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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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殷熙耕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등이 있음. silverpaperbox@gmail.com

 

 

 장편연재 3

태연한 인생

 

 

제2부 거짓과 상실의 세계:

거짓으로 사랑하였으나 목놓아 울었다*

 

1. 「경천동지」—요셉의 새 소설 제1장

 

그는 이제 정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랫동안 소설이 써지지 않았다. 매일 더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으로 하루가 시작되곤 했다. 긴 암울에서 벗어난 그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우선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13월이나 제8요일 같은 것이다. 글이란 일년 내내 잘 안 써지게 돼 있다. 커튼을 내리고 있으면 우울해지기 쉽고 그렇다고 활짝 열어놓으면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 환하고 맑은 날엔 산만해지기 쉽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엔 무기력해서 글이 잘 풀리지 않는다. 기분 좋은 소식이 오는 것도 반길 일이 못된다. 기분 좋은 생각이란 한번 머릿속에 들어오면 좀처럼 다른 생각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반대로 안 좋은 소식이 왔다면 그건 말하나 마나이다. 기분 나쁜 날 글이 잘 써질 정도로 인생에 의외의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다. 더구나 의외란 건 주로 나쁜 방향에서 찾아온다. 모든 상황이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는데도 작가에게는 책상 앞을 벗어나는 현명한 행동이 용납되지 않는다. 죽어라고 책상에 붙어앉아 있어야 한다. 대가(大家)라고 불리는 이들마저 글은 엉덩이로 쓴다거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는 말로 작가의 도로(徒勞)를 독려해왔다.

그도 쉽게 책상 앞을 떠나지는 못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 그는 평소 말초신경 낭비라고 욕했던 컴퓨터 게임을 하기 위해 참을성을 갖고 규칙을 습득했다. 인터넷 검색의 중요함도 새삼 깨달아 신빙성 없는 견문을 넓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실시간 뉴스와 날씨는 물론 걸그룹의 식단이나 졸업앨범 사진, 환율변동에까지 신경을 썼다. 화제의 유튜브 영상이나 인기순위가 높은 유머도 알아두었다. 이 모든 게 언젠가 글을 쓸 때 필요할지 모를 자료였기 때문이다. 그런 취재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목이나 허리에 디스크 증상이 의심되었으므로 새로 건강분야의 검색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자신에게 당장 진찰을 받아야 할 심각한 증세가 많다는 데 놀라는 거였다. 그것은 병마와 싸우며 창작의지를 불태우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었다. 창작의지란 글이 안 써질 때 사용하는 것이다. 써야 할 소설의 운명에 집중할 수 없을 때는 그 집중력이 자기 내부로 향한다. 그때에는 병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병을 발굴한다.

어느정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면 글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찾아오긴 한다. 그러나 텅 빈 채로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때는 상상력이 왕성해지면서 글의 방향을 잃어가는 단계가 되었다. 작가가 되지 못해 원한을 품은 해커가 재능있는 작가만 골라 컴퓨터 파일을 모조리 파괴해버린다는 식의 엉뚱한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는 습관을 바꿔서 어떤 작가들처럼 까페에 나가 글을 써보기로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까페를 서너군데씩 옮겨다니며 그는 종업원들과 드나드는 모든 손님들을 관찰하고 대화를 엿들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탁자 위에 랩톱을 올려놓고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마다 실망하곤 했다. 책으로 살짝 덮어놓고 갔을 뿐인데 그것을 훔쳐가지 못한 소심한 도둑들의 패기 부족 때문이었다.

드디어 첫 문장을 시작한 날은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마셨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서성이다 되돌아가서 자신이 쓴 것을 되풀이 읽다 보면 하루는 금방 지나갔다. 그러나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음날 일어나 보면 그것은 대부분 쓰레기로 변해 있곤 했다. 마음에 안 들어 지워버렸던 그 문장이야말로 최고의 문장이었다는 것을 깨칠 때도 있었다. 그런 깨달음은 늘 지나치게 늦게 찾아왔다. 백방으로 복원 방법을 알아보면서 그는 다시는 그런 문장을 쓸 수 없으리라는 절망에 매번 눈물을 참아야 했다. 창작을 위한 열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술을 서너잔쯤 마시는 일이 어쩔 수 없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숫자를 셀 수 있을 때까지의 셈법이었다. 술은 잠깐 사이에 그를 마취시켜놓고 창작의 열기에 오염된 그의 시간을 전리품처럼 간단히 거두어갔다. 그 시간이 사라질 때 찾아오는 환희를 그는 기꺼이 환영했다. 그때쯤이면 글을 쓰지 못하는 고통은 사라졌다. 대신 위대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고통이 찾아왔는데 묘하게도 그것은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그는 해장국을 든든히 챙겨먹은 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지난밤 축제를 함께했던 위대한 고통도 다시 글이 안 써져 죽을 것 같은 고통의 본모습으로 시무룩하게 복귀했다. 여전히 모니터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이한 생각이었다. 그는 상투적인 의미체계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다. 아무 진전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우여곡절과 경천동지의 세상은 결코 간단한 게 아니었다. 이제부터 쓸 소설의 첫 문장이 시작되기만 한다면 세상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2. 아침

 

여느 날과 같이 그날의 일정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켠 요셉은 잠시 날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월 마지막날. 그 숫자는 요셉의 눈에 아주 익숙한 배열이었다. 1년에 한번밖에 없는 날이니 특별한 날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셉의 일정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뻔한 것이었다.

오전에는 까페에 나가 미뤄왔던 생활설계사들의 수필 심사를 마치고 심사평을 써야 했다. 그런 종류의 산문을 써야 할 때 요셉은 소설 쓸 때와 달리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곤 했다. 너무나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음번에 또 심사를 맡기 위해서는, 전반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둥 진심에서 우러나온 글만이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는 둥 우호적인 평을 적당히 끼워넣어야 하는데,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매번 다르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잡문을 쓰면서까지 타고난 예술혼이 자신도 모르게 동원돼버리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가치없는 일에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응모작들이 결코 아무도 읽어서는 안될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사비가 입금되면 어느덧 그 심사에 우호적이 되어 있곤 했다. 그것은 평론가들이 원고가 쓰기 싫은 나머지 자신이 평을 쓸 작품에 적대적이 되다가 마침내 원고를 완성하면 급히 호의적으로 되돌아가는 메커니즘과 비슷했다.

늦은 오후에는 지역도서관의 자문위원회의가 있었다. 요셉의 생각에 전문가란 한 분야의 정통함을 통해서 세상 전반에 대한 통찰을 갖춰야 옳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분야에만 통하는 전문성을 세상 전반에의 무지에 대한 정통성으로 삼는 게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극히 부분적으로만 정의로웠고 부분적으로만 합리적인데, 부분이 전체를 대표할 것 같지도 않았다. 또 지식인으로서는 정의로운 사람도 정서적으로는 편견투성이였으며 평등을 주장하지만 자신이 아는 사람들과 평등해지기는 싫어했다. 많은 기자들은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몇가지 사례만으로 자기의 편견을 일반화할 뿐이지만 전문가들은 더 나아가 거기에서 규칙을 발견해내서 자신의 신념체계로 대중을 속이기를 좋아했다. 요셉 스스로의 공정한 시각으로 볼 때 그들은 인간의 개별적 고유성을 단지 하나의 사례로 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날도 요셉은 누가 됐든 발언을 시작하자마자 그를 향해 맹렬히 고개를 끄덕여줄 작정이었다. 듣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면 상대는 으레 공감의 뜻인 줄 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듣기 싫은 말을 빨리 끝내게 하기 위한 행동이다. 또한 끝내는 것만을 목적으로 시작한 의례적이고 지루한 회의에 임할 때는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야 졸음을 쫓을 수 있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회의가 빨리 끝나도록 현실개선의 의지를 불태워봤자 결과적으로 그것은 회의 때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재미없는 회식시간을 앞당기는 일일 뿐이라는 사실은 부조리이자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따로 갈 데도 없는 요셉은 꼬박꼬박 회식에 참석했으며 그 비극을 잊기 위해 과음해야만 했다. 회식이 끝나 돌아오는 길이면 긴 시간 동안 짜고 마른 음식을 집어먹은 뒤 찬물을 한모금 마시듯 여자를 만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요셉의 머릿속에 불현듯 ‘급정지 스튜디오’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술집 이름 엄청 이상하죠, 선생님. 취했을 때 이채는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콧등을 찡그리며 말하는 게 버릇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은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이, 취하면 얼마간 흐트러질 줄 아는 자신감있는 여자를 좋아해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급정지가 뭐예요, 그쵸? 교통이 호루라기 불면서 스톱! 이러는 거 같잖아요. 선생님, 그게 아니구요. 이채를 제치고 나서는 정연도 동생 못지않게 취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조건 이 집 앞에서는 급정지를 하고 들어와 마셔야 한다, 그런 뜻이에요. 재미있지 않아요? 그런 뜻이었다구? 이채가 이죽거렸다. 난 또, 교통한테 잡혀서 끌려오는 무슨 수용소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이 까페 수상한 거 많잖아. 미친년, 뭐가 수상한데? 이채가 턱을 내밀며 곧바로 대꾸했다. 주인이 또라이잖아. 그리고 종업원 언니들도 다 또라이. 뭐? 차라리 급커브가 낫겠다. 그럼 야구팬이라도 올 거 아냐. 안 그래요, 선생님? 이채와 정연 자매는 술을 마시는 내내 서로 으르렁거렸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거기에 반박할 점을 찾아냄으로써 비로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상대에게 반대하는 것을 차별화 전략으로 삼았다고나 할까. 아니면 상대라는 거울을 통해야만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타자란 내 욕망의 수수께끼에 자신을 직면시키는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니까.

뻔하고 유치한 대화가 지겨울 때면 으레 그러듯이 요셉은 혼자 자기만의 잡념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요셉이 술자리에서 자주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정연의 줄무늬 티셔츠를 보면서 S시의 종마 목장을 떠올리기도 하고 이채가 또라이라고 하는 주인에 대해서도 상상해보는 식이었다. 요셉은 술집이 마음에 들긴 했다. 도경 말고도 함께 술 마실 상대가 생겼다는 점에서도 그 자매의 출현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채와 정연은 처음 찻집에 등장했던 도입부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여자란 주변에 많이 둘수록 선택의 폭이 넓어지므로 자유를 만끽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요셉의 머릿속에 주인공이 될 만한 여자는 언제나 하나였다. 어딘지 석연찮은 과거의 여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정연은 정형화된 이미지의 한계 때문에 조연에 그칠 뿐이었다. 소설로 씌어진다 해도, 남자는 못 믿겠고 일은 하기 싫고 돈은 필요하고 뭐든 직접 부딪치는 건 싫고 특별히 목표도 없고 그러면서도 누구 못지않게 행복하고 잘나가고 싶은 나이브한 캐릭터가 될 것이다. 거기 비하면 이채는 상상의 여지가 많고 스토리를 채워나가고픈 호기심을 유발했다.

이채를 생각하자 요셉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오전중으로 심사일을 마무리한다면 함께 점심을 먹는 것도 괜찮은 생각 같았다. 이기적이고 차갑다는 말을 밥 먹듯이 들어온 요셉이 그 방면에 무지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행동이 한동네 사람들끼리의 인정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이채와 함께 점심을 먹게 된다면 자전거 동호회에게 자리를 뺏겼던 그 생선구이집에 가서 갈치조림과 고등어구이를 시켜 나눠먹겠다는 결심을 하며 요셉은 천천히 랩톱 가방을 챙겼다. 잠깐 미역국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생일 메뉴로는 너무 상상력이 없는 것 같았다.

 

 

3. <급정지 스튜디오>

 

이안은 세시간째 씨나리오를 붙들고 있었다. C가 등장하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C가 작가와 함께하는 영화제 행사에 참가해서 K선생을 만나는 장면까지는 괜찮았다. 수희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때 K선생이 무심한 척 제자의 안부를 묻는 것도 그런대로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밤새 이어진 술자리가 끝나고 다음날 C가 혼자 바닷가를 걸으며 독백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장황했다. 프린트된 씨나리오를 뒤적거리던 이안은 C의 독백과 K선생이 술자리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장면을 교차해서 편집해보았다.

 

C(독백): 행사 마지막날이라서인지 쫑파티에 빠진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K선생은 배낭여행을 마치고 막 돌아왔다는 여대생과 싸인받을 책을 갖고 온 플로리스트를 상대로 얘기를 나누었다. 소설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하거나 영화 이야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모인 사람 대부분이 여자였다. 대학생이 많았고 교사와 간호사, 그리고 정연과 나 같은 백수도 있었다. 자신을 작가 지망생이라고만 소개한 여자는 K선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술이 취하자 K선생의 말은 점점 장황해졌다. 강사를 그만두고 틀어박혀 장편소설을 썼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울분이 쌓인 것 같았다.

K선생: 소설에 서사가 실종됐다고 비판하는 평론가들 말야. 그렇게 고정관념에 빠져서 소설을 어떻게 읽겠어? 그건 신간기사 쓸 때 보도자료 보고 줄거리 요약만 하는 기자랑 똑같은 관점이야. 소설에서 줄거리만 보는 거지. 뻔해. 그, 줄거리 먼저 쓰게 돼 있는 독후감 노트 있지? 그거 잘 활용해서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 가서, 그래서 신문사랑 대학원 시험에 붙은 거라구. 분명 둘이 친구 사이일걸. 신문이나 보는 머리에서 뭐가 나오겠냐. 아, 이건 김수영이 한 말이야. 신문이란 건 볼 필요가 없어. 오늘 신문이 1년 전 신문하고 하나도 안 다르거든. 참 그렇지, 어제 신문하고는 조금 다르지.

C(독백): 소설가 지망생이 뭔가 질문을 했다. K선생은 잘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취해서 조금 횡설수설하는 것 같았다.

K선생: 미리 말하지만 난 재미있게는 못 써. 아는 게 많으면 그런 게 아무 소용 없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아는 척을 못하는 법이야. 조금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걸 재미있어하면서 남들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마구 써제끼면 재미있다는 평을 듣지. 내 소설에 극적 긴장이 없다고 한 평론가도 나한테 그런 재미를 요구하던데 다들 친구 사이일 거야. 여기 다 영화팬이니까 감독 얘기가 좋겠군. 히치콕 감독의 써스펜스 원리 들어봤지? 휴가객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는 호화로운 유람선에 폭탄이 장치돼 있을 때, 그걸 관객한테 숨겨야 더 긴장이 있을까, 아니면 미리 알게 해야 할까. 어떤 게 더 극적일 것 같아? 멍청한 놈들은 죽어라 숨기겠지. 모르고 있다가 폭탄이 터지는 순간 무지 놀라는 거지. 근데 그건 한번 놀라고 말 뿐이야. 미리 알고 있으면 그 폭탄이 터질 때까지 긴장이 지속되거든. 내 소설이 바로 그래. 그런데 은유와 반어법을 제대로 알아먹는 놈들이 하나가 없어. 슬프다고 제 입으로 일일이 말을 하고 흐느껴 울고 엄살을 부리고 옷을 찢고 울부짖어야 아, 쟤 슬프구나 하고 알아주는 그런 독법밖에 없거든. 밥을 입안에 떠먹여줘야 이거 먹는 거예요?라고 큰 깨달음을 얻는 상태, 인지적 박약상태지. 근데 그런 놈들이 젤 잘나가. 대중이 듣고 싶은 적당히 안전한 비판을 해주니까. 대중도 문제야. 비판을 해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이데올로기를 거스르는 건 싫어하거든. 그럼 자기가 무식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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