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D. H. 로런스의 민주주의론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로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에쎄이 「민주주의」
영국의 작가 D. H. 로런스(1885~1930)는 체계적 이론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예술작품 자체가 지니는 사상성을 떠나서, ‘창작’ 아닌 산문들을 보아도 값진 이론적 통찰로 가득하다. 민주주의에 관한 발언도 상당부분 오늘의 문제들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한편으로 로런스 사상의 현재성을 검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로런스에 기대어 오늘의 민주주의 논의에 기여하고자 한다.
민주주의에 관한 로런스의 관심은 평생 지속되었지만 ‘민주주의’를 제목으로 한편의 에쎄이를 쓴 것은 1919년의 「민주주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1) 이 산문은 1919년에 네꼭지로 나뉘어 씌어졌고 그중 1~3장이 당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개 국어로 간행되던 조그만 잡지 『말』(The Word)에 연재 발표되었다.2) 그러나 일반독자에게는 유고집 『피닉스』3)에 수록될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로런스 자신은 소설 『캥거루』(1923)의 작중인물을 통해 이 글의 존재를 상기한 바 있다.4)
근년의 로런스학계에서는 이 글이 주로 ‘타자성’(Otherness), ‘차이’(difference) 등 현대 비평담론의 주요 쟁점을 다룬 점에 주목해왔다.5) 그러나 이들 연구는 로런스 정치사상 자체를 중시하지는 않는 경향이며,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서양의 전통적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사유가 요구된다는 인식도 부족한 것 같다.
「민주주의」는 네장 모두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을 거론하면서 시작하는데, 제1장은 휘트먼의 민주주의 양대 원칙의 하나인 ‘평균적인 것의 법칙’(the Law of Average)6) 곧 ‘평등’ 개념을 비판하는 데 집중된다.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평등, 우애’를 차치하고도,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나 이후의 자유민주주의가 모두 ‘평등’을 앞세우지 않되 실은 평등의 이념에 근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인간을 혈통과 신분에 따라 불평등하게 배치하는 사회에 대한 반발이었고, 이러한 자유주의의 ‘자유’를 대중에게 평등하게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자들과의 갈등과 절충을 거쳐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성립했다. 그런데 이렇게 확산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조차 사회적 약자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인식에서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좀더 명시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는 노선이 대두한 것이다. 오늘에 이르면 현존하는 온갖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평등은 정치적 수사와 철학 양쪽에서 모두 하나의 공통된 이상으로 기능한다. ‘한층 불평등한 사회’를 부르짖는 정치인은 없으며, 정치이론에서도 온갖 다른 입장의 철학자들이 어떤 형식의 평등주의든 평등주의를 주장하고 있다.”7)
바로 이것이야말로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문제점이라는 것이 로런스의 진단이다.
사회라든가 민주주의라든가 다른 어떤 정치적 국가나 공동체도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결코 개인을 위해 존재해서도 안되며 단지 ‘평균적인 것’(the Average)을 확립하기 위해 존재한다. (…)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죽은 이상들이다. 저들은〔민주주의, 사회주의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도—인용자〕 모두 하나같이 국민의 가장 낮은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인공적 장치일 뿐이다.(66면)
그리고 물질생활을 위한 이러한 장치를 이상화하고 ‘평균적인 것’의 다른 이름인 ‘동일성’(One Identity)을 진정한 정체성(identity)으로 오해하는 데서 현대세계의 온갖 혼란과 불행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로런스가 휘트먼의 핵심적 진리라고 재해석한 ‘새로운 민주주의’는 평등과 불평등을 넘어선 곳에서 성립한다.
어떤 사물이 그것 자체로 유일한 경우에는 비교가 성립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평등하지도 불평등하지도 않다. 내가 어느 다른 사람 앞에 있고 내가 순수한 나 자신일 때 나는 나와 평등한 인간이나 나보다 저급한 인간이나 우월한 인간을 의식하는가? 아니다. 스스로 그 자신인 사람과 함께 서 있고 내가 진정으로 나 자신일 때, 나는 어떤 ‘현존’(Presence)을, ‘다름’(Otherness)의 기이한 실재를 의식할 뿐이다. (…)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첫번째 위대한 목적을 깨닫는다. 곧, 평등이냐 불평등이냐는 문제가 개입함이 없이 각자가 자연발생적으로 그 자신이 되는 것—남자마다 그 자신이 되고 여자마다 그녀 자신이 되는 것—그리고 아무도 다른 남자의, 또는 다른 여자의 존재를 규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80면)
이것이 현존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옹호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아무도 다른 남자의, 또는 다른 여자의 존재를 규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는 원칙은 불평등한 외부조건에 의한 ‘규정’도 당연히 배격한다. 실제로 ‘평균적인 것’이 물질생활에서 갖는 그 나름의 의미를 로런스는 인정하고 출발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평등’과 ‘인간의 권리들’에 대해 최종적으로 정리하려 한다. 사회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함께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 어떤 물질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평균적인 것이 끼어든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사회주의와 근대 민주주의가 끼어든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인간의 평등’, 곧 ‘평균적인 것’에 근거한다. 그리고 평균적인 것이 인류의 진짜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를 대표하는 한에서 이는 충분히 건전하다.(66면, 강조는 원저자)
따라서 ‘정신의 평등’ 운운하면서 물질적 불평등을 외면하는 논리를 그는 단호히 배격한다. 소설 『연애하는 여인들』(1920) 제8장에서 버킨이 허마이어니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도 바로 그 문제 때문이다.
“혹시라도” 하고 마침내 허마이어니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정신에서는 모두 하나라는 것, 정신에서는 평등하다는 것, 모두 형제라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나머지는 문제가 안될 거예요 (…)”
(…) 버킨은 분노에 찬 연설조로 그녀를 몰아세우며 말했다.
“그건 정반대요, 허마이어니, 완전히 거꾸로인 거요. 우리는 정신에서는 모두 다르고 불균등해요. 단지 사회적인 차이들이 우연적인 물질적 여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 말하자면 우리는 추상적으로 또는 수학적으로 평등한 거요. 사람마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고 눈 두개, 코 하나, 다리 두개가 있소. 숫자상으로 우리는 모두 똑같아요.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순수한 차이가 있을 뿐 평등도 불평등도 문제가 안돼요.”8)
사실은 에쎄이 「민주주의」에서 로런스가 자유주의, 공화주의, 보수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볼세비즘, 공산주의 들을 싸잡아서 “모두가 똑같다”(81면)고 단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맑스(K. Marx)와 상통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예컨대 정부라는 것이 사실상 “대기업가들의 임원회의”(67면)라는 인식은 근대 대의제 국가의 집행기구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는 『공산당선언』의 구절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