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사랑의 역사는 치욕으로 오고
도종환 허수경 최승자의 시와 ‘아픈 몸’의 윤리
김영희 金伶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 진은영 시의 ‘감성’과 ‘정치’」 등이 있음. yhorizon@naver.com
아픈 몸
‘시작(詩作)은 몸으로 하는 것’(「詩여, 침을 뱉어라」)이라는 선언은 ‘시인은 무엇으로 시를 쓰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에 대한 김수영(金洙暎)의 대답이었다. 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우리의 머리와 심장으로 현상한 기왕의 사변과 정념을 모조리 파산시키는 것. 그리하여 혼돈 속에서, 폐허 위에서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김수영에게 몸이란 항상 새롭게 사유하고 새롭게 감각하는 몸이었다. ‘그림자에조차 의지하지 않는’ 몸은 기성의 것들을 파산시킨 자리에서 발생하는 혼란과 자유를 신뢰했다. 김수영의 타전은 시의 내용과 형식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절실한 메시지로 수신되었으나 이 명제에서 시인의 몸은 ‘아픈’이라는 말을 괄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아픈 몸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먼 곳에서부터/먼 곳으로/다시 몸이 아프다”(김수영 「먼 곳에서부터」)라고 고백할 때, 아픈 몸은 시인이 사물과 언어적으로 접촉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에 내면화하여 사물의 사물성을 새롭게 현상하는 데 복무하는 근원적인 시인의 몸이다. 이때 고통은 논리적 사변이 아닌 몸의 사유를 통해 사물의 본래성을 개방하려는 시인에게 수반되는 필연적인 감각이다. 그러니까 아픔은 몸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고통이란 ‘몸이 사유하는 양태’(김상환)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언어를 통해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개시하려는, 혹은 자신을 시적 대상으로 정직하게 임상(臨床)하려는 시인에게 고통은 필연적이다. 그러니 아픈 몸이란 시인의 존재론적이고 시적인 신체를 표상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 더하여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라고 스스로를 추인한다. 이때에 아픈 몸은 다름아닌 시대의 상처가 기입되는 장소이다. 시인은 자신의 몸에 “해묵은/1961개의/곰팡내를 풍겨 넣라”(「아픈 몸이」)고 주문한다. 실패한 혁명이 풍기는 역사의 곰팡내를 자처하는 시인의 몸은 시대의 폐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인은 패배한 역사를 몸으로 실감한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몸이 아프다. 여기서 시인의 몸을 상상계적 신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의 아픔을 몸의 아픔으로 경험하는 철저하고 절실한 감각에서 시인의 정치가 발원하는 것임을 김수영은 자신의 아픈 몸으로 실증하고 있다. 그러니 아픈 몸이란 시인의 역사적이고 윤리적인 신체를 표상한다고 하겠다.
우리는 김수영의 아픈 몸에서 사물의 본래성을 개시하고 역사의 곰팡내를 기입하는 장소로서의 시적이고 역사적인 신체를 대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픈 몸이라는 사유와 감각 속에 시인의 존재론이 있고 윤리학이 있는 것은 아닐까. 김수영의 아픈 몸은 사물과 언어, 역사와 현실에 대해 ‘동시에’ 감각하고 사유하는 몸의 형상을 보여준다. 존재론적이고 역사적인 신체란 개별적 정체성을 지닌 몸들의 결합이 아니라, 존재론의 편에서 하나의 시 작품은 자신의 전부가 되고 윤리학의 편에서도 하나의 시 작품은 자신의 전부가 되는 그리하여 이들은 두 몸의 결합이 아니라 이 둘의 긴장 위에서 발생하는 ‘한몸’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김수영의 아픈 몸은 여전한가. 지금 이곳의 현대시에서 김수영의 아픈 몸은 어떠한 모습으로 유전되고 있는가. 우리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앓고 있는 도종환(都鍾煥), 허수경(許秀卿), 최승자(崔勝子)의 시를 통해 아픈 몸들의 가계도를 살펴본다.1)
알몸과 사색의 노래
도종환이 고(故) 박영근(朴永根) 시인에게 바치는 시 「못난 꽃」에 보면 “문학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목숨과 맞바꾸는 못난 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서정과 현실의 아픔이 만나는 이 문장은 한편 부조리하게 읽힌다. 대단치도 않은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시인의 부조리한 존재론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이 끝내 회의하는 것은 시인의 비참이 아니라 “노동으로도 살 수 없고 시로도 살 수 없는” 세계의 비참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교환가치는 노동과 문학의 시간을 ‘착취’의 형식으로만 가치평가 해왔으며, 시는 자본의 먹이사슬에서도 가장 하위에 위치해왔다. 시인의 노동과 시의 가치가 좀처럼 자본화되지 않는 이 시대에, ‘문학’과 ‘목숨’이 동의어가 되는 기이한 역설은 우리의 자본주의적 가치체계에서 얼마간의 파열음을 낸다. 시인의 부조리한 문장은 이처럼 사회의 지배적인 감각체계와 그것이 내장한 불평등의 책략들에 대하여 심리적인 균열을 일으킨다. 부조리한 문장을 통해 시는 지배규칙에 대한 예외로 작동하고 나아가 문학은 지배질서와 불화하는 방식으로 현실의 모순에 틈을 만든다.
그 긴 복도를 다 지나가야 했다 복도 끝에 수도가 있었고 세숫대야에 퍼서 끼얹어주는 수돗물을 한번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우성치는 죄수들과 발가벗고 복도를 달려갔다 이삼분 정도나 될까 서너차례 물세례를 받으면 행운이었다 미리 칠하고 간 비눗물이 다리 사이로 채 미끄러지기도 전에 다음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그것도 목욕이라고 수건으로 짐승 같은 시간의 방울방울을 털어내며 돌아서다 준이를 만났다
나보다 더 털이 숭숭한 준이는 내가 담임한 아이였다 (…)
그 긴 복도를 다 지나와야 했다 다른 감방 사람들이 물기 맛본 살을 이리저리 비틀며 지나가는 몸들을 쳐다보았다 해바라기가 노랗게 피어 있는 여름이었다 감옥 밖으로 나와서도 나는 자주 알몸으로 긴 복도를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소리인가 창 안에서 주고받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복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