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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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 金鍾光

1971년 충남 보령 출생.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낙서문학사』 『처음의 아해들』과 장편소설 『71년생 다인이』 『율려 낙원국』 『첫경험』 『군대 이야기』 등이 있음. kckp444@hanmail.net

 

 

불효의 시간은 더디더디

 

 

혼인에 칠순 팔순 잔치에 초상에, 왜 이리 그냥 오라는 데도 많고 가야 할 데도 많은지 정신이 없다야. 부조봉투 들고 다니다 겨울 다 갔다. 이번주에도 초상집이 둘이나 있었다야. 신기하지, 둘 다 목숨을 매달았어야. 요새 세상에 누가 자살한다고 뉴스거리나 되겠냐. 제일 높은 사람 제일 유명한 사람도 막 자살해버리는데, 션찮게 늙은 촌목숨 세상 등졌다고 무슨 말거리나 되겠냐. 근디 시골 아니냐. 죽을 나이가 돼서 죽은 것도 아녀, 무슨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것도 아녀, 자살로 죽었다면, 동네 사람들 뒤숭숭하지.

어머니는 심란한 낯꼴로 자분자분 주워섬겼다. 나는 한해에 여남은차례 얼굴을 비추는 것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큰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편찮을 때나 자주 뵙지, 건강하고 안녕할 때는 도통 뵙지를 못하는 게 어버이였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저녁식사를 마치자 안채로 건너갔다. 아내가 요란한 설거지를 마치고 과일상을 보았다. 나 역시 붙임성이 없고 덤덤한 편이다. 간만에 뵌 어머니에게 살가운 말 한자락을 붙이지 못했다. 어버이를 뵈면 항상 궁금한 게 샘솟는 척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아내마저 ‘침묵은 현금이다’라는 자태로 일관했다면 얼치기 효도방문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시골물정 모르는 아내의 질문은 어머니의 수다를 이끌어냈다. 어머니는 삼동네에서 가장 말수가 적은 여인으로 유명했다. 말을 못하는 편도 아닌 듯한데, 어머니는 평소 말을 어떻게 참고 사는 걸까.

여든살도 훨씬 넘은 할아버지가 넥타이로 목을 매달았어. 건강이야 했지만 언제 워칙히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나이 아니냐. 스스로 생목숨 끊어가면서 서둘러 갈 까닭이 대관절 뭐였을까나. 할머니 살아 있을 적에 죽을라고 그랬을겨. 그렇지 않겄냐? 할머니는 혼자 살 수 있지만 할아버지는 혼자 못 산다. 너도 알지? 그 냄새쟁이 노인네. 그 노인네가 냄새쟁이 된 게 언제부터냐? 할망구 먼저 보낸 다음부터지. 빨래를 못해 입으니께. 남자들이 다른 건 몰라도 세탁기 돌리는 법은 꼭 배워놔야 한다. 혼자 사는 노인네는 밥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옷이 문제여. 다른 건 몰라도 느이 아버지 세탁기 돌리는 건 꼭 가르쳐놔야 되는디.

어머니도 참 별말씀을 다하셔요.

그래도 그 할아버지는 자기 집에서 돌아가셨기나 하지, 느이 아버지 동창분은 인제 나이도 일흔하나밖에 안됐는데, 참 말하기도 겁난다만, 연고도 없는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인가 참나무인가에 혁대로 목을 맸지 뭐냐. 그분이 노가다꾼이여. 나는 여직도 느이 아버지한테 용돈을 타 쓴다만, 그분은 돈을 버는 족족 마누라한테 바치고 지우 차비나 타 썼다더라. 니들도 그러지이?

그럼요, 저는 돈을 관리할 줄 모르잖아요.

당연히 그래야지. 에미가 착실히 관리했으니께 그나마 네가 아파트 전세라도 사는겨. 에미야, 장하다……그분이 요번에도 겨우내 골프장인가 짓는 데서 몇백만원인가를 벌어갖고 왔단 말여. 그런디 그분이 생전 안하던 짓을 왜 했을까나. 백만원도 아니고 딱 팔십만원만 달랬다더라. 아줌마가 물었을 거 아니냐? 뭐에 쓰려는 거냐고. 아저씨가 그랬디야. 이날 이때까지 내가 번 돈 내 마음대로 써본 적이 없다. 한번만이라도 내 요량껏 써보고 싶다. 당신 속상하게 하는 데 쓸 일은 없으니 걱정 붙들어매도 된다. 계집이라도 생겼냐고? 같잖은 말 좀 하지 마라. 이 나이에 계집질이 가당키나 하냐. 그냥 내 마음대로 써보고 싶다는 거 말고 다른 거 없다. 나 같으면 팔십만원이 아니라 다 주었을 겨. 칠순 노인네가 그런 말 하는디 짠해서라도 그냥 다 줬을겨. 그런디 그 아줌마는 지금 돈 들어갈 데가 한두군데냐.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는데 워칙히 된 양반이 쓸 생각만 하느냐. 밥 잘 먹고 테레비도 위성방송인가 달아서 화면 백개짜리 나오니 볼 것도 쌨다. 술? 내가 언제 술 안 사다준 적이 있냐. 당신이 소주 생각난다고 하면 슈퍼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왔다. 도대체 어디에 따로 쓸 돈이 필요하다는 건지 참말로 모르겠다. 이렇게 겁나게 잔소리를 했다더라.

차소리가 나고, 곧 큰 목소리가 들이닥쳤다. 저유. 저 왔슈.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맞으러 나갔다. 어이구, 진짜로 왔네. 올 필요 없다는디 왜 왔어. 어이구, 왔으니께 어서 들어와. 애들한테 아무 말도 안해놨는디, 참 당황스럽구만.

두 여자가 부산스럽게 들어왔다. 한분은 집안행사 때마다 늘 뵙는 먼 친척 아주머니였다.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찍 늙은 얼굴에 어머니처럼 호졸근한 입성이었다. 동반한 여자는 사십대 중후반으로 뵈는데 희디흰 셔츠에 검은색 투피스 정장차림이었다. 농촌에서 보기 힘든 인상적인 미모와 세련되고 날렵한 입성이었다. 두 여자는 시골 고양이와 도시 고양이처럼 안 어울려 보였다.

아내와 나는 엉거주춤 인사를 드렸다.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에 푹 빠져 있던 아들녀석은 손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녀석의 머리통을 툭 건드리며, 인사드려야지, 했다. 녀석은 아이씨, 할 뿐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숫기가 없고 나쁘게 말하자면 버르장머리가 없다.

판돈아, 밖에 있는 게 네 차지? 차 좋더라야. 저게 준중형이란 거냐? 자못 비싼 차지? 하는 일도 다 잘되고 돈도 많이 벌고 완전 승승장구라면서. 축하헌다, 축하해. 너는 소문난 효자니께 계속 잘나갈겨.

아주머니의 난데없는 축하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비싸지요, 36개월 할부예요.

어머니, 며느리 참 잘 얻었어유. 인물 참하지 키 크지 내조 잘하지 시부모님 잘 챙기지 어디서 이런 우렁각시가 굴러들어왔어. 진짜로 다른 거 없어유. 그저 며느리를 잘 얻어야 돼. 내가 다 고맙네. 우리 판돈이랑 잘 살아줘서. 아주머니는 아내의 손을 덥석 잡아쥐고 흔들며 덕담을 퍼부었다.

아내는 태어나서 칭찬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아주머니는 아이에게도 덕담을 베풀었다. 어이구, 참 예쁘게도 생겼다, 하며 쓰다듬는 손길을 녀석이 싸가지없이 탁 쳐냈는데도, 하하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뭐 보냐? 니이, 유재석이 나오는 거구나. 나도 저 프로 되게 재미나게 본다. 재미있냐? 대단허네. 몇살인디 저런 걸 다 즐기냐. 이게 네 공부하는 책이냐. 우와, 영어네. 벌써 영어를 좔좔 하는겨. 장기판이네. 너 장기 둘 줄 아는갑다. 판돈이 닮아서 머리가 겁나게 좋은 모양이네. 커서 판검사가 될라나 교수가 될라나. 뭐가 되도 훌륭히 되겄다.

녀석은 자기를 추어주는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런닝맨’ 볼 때는 텔레비전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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