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 제1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

 

달동네 우파를 위한 ‘이중화법’ 특강

한예슬 우화를 솔개와 백조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

 

 

황승현 黃承炫

1976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대중문화평론 당선.

hinno@hanmail.net

 

 

1. 교훈적 우화로 단정하기에 앞서 풀어야 할 의문들

 

자기계발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자기 부리까지 깨버리는 결단력있는 솔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마흔살 먹은 솔개는 부리와 발톱이 뭉툭해진 것에 충격을 받는다. 부리와 발톱이 그 모양이니 사냥이나 제대로 하겠는가. 좌파 솔개였다면 부리가 싱싱한 다른 솔개를 향해 공동 사냥을 하자느니 잡은 먹이를 함께 나누자느니 같은 주장이나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름지기 정신이 올바로 박힌 솔개는 다르다. 결연한 심정으로 가까운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야호를 외치기도 전에 느닷없이 부리를 바위에 부딪치는 것이다. 정상 등반도 힘들었을 텐데 멀쩡한 부리까지 깨버리려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하지만 새로운 부리와 발톱을 얻으려면 그만한 희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깨진 자리에 돋은 새 부리로 헌 발톱까지 모조리 뽑은 완벽주의자 솔개는 그렇게 자기혁신에 성공한다. 새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30년을 더 살아 일흔살까지 꽉 채우는 것이다. 솔개가 사는 곳을 찾아가 고희연이라도 차려드리고 싶을 만큼 감동적인 이야기다. 실로 자기계발의 달인이요 결단력의 화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우등생이 되기 위해 너나없이 분주한 이 나라에서 솔개는 진정 교훈을 주는 생명체다. 재벌과 정부를 미워하는 좌파라면 더더욱 경청해야 할 가슴 벅찬 실화인 것이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정부를 비난하다니 참으로 솔개보다 못한 루저 아닌가. 직원들에게 훈화하시는 사장님과 은행장님 들이 유난히 솔개 이야기를 애용하시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나라에는 교훈적인 우화1)가 한가지 더 생겼다. 한 여배우가 촬영중에 난데없이 미국으로 출국한 이 이야기는 이미 계몽적 우화로 회자되는 중이다. 언론에 비친 이 ‘한예슬 우화’는 무척 교훈적이다. 책임감을 망각한 젊은 여배우의 경거망동에 관한 타산지석의 우화이자 나는 저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깨달음을 주는 자기계발용 우화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망각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 자가 어떤 댓가를 치르는지 보여주는 사필귀정의 우화 말이다.

이 우화의 교훈을 뼛속 깊이 되새기기 전에 잠깐 멈춰 생각해볼 것이 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우화에 따르면 한예슬의 잘못은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죄가 빠져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계약은 신성하고도 준엄하다. 본인이 일단 체결한 계약에 관한 한 끝까지 책임져야 하니까. 자본주의의 근간인 재산권은 또 어떤가. 한예슬은 계약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려 한 것도 모자라 감히 타인의 재산권과 경제적 이익에 해를 입혔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예슬을 비난하는 자들은 이 당연한 죄를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수백억대 소송을 당할 것이라는 단발성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그것도 복귀 후에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계약을 무단으로 파기해 방송국과 제작사에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안길 뻔 했는데 왜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는 것인가. 한예슬 우화를 타산지석의 교훈적 우화로 결론내리기 전에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방송국과 제작사, 그리고 그를 비난하는 언론은 대체 왜 이 엄청난 대역죄를 묻지 않는가. 한예슬을 비난하는 수많은 목소리에는 거액의 출연료를 받으면서 박봉의 스태프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호통은 있어도 거액의 출연료를 받아놓고 방송국과 제작사에 손실을 입혀서야 되겠느냐는 당연한 지적은 없다.

단지 스태프뿐 아니라 시청자와 국민에게 실망을 줬다거나 직장인에게 박탈감을 줬다는 이야기도 뒤따른다. 이상하다. 수백억대 소송 운운에서 알 수 있듯이 한예슬은 분명 방송국과 제작사에 어마어마한 경제적 손해를 끼칠 뻔하지 않았던가. 촬영이 지연되는 동안 제작비며 관리비도 적잖게 밑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대신 스태프와 국민, 직장인에게 끼친 피해만 걱정한다. 그건 당사자인 방송국과 제작사도 마찬가지다.

아니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는가. 누가 봐도 제일의 피해자이거늘 왜 방송국과 제작사는 자신의 피해는 언급하지 않고 심지어 직장인 걱정까지 해주고 있는가. 이분들이 이렇게 겸손하고 자애로워도 되는 것인가. 이 의문을 풀기 전까지는 한예슬 우화의 내용과 성격을 어떤 식으로든 단정지을 수 없다. 한 무책임한 여배우의 일탈을 통해 사회생활의 기본자세를 배우는 타산지석의 우화로는 더더욱.

 

 

2. 그들은 왜 방송국과 제작사를 걱정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스태프를 걱정하는가

 

한예슬을 비난하는 목소리에는 대개 스태프에 대한 극진한 애정이 담겨 있다. 왜 그들은 방송국과 제작사 대신 스태프를 걱정하는가. 그동안 천대받아온 스태프를 하필이면 지금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말한다. 박봉에 시달리는 스태프도 가만히 있는데 거액의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