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권력교체를 넘어 한국사회 새판짜기로

2013년체제의 전망과 과제

 

 

김기원 金基元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저서로 『경제학포털』 『재벌개혁은 끝났는가』 등이 있음.

 

박창기 朴昌起
(주)엔오푸스 대표. 희망제작소 이사. (주)팍스넷(증권정보 인터넷기업) 창립.

 

정태인 鄭泰仁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역임. 저서로 『착한 것이 살아남는 경제의 숨겨진 법칙』 등이 있음.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본지 편집위원.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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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이남주(사회)  이번호 대화의 주제는 최근 진보개혁진영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2013년체제의 전망과 과제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크게 바꿔보는 큰 원(願)을 세우자는 건데, 단지 권력교체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사회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비전이라는 의미에서 2013년체제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2013년체제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논의해봐야겠지요. 얼마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도 결과는 다행입니다만, 선거과정을 보면 그런 새로운 비전이 구체적으로 유권자에게 제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013년 이후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자는 취지에서 이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참석해주신 분은 진보개혁적 경제정책에 관해 많은 글을 발표하신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의 김기원 교수님, 지난 노무현정부의 동북아시대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이후 한국경제의 방향에 대한 많은 논쟁에 참여해오신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님, 그리고 창비 독자들에게는 좀 낯선 분일 텐데, 정보통신 관련해 일해오시다 최근 에너지 관련 사업을 하시면서 한국사회 발전 방향에 관해 제언해주시는 박창기 엔오푸스 사장님입니다.

우선 이명박정부의 출범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87년 이후 민주화가 왜 더 진전되지 못하고 퇴행적인 과정을 겪어야 했는지부터 짚어보죠.

  

87년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

 

金基元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저서로 『경제학포털』『재벌개혁은 끝났는가』 등이 있음.

김기원

김기원  87년체제가 불안정한 과도기 체제의 성격이기 때문에 퇴행도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도기 체제라는 의미는 87년에 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체제가 일단 해체는 됐는데 그후 새로운 선진체제가 안착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 원인은 한마디로 한국의 발전이 압축적이기 때문입니다. 서구에서는 긴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대체로 중상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복지주의, 시장만능주의 순으로 발전해왔다면, 우리는 개발독재체제로부터 정치적 독재는 어느정도 떨어져나갔지만 개발체제라고 하는 중상주의가 잔존해 있고, 그것과 자유주의, 복지주의, 시장만능주의가 각축을 벌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속에서 이명박정부가 4대강사업 같은 중상주의 정책, 다른 한편으로 부자감세 같은 시장만능주의를 펼쳐나가면서 퇴행이 나타난다는 생각입니다.

역학관계 측면에서는 87년체제로부터 진전이 저해되고 있는 요인을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남한 내부의 수구보수세력이 강고한 반면 진보개혁세력은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87년 이후 흔들리고는 있지만 분단 상황이 여전한 남북의 적대적 긴장관계가 자유주의적 개혁, 복지주의적 진보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시장만능주의죠. IMF사태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 운운하면서 확산된 시장만능주의 이데올로기가 국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제 생각에 이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도 아니고 중국이나 유럽을 봐도 시장만능주의에 의해 그 사회가 움직여가는 건 아니니까요.

 

이남주  우리 사회에서 주되게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지구적 차원에서의 시장만능주의가 있고, 국내적 차원에서 보면 수구냉전적 질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두가지 과제를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가 진보개혁세력의 진로에 관한 여러 논쟁을 유발하고 있지요. 김기원 선생님의 말씀은 글로벌 시장만능주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응방식에 따라 조절될 수 있는 반면, 남북관계에서 파생되는 수구보수 우위의 세력관계와 이념지형이 87년체제를 발전적으로 끌고 나가지 못한 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정태인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지니계수(계층간 소득분포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수편집자) 같은 양극화지표라든가 다른 경제지표를 보면 제일 좋았던 때가 1985~95년입니다. 이 시기에 양극화가 줄어들고 소득 등 모든 면에서 격차가 줄어들었죠. 저는 그게 87년의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전사회적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분배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분출했죠. 그런 흐름이 급격하게 꺾이는 게 1995년이고, 그 상징적인 사건이 김영삼정부의 세계화 선언이에요. 한데 관료들은 이미 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어요. 그게 정책으로는 별로 나타나지 않다가 95년부터 금융시장 개방이 큰 영향을 미치면서 외환위기를 불러왔죠. 사실 지표상으로 보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때의 지니계수가 악화되는 추세는 별로 다르지 않아요.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거의 같은 속도로 나빠졌는데, 다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는 세금을 통한 복지에 의해 조세 후 지니계수, 즉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완화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러다 이명박정부 와서는 그것에서도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죠. 이처럼 경제정책이 시장근본주의 말기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경제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봅니다. 진보세력의 힘이 약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책기조 자체가 그랬던 거죠.

시장만능주의에 영향을 받은 건 국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교육투기와 부동산투기에 빠진 시대가 90년대 중반부터였죠. 그때부터 한국이 무한경쟁사회로 들어섰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어요. 2000년대 초에는 급기야 ‘부자 되세요’ 같은 구호가 널리 유행하더니 이런 분위기는 2008년 총선에서 정점에 달했죠. 특목고, 뉴타운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동시에 내세웠고 그런 후보들을 국민이 뽑았다는 사실은 생활 속까지 시장근본주의가 침투되어 있었다는 방증이죠. 그게 이명박정권을 불러왔다고 봐요. 지금은 이명박정권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여기엔 미국 금융위기가 핵심적 원인이라고 봅니다. 미국식 씨스템, 시장만능주의, 생태 등 여러 문제가 동시에 불거지고 있죠. 이 위기가 쉽게 극복되진 않을 텐데 우리가 이런 시대변화를 어떻게 반영해 어떤 사회를 만드느냐가 2013년체제의 주요 내용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김기원  정원장님 이야기 중에서 사실관계보다 해석 부분을 보자면,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소득분배가 개선되는 경향은 노동권의 강화와 더불어 고축적이 일어난 시기니까 가능했던 거죠. 그것이 과잉축적으로까지 나타난 게 IMF사태를 불러온 내부적 요인인 거죠. 여기에 무분별한 개방이라고 하는 대외적 요인이 결합된 건데, 그런 고축적 속에서는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니까 자연히 임금이 상승하고 분배상태가 좋아지죠. 하지만 금융시장 개방 때문에 갑자기 상황이 악화된 건 아니라고 봅니다. 금융시장의 무분별한 개방이 IMF사태를 불러온 요인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IMF사태는 결국 자본주의의 공황상태잖아요. 공황이란 건 그 이전의 과잉축적을 조정하는 거고, 그 과정에서는 시장에서 고임금 상태가 조정됨으로써 분배구조가 나빠질 수밖에 없죠. 일단 IMF사태 직후에 분배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가 그후에는 상대적으로 크게 더 나빠지지는 않아요. 더구나 복지정책에 의한 가처분소득의 분배는 거의 일정하거나 오히려 개선되는 경향도 보이고 있어, 우리 민주정부들이 적극적으로 시장만능주의 정책을 썼기 때문에 이명박정부로 정권이 넘어갔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朴昌起 (주)엔오푸스 대표. 희망제작소 이사. (주)팍스넷(증권정보 인터넷기업) 창립.

박창기

박창기  87년체제는 우리가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한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나름대로 이를 극복해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만들었고 세계 15위 경제강국이 됐으니까요. 그런데 국민은 그만큼 행복해지진 않은 것 같아요. 함께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이권집단만 잘 사는 사회, 지나치게 경쟁에 내몰린 사회, 태어난 조건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경직된 사회가 돼버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분이 말씀하신 세계화와 금융자유화가 시장근본주의를 불러일으키고 다양한 문제의 근원이 됐다는 것은 거의 전세계적인 현상이죠. 그래서 우리가 쉽게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이명박정권이 탄생한 이유에 대해 저는 민주정부 10년간의 실정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노무현정부 말기에 민심이 등돌린 이유 중 하나가 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는 거였죠. 그전까지만 해도 OECD 국가 중에서 빈곤층의 비율이 평균 아래였는데 이때 많이 올라갔죠.

 

 

민주정부 10년과 이명박정부가 남긴 것

 

정태인  노무현 대통령이 새시대의 장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구시대의 막내였다고 하는 표현은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씨스템의 경향과 민주정부의 지향이 부정합되어 있었던 거죠. 실제로 전세계적인 압력에 많이 끌려갔어요. 그때와 지금이 왜 다르냐면, 지금은 글로벌 씨스템의 압력이 줄어들고 오히려 혼란이 일면서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저렇게 갈 수도 있게 되었다는 점이죠. 글로벌 씨스템의 압력을 비껴서 새로운 전형을 만들 수도 있고, 경쟁일변도가 아니라 다같이 사는 방법도 가능하다는 데 국민적 공감대도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2013년체제에서 민주적·진보적 가치가 구현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오랜 기간 혼란과 위기가 계속되다 보면 반대의 가능성도 있지만 민주정부 10년의 정세보다는 오히려 더 유리한 조건일 수 있습니다.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본지 편집위원.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이 있음.

이남주

이남주  지구적 차원의 변화가 새로운 비전의 모색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은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국민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 2007~8년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