담을 했다. 떠나기 전날 밤에 그들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류의 스튜디오에서였다. 친구들이 허니문 예행연습이라고 놀리며 차례로 술을 권하는 바람에 류는 다른 날보다 훨씬 많이 마셨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업무를 다 처리하느라고 몹시 지쳐 있어 금방 취한 것이기도 했다. 몸이 아래로 처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속이 메스껍다는 느낌 속에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멀어지면서 한순간 기억이 끊기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스튜디오 안은 난장판이었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으며 비행기 출발시각은 두시간 뒤였다. 욕실과 옷장과 신발장을 뛰어다니며 눈에 띄는 대로 아무거나 급히 가방에 쑤셔넣고 택시를 잡아탄 류보다도 K는 더 늦게 도착했다. 류보다 더 서둘러야 했던지 머리카락은 마구 엉켜 있고 잠이 깨지 않은 듯 어리둥절한 표정에 옷도 어제 입은 그대로였다. 24시간 할인마트에서 급히 사기라도 한 것처럼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있었지만 다행히 여행가방만은 무사히 손에 들려 있었다. 류는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있었다.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억나지 않는 악몽 탓이었다. 몹시 고통스럽고 불길하고 두려운 꿈이었다.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꿈이 불러일으킨 감정들은 고스란히 남아 류를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회사일 때문이었을까. 오랜만의 여행이라 설레기도 했지만 한편에는 낯선 상황에 대한 긴장도 있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 온갖 상상을 하던 어린시절처럼. 아니면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가벼운 말다툼이 있었는데 기억을 못해서, 그래서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걸까. 류는 옆에서 걷고 있는 K에게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K가 팔에 힘을 주어 류의 손을 겨드랑이 가까이 끌어가며 웃음 띤 얼굴로 류를 바라보았으므로 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숙취와 무거운 다리를 끌고 나란히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했다.

류는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자리에 앉으니 두통도 알 수 없는 불안도 약간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슬리퍼로 갈아신고 등을 기대고 앉아 책을 읽고 중간중간 기내식을 먹고 잠을 자고 쉬기만 하면 되었다. 무엇보다 곁에는 K가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사소한 일까지도 즐겁고 편안할 것이며 무슨 사고가 일어난다 해도 남들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이었다. 어린시절엔 비행기에 나쁜 사람이 타서 그 사람을 벌주기 위해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류 자신처럼 나쁜 사람이 세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는 않기를 바랐던 사춘기 이후 비행기 사고에 대한 불길한 생각은 떠올리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K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류의 시선은 선반에 가방을 올리고 있는 그의 가슴께에 머물렀다. 재킷이 벌어져 안에 입은 셔츠의 주머니가 드러났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귀고리가 분명했다. 순간 류는 자기가 어떤 악몽을 꾸었는지 생각났다. 류는 자기의 스튜디오에서 잠들어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한번 눈이 떠졌는데 그때 아마 악몽이 시작되었던 것 같았다. 주변은 온통 어두웠다. 술병과 접시가 어지럽게 놓인 탁자 근처에만 희미한 빛이 키스하는 남녀를 비추고 있었다. 여자는 류의 대학 동기였고 남자는 등을 돌리고 있어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푸른 줄이 들어간 얇은 여름 셔츠가 눈에 익었다. 여자의 귀고리 한짝이 벗겨져 어깨 위로 떨어지자 여자의 등을 껴안고 있던 남자의 한 손이 그것을 집었다. 사소한 일로 키스가 중단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여자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남자는 오므린 손으로 여자의 등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다음이 궁금했지만 류는 졸음이 밀려와 더이상은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K는 재킷을 벗어 선반에 올려둔 가방 옆에 놓고 덮개를 닫은 뒤 자리에 앉았다. 류는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K의 입김에 섞인 것인지 자기 입에서 나는 것인지 술냄새가 역겨웠다. K가 류 쪽으로 몸을 구부리고 팔을 길게 뻗어 안전띠를 매주려고 했을 때 입을 막았던 류의 손바닥에 세게 힘이 들어갔다. 토할 것 같았다. 그 상태에서 눈을 돌려 K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류의 얼굴에는 악몽이 시작되는 순간의 두려움과 고통이 떠올라 있었다. 그 악몽은 류를 허공의 고문대에 묶어놓은 채 9시간 동안 계속될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기 위해 K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을 때 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며 이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의 출구는 K라는 절망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봄날 밴의 창가 자리에 앉았던 어머니의 몸짓이 떠올랐던 것이다. 류는 독을 삼키고 잠들고 싶었다. 만약 죽음의 사자가 도착하기 전 비행기가 착륙해 다시 땅을 밟게 된다면 곧바로 낯선 나라의 극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어두운 극장의 구석자리에 앉아 스크린 위에 빛이 흘러가는 걸 바라보며 시간을 빨리빨리 흘려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