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세계체제분석 논란 37년*

근대세계체제 2011년판 제1권 서문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뉴욕주립 빙엄튼대 페르낭 브로델 쎈터 명예소장, 예일대 수석연구학자. 국내 소개된 저서로 『근대세계체제』(1~3권)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유토피스틱스』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등이 있음.

 

 

 

『근대세계체제』는 1974년에 출판되었다. 실제로 집필한 것은 1971~72년이었다. 나는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책은 16세기에 관한 것이었고, 게다가 사실상 미지의 주제, 즉 의도적으로 붙임표로 연결한 세계경제(worldeconomy)를 논했다. 분량도 분량이려니와 각주의 수도 엄청났다. 책이 나왔을 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한 서평자는 각주가 지면을 아래위로 기어다닌다고 불평했다. 결국 아카데미 출판사(Academic Press)와 당시 학술담당 고문편집인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새로 기획한 사회과학총서에 이 책을 일단 집어넣어 보기로 결정했다.

출간 뒤의 반응은 모두를, 특히 출판사와 나 자신을 놀라게 했다. 이 책은 『뉴욕타임즈 썬데이 북리뷰』(New York Times Sunday Book Review) 1면과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에서 호평을 받았다. 1975년에는 미국사회학회(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가 최고의 학술저작에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당시에 그 상은 쏘로킨(Sorokin)상으로 불렸다. 너무도 뜻밖의 수상이라 나는 수상자가 발표되는 학회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책은 여러 언어로 속속 번역되었으며, 학술서적치고는 판매실적이 썩 좋았다. 어떤 면으로 봐도 그것은 성공작이었다.

하지만 그 저작이 대단히 논쟁적이었다는 것 또한 곧바로 드러났다. 굉장한 찬사가 쏟아졌지만, 또한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그런 비판들은 여러 상이한 진영에서 나왔다. 처음 출판되고 37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나는 그러한 비판들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판의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비판은 오늘날 얼마나 유효한가? 그 타당성에 대해 지금 나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비판이 첫권에 이어서 나온 두권의 책에는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먼저 비판의 배후에 있는 한가지 특별한 전후 사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직업상 사회학자였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경제사에 관한 저술로 보았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사회학자가 16세기에 관해서나 경제사가들이 다루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는 게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다른 한편 역사가들은 다른 학문분야의 침입자를 경계했고, 그 침입자가 나처럼 이른바 2차 자료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그 책은 지구의 공간적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뤘고 이는 지리학자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여겨졌다. 끝으로, 처음에 그 책을 열렬히 환영한 이들 가운데에는 예기치 않은 부류가 있었으니, 몇몇 고고학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요컨대, 나는 그 당시 학문연구를 정의하는 범주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으로 비쳤고, 지식의 구조 안에 모셔진 통상적인 박스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책을 쓸 당시 저자의 자기인식이 어떠했나부터 풀어가보자. 서문에서 나는 저술의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나는 어떤 잘못된 생각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16세기에 ‘새로운’ 것이었던 국가가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가를 탐구하면 20세기의 ‘새로운 국가들’이 밟아나갈 궤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모든 국가가 이른바 ‘발전’이라는 무언가에 이르는 비슷한 길을 제각각 따라간다고 가정했기에 잘못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으니, 덕분에 나는 16세기 유럽에 관한 자료를 읽게 되었고 그때까지 예상하지 못한 현실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머릿속에서 주로 베버학파의 사회학자들—막스 베버(Max Weber) 자체가 아니라 1945년 이후 미국(그리고 어느 정도는 세계) 사회학에서 이용된 그의 범주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관한 베버의 책은 특정한 가치들이 1945년 이후에 흔히 근대화 또는 (경제)발전이라고 불리게 된 것의 필수 선행조건이라는 뜻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 시절의 연구방법은 으레 나라별로 그러한 가치의 존재 또는 생성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진보의 행진을 가리키는 연대기적 서열순위표 같은 것이 나왔다. 어느 나라가 일등이었나? 그 다음은 어디였나? 이제 누가 그 다음에 올 것인가? 그리고 여기서 파생한 질문으로, 다음 주자가 되기 위해 한 나라는 무엇을 해야 했는가?

몇가지 방식으로 나는 이같은 서사에 도전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먼저, 그러한 과정이 나라별로 연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체제(worldsystem)라고 부르는 더 넓은 범주 안에서만 연구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여기서의 세계(world)는 지구의(global)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곧잘 썼듯이, 그것은 어떤 세계(a world)이지 세계(the world)가 아니다.〕

둘째로, 나는 문제의 가치들이 당시 일어나고 있던 경제적 변화에 선행했다기보다는 그것을 뒤따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어떤 국가들이 생산성과 부의 축적에서 앞서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오로지 다양한 국가들을 상호간의 관계 속에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로, 나는 1945년 이후의 베버학파가 제시한 주된 대립항, 즉 전통 대 근대성이라는 관념을 거부하고 있었다. 차라리 싸미르 아민(Samir Amin)이나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 같은 이른바 종속론자들(dependistas)이 발전시켜가던 논의, 즉 ‘전통적인’ 것이 ‘근대적인’ 것만큼이나 근래의 현상이며, 그 둘이 나란히 출현했고, 그 결과로 우리가 프랑크의 유명한 표현인 ‘저발전의 발전’(development of underdevelopment)1)에 대해 논할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했다.

나는 1945년 이후의 베버학파 측에서 공격하고 나오리라 예상했다. 그들은 내 주장을 수긍하려 들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정중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다만 내가 맑스주의의 주장(그들 생각으로는 진지한 학자라면 이미 포기했거나 포기했어야 마땅한)을 되살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 16세기 역사 연구에 실제로 뛰어들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는데, 베버 테제의 축약된 (그리고 때론 왜곡된) 개요에 의존하여 20세기의 자료를 논의하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니 실은 그럴 만했다. 게다가 책을 낸 지 얼마 뒤 테렌스 홉킨스(Terence Hopkins)와 함께 쓴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근대화론의 전문가들이 수행한 이른바 비교분석은 어느 하나의 비서구국가에 관한 동시대의 데이터를 미국(또는 어떤 서유럽국가들)에 대한 추정된—즉 경험적으로 검토되지 않은—데이터와 비교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2)

어쨌든 가장 큰 비판은 다른 곳에서 제기되었다.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먼저 내가 주요한 비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분석방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의 분석방법으로서의 세계체제분석(worldsystems analysis, 말 그대로 옮기면 ‘세계체제들에 대한 분석옮긴이)을 거부하는 부류다. 자신의 방법론이 명백히 우월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내가 세부적 비판이라고 여기는 것이 있었다. 이들은 적어도 어느정도까지는 세계체제분석의 정당성을 인정하지만, 내가 어떤 중요한 실증적 데이터를 전달하거나 해석하는 데 오류를 범했다거나 어떤 중대한 데이터를 누락했다는 이유로 내가 기술한 역사의 세세한 부분을 문제삼는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부류의 비판은 1990년대에 와서야 제기된 것들로, 붙임표와 복수형을 없애는 방식으로—다시 말해 지난 5000년에 걸쳐 언제나 단 하나의 ‘세계체제’(world system)가 존재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주장함으로써—세계체제분석을 수정하려는 시도다. 이 세가지 비판과 그 곁가지 비판들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주요한 비판들

 

1945년 이후의 베버학파가 나를 과도한 맑스주의자로 여겼다면, ‘정통’ 맑스주의자들은 내가 전혀 맑스주의적이지 않다고, 오히려 정반대로 ‘신()스미스주의적’(neoSmithian)이라고 보았다.3) 여기서 정통 맑스주의자란 정당에 의해 정의된 맑스주의—즉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소련 공산당이 정의한 대로의 맑스주의, 그리고 물론 대부분의 트로쯔끼주의 정당들이 규정한 대로의 맑스주의—를 따른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다.

이 그룹들은 정치적 전략에서, 또한 20세기에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서로 달라도 너무 달랐지만, 그럼에도 몇몇 기본 전제를 공유했다. 첫번째 전제는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이 지니는 성격이다. 그들은 계급투쟁을 근본적으로 신흥 도시 프롤레타리아계급과 자본가적 생산자(주로 산업기업가) 사이의 투쟁으로 정의했다. 두번째 전제는 경제적 토대가 정치적·문화적 상부구조에 대해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 전제는 인과관계의 설명에서 내부적 요인(즉 한 나라 안에서 발생한 원인)이 외부적 요인(즉 한 나라 밖에서 발생한 원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네번째 전제는 이른바 다양한 생산양식이 일정한 순서에 따라 진행된다는 관점으로 해석한 진보의 필연성이다.

정통 맑스주의자들은 세계체제분석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 전제 전부를 무시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사실 어느정도는 타당했다. 『근대세계체제』 제1권을 놓고, 이 비판자들은 내가 생산부문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관점에서 사태를 설명했어야 함에도, 그들 말로 ‘유통주의적’(circulationist) 논증이라고 하는 것에 경도되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핵심부-주변부 관계를 논의할 때, 나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설명하는 요인으로서 영국 내부의 계급투쟁을 무시하고, 아메리카 대륙과 북서유럽 사이의 무역의 성격과 흐름 같은, 외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요인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물론, 즉시 떠오르는 질문은 무엇에 대해 내부적인가 또는 외부적인가 하는 것이다. 정통 맑스주의자들에게 내부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한 나라의 정치적 경계에 대해 내부적인 것으로 정의되었다. ‘경제’란 한 국가의 구조물이었다. 계급 또한 국가 차원의 문제였다. 자본주의적인가 아닌가의 꼬리표를 붙일 수 있는 것은 국가였다. 이에 관한 논쟁은 대단히 중요했다. 나는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한 세계체제, 내가 ‘세계경제’라고 부르는 특정한 형태의 세계체제저자에 따르면 세계체제는 세계제국(worldempire)과 세계경제(worldeconomy)로 나누어진옮긴이의 특징이었다. 계급은 이 세계체제의 계급이었다. 국가 구조 또한 이 세계체제 안에서 존재했다.

이 진영에 속한 정통맑스주의자들은 좀처럼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는 내 저술의 영향 때문이기보다는 근대세계체제의 상황 변화와 더 관련이 있다. 1960년대까지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던 정치적 운동들은 1968년의 세계혁명을 만들어낸 세력으로부터 심대한 도전을 받았다. 사회현실의 분석에서 젠더, 인종, 민족(ethnicity), 슈얼리티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강력한 운동으로 그들은 수세에 몰렸다. 또한 1980년대 신자유주의로부터 나온 정치적 반격과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게 수용되면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1960년대 정통 맑스주의의 전통적 분석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또 하나의 비판은 정통 맑스주의적 분석방법의 마지막 지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 즉 1970년대에 매우 활기를 띤, ‘생산양식들의 절합(節合, articulation)’4)이라는 사상의 옹호자들로부터 나왔다. 나의 관점에서 보건대, 이 그룹이 실상 하고 있던 일은 사회현실이 어느 한 나라의 경계 안에서만 분석될 수 없다는 주장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비록 세계체제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 세계체제 안에서 뭔가 중대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한 나라는 자본주의적이고 다른 나라는 여전히 봉건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나라들은 나름의 중요한 방식으로 어떻게든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생각을 바꿨다. 그들은 그 두 생산양식이 서로 ‘절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일정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 이렇게 어중간한 입장은 그리 설득력이 있지도 않았고 사회현실을 파악하는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