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가능한가

 

세계문학에 지방정부는 있는가

동아시아문학과 관련하여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전 한국문학번역원장. 평론집으로 『놋쇠하늘 아래서』 『리얼리즘의 옹호』, 편서로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등이 있음. jkyoon@duksung.ac.kr

 

 

1. 세계문학의 외무부와 지방정부

 

동아시아문학의 위상을 생각해보려는 이 글의 제목, 세계문학과 지방정부의 얼핏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결합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매력적이면서도 함축적인 강연 ‘세계문학은 외무부를 두는가’에 자극받은 것이다. 3년 전 인문사회과학 부문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홀베르그 상을 수상한 제임슨은 기념 심포지엄 기조강연에서 지구화시대에 민족적 차이들의 관계 맺기와 중심 없는 지구적 다양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하나의 문제 혹은 수수께끼로서 세계문학이라는 의제를 다시 부각시켰다. 세계문학은 “이미 정해져 있는 판테온이나 걸작들이 정기적으로 추가되는 상상의 박물관”이 아니라, “투쟁의, 즉 경쟁과 대립의 공간이자 터전”이며, 이 문학투쟁은 무엇보다도 “힘이 강한 언어와 힘이 약한 언어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1)

이같은 제임슨의 관점은 일찍이 비서구 제3세계 국민문학들의 지배적인 특성을 ‘민족적 알레고리’(national allegory)라고 지칭하면서 이를 서구의 시각에서 재단할 수 없다는 주장2)을 펼친 논자로서 당연할 법하고, 서구중심의 세계문학 질서에 대한 비판이나 조정의 요구가 힘을 얻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특별할 것도 없겠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감지되는 것은 지구화와 더불어 해체되고 있는 혹은 해체되었다는 ‘민족적인 것’의 의미를 복원하려는 의지다. 과연 지구화의 시대에 민족국가는 유효한가, 또 민족적 특수성이 세계라는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물음, 세계문학이라는 의제는 바로 이같은 물음들을 촉발시킨다.

‘민족적인 것’이 서구의 역사경험에서 파시즘과 직결되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해체되거나 버려질 수 없는 것은, 여기에 저항과 변화의 동력인 집단성이 늘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범주는 여전히 살아 있는 힘이며 각 민족의 상이한 구체적 상황과 역사에는 근원적 독특성(radical singularity)이 있어서, 근대성에 도달하는 목적론적인 도상에서의 그 선후를 따지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각 민족의 문학 산물들이 저마다 고유성을 인정받고 있다면, 그것이 세계문학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는 경쟁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세계문학을 “위대한 혹은 고전적인 한가지 텍스트의 가치라는 관점이 아니라 민족적 산물들 사이의 관계로” 볼 때, 이 관계는 조화로울 수도 있고 적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문학의 장()에서라면 문학의 국제관계를 관장하는 ‘외무부서’가 필요할 법하지 않은가?

그렇더라도 세계문학의 외무부라니, 꽤나 당혹스러운 어법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다양한 국민문학의 산물들이 다양한 세계독자에게 각각의 고유성을 내세우며 나타나게 될 때 그 복잡한 관계를 조절하고 관리하는 업무가 비유만이 아닌 실제로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세계문학을 국민문학들의 연합체로 본다면, 이 연합을 구성하는 각 국민문학들이 상호경쟁하면서 형성하는 관계에는 자국 내의 문학논리나 여건과는 다른 어떤 해외적인 메커니즘이 작용할 수 있다.

제임슨의 이 강연이 필자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하는 공공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봉사하기도 했던 개인적 경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 정부는 국가사업 차원에서 자국 국민문학의 해외 번역과 출판을 지원해왔고 여기에는 국가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정책적인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지만 제임슨이 말하는 세계문학의 외무부서는 국민국가들 사이에 무역상의 역조를 시정한다거나 자국문학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세계문학 개념에는 ‘불균등과 정전(正典) 상의 불평등’이 작용하고 ‘근본적 차이와 대립’이 포함되어 있다. 세계문학의 국제관계를 이룩해나가는 일은 각 민족의 특수성을 살리면서 그 문학적 성취들이 패권적인 보편의 틀로 환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정치상의 외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정교한 수완과 타자에 열려 있는 정신이 필요할 법하다.

이를테면 한국문학의 외무부서라 할 한국문학번역원의 존재 자체가 세계문학이 안고 있는 일종의 모순을 증언하고 있다. 그 설립부터 국가재정이 투입된 이 공공기관의 해외사업에는 자국 문학의 뛰어난 성취를 세계독자와 공유한다는 취지의 이면에 세계문학의 공간구성에 전략적으로 개입하여 한참 뒤떨어져 있는 문학부문의 대외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국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이것은 세계문학이 국민문학들 혹은 어느 한 국민문학에 소속될 수밖에 없는 개별 작가들로 이루어진 자율적인 질서가 아니라 정치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애초부터 국민국가 사이의 권력관계에 따라 형성된 불평등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제임슨이 말하는 외교부서가 비유를 넘어 실체를 가진다는 사실은 세계문학이라는 것이 서구적인 보편성의 질서에 포박되어 있음을 새삼 환기시킨다. 제임슨이 최종적으로 던진 물음, 즉 “차이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 맺으며, 민족특수성이 어떻게 보편적이 될 수 있으며, 중심 없는 지구적 복수성이 어떻게 상상될 수 있는지”는 외교로 조정될 문제만이 아니라 현존질서를 심문하고 해체하는 기획을 요구한다. 가령 세계문학을 관장하는 ‘문학적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를 상정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 국제기구를 움직이고 정책을 좌우하는 힘은 현존하는 유엔이 그런 것처럼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담론이 그렇듯이 동아시아문학론 또한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의 한 방식이 아니라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서구중심의 세계문학 질서에 개입하는 한 방법으로서 동아시아문학론을 생각하자면, 이 지역의 문학이 내부적으로 얼마나 통합되어 있고 대외적으로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관건으로 떠오른다. 과연 동아시아의 지역문학은 일종의 자치적인 지방정부로서 중앙권력에 맞서고 변화를 추동할 만한 역량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가?

사실 제임슨의 이번 강연은 지구화의 현실에서 민족적인 것의 의미를 되새긴 데 큰 의의가 있지만, 민족단위를 지리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광역으로 통합하여 사고하지는 않는다. 비서구권의 국민문학들을 통칭하여 ‘민족적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초기의 관점은 그대로 유지된다. 비서구권의 역사적 체험이 생성한 원한의 정서와 고통의 현실로 인하여 그 문학에는 극히 사적이고 심리적인 이야기도 늘 집단적인 경험과 결합해 있다는 것이다. 세계문학 논의에서 제3세계문학의 특성을 이처럼 통괄해낸 것에는 기존의 제1세계적 관점을 갱신하는 미덕이 있지만, 대신 이 환원에는 희생이 따른다. 그 자신도 말하는 각각의 국민문학의 ‘근원적 독특성’은 물론 가령 동아시아나 아랍 등 비서구권 내에서 광역지역을 사유의 대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3)

가령 그는 루쉰(魯迅)의 「광인일기」나 「아Q정전」을 서구적 근대성의 침투에 대한 중국민족의 반응을 알레고리화한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꾸바나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텍스트들과 병치시키지만, 루쉰 문학의 세계문학적 의미는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시각을 확보할 때 더 온전히 살아날 수도 있다. 한 중문학자는 루쉰이 토오꾜오에서 이광수(李光洙)나 홍명희(洪命熹)와 같은 시기에 머물렀다는 흥미로운 사실에 착안하여 근대의 도래에 직면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공통의 운명과 그 반응의 차이를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