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재앙의 서사, 종말의 상상

근래 한국소설의 한 계열에 관한 검토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묻혀버린 질문: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 「인권의 보편성과 정치성」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불길하고 불안한 세계

 

강도는 높지만 또 그만큼 모호해서 어느 먼 디스토피아의 묘사에나 어울릴 듯 보였던 재앙, 파국, 종말 같은 단어들이 상당한 현실감을 갖게 된 지도 오래다. 세계가 끝날 수 있겠다거나 최소한 심각한 지경에 처했다고 진단할 근거를 누구라도 막힘없이 나열할 것이다. 환경과 핵, 쓰레기와 전염병을 비롯해 재앙 앞에 붙을 수 있는 수식어가 늘어났고 금융, 전쟁, 식량, 자원 등 위기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얼마 전 개최된, 세계 ‘지도자급’ 모임이라는 세계경제포럼의 개막쎄션 주제가 ‘20세기 자본주의는 21세기 사회에서 실패한 것인가’였다고 하니, 이제 단순한 경제위기를 넘어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표현도 거의 누구나 쓰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보면 자못 아쉬운 척 선언된 후꾸야마식 역사의 종말은 꽤나 가소로운 것이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사태의 비상함에 대한 실감이 이토록 깊어진 데는 세계적 규모의 비관적인 관측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는 넘어왔다고 생각한 것들,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마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버젓이 삶의 한가운데 있음을 새록새록 발견할 때도 재앙과 파국의 감각은 예민해진다. 이제는 삶의 질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그저 살아 있다는 데 감사하라는 듯 위태로운 고비들이 해고와 빈곤과 질병과 고립의 모습을 하고 일상의 길목마다 도사리고 있다. 지난 몇년간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을 극도로 시달리게 만든 민주주의의 야만적 후퇴 또한 위기의식을 가중시키는 데 한몫했다. 실상 ‘후퇴’라는 단어로도 모자란 상식의 진공상태와 그것이 야기하는 ‘무슨 짓이건 가능하다’는 분위기는 무언가 방어선이 무너진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 세계가 이토록 불길함을 자아내고 따라서 도무지 안심하고 편승할 수 없기에 깊어지는 것이 불안과 혼란의 정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면과 그늘을 포함하여 세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노력, 바닥과 심연까지 놓치지 않고 문명의 진면목을 성찰하려는 의지도 함께 깊어졌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런 변화는 유독 이면과 심연에 주목하는 시선으로 나타나고, 문학에서도 이같은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재의 체제를 이끌어가는 사람들마저 순순히 위기를 인정하는 오늘의 상황이 어딘지 수상쩍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지배적 서사의 일부로 보일 정도로 널리 유포되는 재앙이나 위기 담론의 ‘수행적 효과’는 무엇일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감수성을 훈련시키며 어떤 정서적 태도, 나아가 정치적 태도로 기울게 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2. 재앙의 내재성

 

크리샨 쿠마르(K. Kumar)는 과거 천년왕국의 상상력에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서로를 부양”했음을 지적하면서 여기에 재앙과 종말의 관념이 개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천년왕국 혹은 좋은 사회가 출현하려면 반드시 엄청난 재앙이 선행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1) 그에 반해 오늘날 재앙과 종말에 관련된 상상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으로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 없이 마지막에 관해 강박적으로 고민하는 묵시의 한 형태”이다.2) 하지만 달리 본다면 이런 종류의 묵시는 더 나은 시작에 대한 욕망이나 기대와 무관하게 세상의 위기와 재앙을 직시하려는 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여기서 대개 재앙을 일으키고 종말을 재촉하는 것은 세계 바깥의 더 큰 권위가 내리는 심판이나 자연적 기제가 빚어낸 우연이 아니라 바로 세계 자체에 깊숙이 내재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재앙과 파국의 ‘내재성’에 관한 직관과 통찰은 오늘날의 한국소설에서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 주제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아무래도 편혜영(片惠英)이다.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을 위시한 그의 작품들은 쓰레기를 양산한다기보다 쓰레기 자체인 세계를 보여줬고, 역병에 잠식당했다기보다 역병을 구현한 문명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도록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재와 빨강』(창비 2010) 또한 사실적 배경과 정황이 좀더 갖추어졌다는 차이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전염병과 쓰레기와 하수구라는 이면과 지하를 강렬하게 투시한다. 주인공의 동선을 따라가다보면, 여전히 유지는 되고 있는 방역의 세계와 하수구의 세계 사이의 경계, 그리고 일상과 범죄적 일탈 사이의 경계가 실질적으로 무의미함을 깨닫게 된다.

돌이켜보건대 『아오이가든』의 세계가 처음부터 이 정도의 실감으로 육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작가 특유의 기질이나 취향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지극히 예외적인 단면의 과장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불과 몇년 만에 이 작품의 세계에 현실성을 ‘소급 적용’하게 된 데는, 쓰레기와 하수구와 질병과 유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시대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발견들의 축적이 일차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계기는, 이런 삶을 불운이나 일탈로 치부하지 못할 정도로 이 세계에 대해 알 만큼 알게 되었다는 것, 또 그로부터 나온 논리적 귀결로서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음을 깨닫게 된 점이 아닐까 싶다. 이런 요소들은 서로를 강화하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필경 세계 전체가 그렇게 되리라는 미래의 개연성으로 투사되기에 이르며, 그 개연성은 다시 현재에 내재한 속성으로서 소급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혜영의 작품들이 축조한 재앙의 세계를 상징이라고만 보는 것은 일면적인 파악이다. 그것은 가장 참혹한 버전의 ‘현재’인 동시에 현재를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을 포착한 사실적인 지향의 산물이다. 그의 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시공간의 모호함과 논리 연쇄의 단절은 재앙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그런 내재성을 반영하면서 구성하는 무정형의 불안한 심리에 긴밀히 조응하기 때문이다.

재앙이 일상과 구분되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는 개별 주체의 자리에서는 내재된 재앙이 어떤 트라우마로 실감될 수밖에 없다. 뾰족한 원인과 처방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해석을 통한 의미부여가 지극히 어려운 재앙에 직면하여 주체는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