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언론자유와 우상타파를 위한 불퇴전의 삶

故 리영희 선생 1주기를 추모하며

 

 

최영묵 崔榮默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저서로 『시민미디어론』 『한국방송정책론』 등이 있음.

cm3188@hanmail.net

 

 

리영희(李泳禧) 선생이 망월동으로 가신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대학 4학년 때인 1984년 가을 선생이 한양대로 복직하셨다. 운 좋게도 졸업학기에 선생의 ‘신문평론’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형형한 눈빛으로 분노를 삭이며 명쾌하게 강의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고지 7매 내외의 보고서를 제출하면 빨간 볼펜으로 빽빽하게 수정해 의견을 보태서 돌려주시곤 했다. 이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군복무시기를 제외하고 1995년 봄 선생이 정년 퇴임하실 때까지 연구실 조교를 했다.

 

 

언론학 교수, 리영희 ‘기자’

 

선생이 처음 한양대 신문학과에 부임한 것은 19721학기였다. 197110월 위수령(衛戍令) 철회 등을 주장한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합동통신사에서 해직된 직후다. 선생이 언론학 교수가 된 것은 본인의 의지와 큰 상관이 없었다. 권력의 탄압으로 실업자가 된 상황에서 호구지책으로 대학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인 출신이어서 신문방송학과 소속이 됐지만 신문방송학과에는 내가 정열을 토해서 강의할 과목이 적절히 없었어요. 국제보도라든가 한두 강좌가 있을 뿐이에요. (…)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나머지 시간을 전부 밖으로, 즉 격동하는 그 시대의 현실사회가 요구하는 데 쓸 수 있었을 거예요.”1)

선생이 8년여의 해직기간을 거쳐 복직한 1984년 당시 대학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안정기에 접어든 전두환정권은 대학에 상주하던 경찰을 철수시키고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하면서 해직교수도 복직시켰다. “광주민주항쟁을 겪고 난 뒤 전국 대학의 이념적 지형이 거의 한 세기를 뛰어넘은 것과 같은 상태였던 만큼 한양대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특히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그때까지 단 한시간의 정식 강의도 들어보지 못한 사회주의 언론・철학・정책, 맑스주의 이론, 마오 쩌둥 대중언론이론 등 이른바 좌파 매스컴 강좌의 특설을 요구하고 나섰지. (…) 나는 학생들의 대대적 각성의 표현인 이와 같은 지적・사상적 변화에 호응해서 강의시간에 보수적 매스컴 이론과 진보적 이론을 아울러 제시하려 노력했어요.”2)

선생이 한양대 교수가 된 후 초기에 주로 강의한 것은 신문원론이나 국제 커뮤니케이션 과목이었고 복직 이후에는 언론비평이나 언론과 국가, 사회주의 휴머니즘 영역으로 확대된다. 1984년 복직 이후 대학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한 책들로는 조지 헤링의 The Pentagon Papers, 월터 브래시 등이 엮은 The Press and the State, 유네스코에서 국제정보 유통문제를 정리한 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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