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희경 殷熙耕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등이 있음. silverpaperbox@gmail.com
장편연재 4
태연한 인생
제4부 노래의 세계:
사랑하는 자는 없고 사랑만 있다
1. 요셉의 테마—불행의 열정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뭔지 모르게 방 안 풍경이 어제와 다르다고 느꼈다. 창가의 책상, 그 위에 흐트러진 책과 필기구와 공책 들, 그리고 치우지 않은 위스키병과 유리잔과 구겨진 영수증 따위로 책상 못지않게 어지러운 작은 탁자.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았다. 좁은 오피스텔 특유의 건조하고 텁텁한 실내 공기 속에 싸구려 가구의 도료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요셉의 시선은 탁자 앞의 일인용 인조가죽 소파를 스쳐 책과 자료 들이 아무렇게나 쌓인 삼단 책장 쪽으로 갔다. 책장에 기대어진 낡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어제 점심때 이채를 만나러 가기 전 팽개쳐놓은 그대로 랩톱과 보험설계사들의 수필 응모작이 들어 있을 것이다. 맞은편 벽 쪽의 소음이 심한 소형 냉장고와 점화 콕에 불붙을 날이 거의 없는 가스레인지도 언제나처럼 심상했다. 방 안의 물건들 모두가 덮어쓰고 있는 먼지와 무기력함, 임시거처 같은 냉기를 포함해서 평소와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셉이 가진 전부이면서 넌더리 나도록 지겨운 것들뿐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서야 요셉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깨달았다. 구석의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검은 양복이었다. 어제 하루 동안 상복이면서 데이트와 생일을 위한 옷이면서 십년 전 여인을 만나러 가는 정장이 될 뻔한 검은 양복. 그것은 요셉의 한계절 옷이 모조리 걸려 있는 스탠드 행거의 맨 위쪽 고리를 힘겹게 붙든 채 한사코 새 옷의 때깔을 내뿜고 있었다. 그 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진함과 활기였다. 마치 첫 출근한 신입사원이 망해가는 분위기의 사무실에 들어와 어리둥절하고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새 양복의 그런 처지는 요셉으로 하여금 약간의 피곤함과 책임감을 불러일으켰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형 인간의 희망찬 모습을 과장되게 연출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새 양복에게 보란 듯이 두팔을 번쩍 들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들고 소파에 앉은 다음에는 주말을 맞은 건전한 생활인답게 한주일 동안 일어났던 일을 반성해보기로 했다. 몇가지 수치와 동선만으로 대략 정리가 되었다.
이번주에 요셉은 마음에 들지 않는 여덟개의 까페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끼니마다 밥을 먹는 습관을 이용하여 맛없는 음식을 팔아치우는 다섯개의 식당과, 마음에 들지도 안 들지도 않는 그저 그런 여섯개의 술집에 갔다. 만나야 할 이유를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이안을 만나 도경의 돈을 들여서 배불리 술을 먹여주었고, 경직되고 지루한 기사만을 줄창 써온 때문에 정수리가 휑해진 문학담당 기자의 인터뷰에 우연히 끼어들어 최근 주목받는 소설가 B가 겉멋 들고 약아빠진 작가라는 평소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다. 몇년 만에 백화점에 가서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는 점원의 고객사랑에 시달렸으며, 또 J의 상갓집에서 그다지 달가울 것 없는 문단 사람들과 합석하여 죽은 자를 루저로 만들어놓고 동정함으로써 마음의 빚을 청산함과 동시에 남의 불운으로부터 자신들의 평안한 일상을 안전하게 분리해내는 비정하고 위선에 찬 작별방식에 대한 분노로 고통받았지만 결국 그것을 참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십년 넘게 지치지도 않고 결혼이란 상대에게 관심을 갖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아주 따뜻한 동반이며 그런 따뜻함을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는 건 부도덕한 일이라고 설파해온 아내의 친절하고도 철저한 무관심 속에 생일을 보냈다. 그리고 아무 감흥 없는 생리적 섹스가 한번이었고 마스터베이션은 없었다. 성인인증을 요구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몇번 접속하긴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사랑하는 상대와의 섹스’ 따위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인간들도 어쩌면 지금 같은 일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흥미를 잃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다지 한 일이 없는 한주일이었다. 휴대전화의 캘린더에 입력해둔 일정도 거의 실행되지 못했다. 젊은작가상 시상식과 문예지 필자모임에 가지 않았고 지역 도서관의 자문회의에도 불참했다. 통장에 새로 입금된 돈은 없었다. 새로 구상한 소설 또한 제자리를 맴돌았다. 무력감에 빠진 작가가 랩톱을 들고 무작정 떠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아직까지 짐도 못 꾸리고 책상에 앉아 절망만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첫 장면이 길어지는 것을 봐서는 장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으리라는 걸 요셉은 모르지 않았다.
한주일 동안 요셉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지 못하거나, 그 두가지 일만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불유쾌한 무위와 불발과 반복의 공회전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좌표가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니다. 내일이면 류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이채가 있었다. 이채와 류의 등장이 자신을 어딘가의 언덕으로 데려가 새로운 풍경을 보게 해주리라는 기대 속에 요셉은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불현듯 까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13층에서 내려다보이는 것은 수많은 건물들의 창문과 옥상과 굴뚝, 그리고 온갖 업종의 조잡하고 어지러운 간판들이었다. 처음 집을 보러 왔던 날 부동산 남자가 우려한 대로 그것들은 겹겹이 포개져서 시야를 가로막았다. 바닥을 볼 수 있는 것은 공영주차장뿐이었다. 주말밤이면 커다란 주차장에는 차들이 빈틈없이 빽빽이 들어찼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단 한대의 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의 텅 빈 주차장 바닥을 내려다볼 때마다 요셉은 인간이 그리 쉽게 죽지 않는 존재라는 데에 새삼 경악하곤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음주운전을 하는 걸 고려한다면 주말밤에 더 많은 사람이 차에 치여 죽어야만 이치에 맞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차를 움직이는 일이란 난폭한 흉기를 치켜들고 전속력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비슷했다. 운전대를 조금만 옆으로 돌리거나 브레이크 페달에서 잠깐 발을 떼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세상은 지나치게 안전했다.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금치산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좁은 길 위에서 서로 미친 듯이 얽히고 엇갈리며 날뛰고 있는 극단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운전자가 목적지에 닿아 태연히 차문을 열고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나 안전한 세상에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는 것은 순전히 ‘혼을 담은 시공’ 때문이라는 게 요셉의 생각이었다. 그런 걸 내세우는 사람들 대부분은 처음부터 혼을 사용할 생각도 없었거니와 설령 사용하려고 해도 아예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이나 돈이나 염치도 마찬가지였다. 갖지 못한 자들일수록 의미를 만드는 데에 집착했다.
오전이라 아직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촘촘히 그어진 하얀 주차선 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핑크색 운동복 차림의 그 뚱뚱한 여자는 구석에 자리를 잡더니 줄넘기를 하기 시작했다. 줄이 바닥을 때리는 매순간 여자의 몸이 힘겹게 허공으로 들어올려지는 것을 바라보던 요셉은 건너편 건물의 옥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감색 유니폼 점퍼를 입은 남자가 거대한 환풍기 옆에 서서 한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금연건물로 둘러싸인 동네에서 흔히 보아온 풍경이었다. 남자는 담배를 빨고 연기를 내뿜고 재를 떠는 동작을 되풀이하는 사이사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멘트 벽 위로 쏟아진 햇살이 튕겨나와 쫓겨난 자의 광대뼈에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생수병을 기울여 천천히 물을 마시며 요셉은 공영주차장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검은 바닥에 규칙적으로 그어진 흰 주차선들이 선명했다. 종 우월론자이면서도 인간을 결코 좋아하지 못하는 요셉에게 있어 그것은 누군가 말했듯 모든 행복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불행이나 무능력을 유일한 열정으로 삼아야 하는 하루분의 빈칸처럼 보였다. 아등바등 잎과 꽃을 피우면서 뻔뻔스럽게 생명력을 구가하는 봄날의 공원이나 그 욕망의 주기에 편승하려는 상춘객들이 눈에 띄지 않도록 서향 집을 택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브런치 메뉴를 주문한 뒤 요셉은 이주일이나 끌었던 심사원고를 꺼냈다. 랩톱의 전원도 연결했다. 샌드위치가 나오기 전까지만 포털 싸이트의 뉴스를 검색해볼 생각이었다. 인기검색어 목록에는 영국인 뮤지션의 죽음이 올라와 있었다. 다음 순간 그날이 만우절이란 사실이 요셉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기사의 출처도 애매했다. 유명인의 사망소식은 만우절 거짓말 중 가장 의심쩍은데도 흥행률이 높았다. 살아 있기만 하다면 누구라도 죽을 수 있고, 누구에게라도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누구의 죽음이든 믿지 못할 소식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흥행의 요소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 죽음이라는 데 있었다. 어느해에는 독재국가의 절대 권력자였고 또 어느해인가는 아름다운 젊은 여배우나 전설적인 록그룹의 리더 혹은 세계 제일의 부자나 기업가였다. 그들의 죽음이 뜻밖인 것은 애도의 수위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모두 권력과 명예와 아름다움과 돈, 그리고 그것들이 합해진 힘의 상시적 측면에 무심히 굴복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인류 대부분은 철저히 보수적이라고 요셉은 결론지었다. 뒤집어엎을 생각이 없거나 아예 못하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간격을 맞추려 애쓰며 움츠리고 사는 게 인생이었다. 미리 패턴을 간파하여 만우절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지 않는 자신 같은 통찰력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검색어에 오른 팝스타는 아내가 좋아하는 가수였다. 아내처럼 상상력 없고 고지식한 사람은 지금쯤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요셉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가방 속에 든 우편물이 떠올랐던 것이다. 다른 날도 아닌 만우절에 이혼소장을 보내오다니 당장 전화를 걸어 아내를 야단쳐야만 할 것 같았다. 아내는 지금까지 요셉의 타고난 처복과 통찰력에 의존해서 제법 안정적이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요셉이 원하는 한 나머지 인생도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게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어떻게든 이혼만은 하지 않는 게 옳은 태도였다.
요셉은 가방을 열고 봉투 안에서 내용물만을 꺼냈다. 아르바이트 점원이 가져온 커피와 에그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것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이혼에 대한 너절한 안내서를 넘기자 요셉이 빈칸을 채워넣어야 한다는 답변서가 나왔다. 요셉은 같은 연배의 작가들이 연애편지를 쓰는 것도 아니고 가정생활의 단란함을 위해 문장력을 사용하는 걸 비웃어왔다. 반장선거에 출마한 자식의 연설문을 쓰던 알뜰한 작가들은 으레 대학입시 전형에 제출할 자기소개서를 거쳐 입사원서까지 대신 써주었다. 그런 사소한 개인적 대필에 비한다면 공문서라는 점에서 한수 위이긴 하지만 요셉은 이혼서류 따위에 단 한글자도 적어넣고 싶지 않았다. 배우자의 의무에 대한 아내의 이의제기에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머릿속에는 논지가 명확한 정당한 답변이 정밀하고 설득력 강한 문장이 되어 흘러가는데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신념체계가 다른 집단에서 통용되는 서류에 잉크를 묻히는 건 전향서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피고’이자 ‘유책 배우자’로 몰아가는 변호사의 문장 군데군데에서 잠깐씩 요셉의 눈길이 멈추었던 것은 단지 틀린 맞춤법 때문이었다. 자신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아내가 기어이 신뢰가 가지 않는 변호사를 선택하고 말았음을 확인한 요셉은 실속없이 가산을 탕진하고 있는 아내에게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요셉의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영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까페에서 회화 개인지도를 하는 건 익숙한 광경이었다. 재킷 안에 외국 대학의 티셔츠를 받쳐입고 귀걸이를 한 덩치 큰 청년이 선생이고, 한 손으로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긴 채 다른 손으로 요란한 깃털 장식이 매달린 펜을 부지런히 움직여 공책에 뭔가를 적는 여자가 학생이었다. 요셉이 서류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보험설계사의 수필원고를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돼 그들은 정해진 수업을 마친 모양이었다. 한국말이 들려오자 요셉은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유학을 마치고 병역의무 때문에 돌아왔다는 청년은 한국사회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타인에게 너무 무례하다는 거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몇살이냐, 결혼했냐, 그런 거 실례 아녜요? 친척들 만나는 거 지겨워요. 별걸 다 꼬치꼬치 물어보고 간섭하고 충고를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것도 이상해요. 식당 가서 주문할 때 이모, 언니라고 부르고 상점에 가면 아버님, 어머님 하잖아요. 전국민이 친척이야. 근데 웃기는 건 또 남은 확실히 갈라놓아요. 좁은 엘리베이터 같은 데 함께 있어도 눈도 안 마주쳐요.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문을 쾅 닫아버리고.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퍼블릭 개념이 진짜 없어요. 특히 노인들, 줄 서는 걸 못 봤어. 전철역, 은행, 곧장 창구로 달려가서 무조건 반말이에요. 빨리빨리 하라고 야단까지 치던데요. 그분들 얼굴 보면 조금이라도 뭐가 자기 뜻대로 안될까봐 불안한 것 같아요. 이런 나라에서 단체생활은 정말 지옥일 것 같아.
요셉은 청년이 유학기간 동안 그 나라 방식의 민주주의를 경험했고 또 얹혀사는 이방인으로서 그 나라의 시민교육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으리라고 짐작했다. 군입대를 앞둔 불안한 처지라서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측면에 한층 더 예민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여제자의 표정으로 미루어 어쩌면 깃털 달린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글씨를 받아적는 제자와의 관계를 군입대 때문에 더이상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게 청년이 가진 불만의 결정적인 원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식당에서 할머니들도 그래요. 여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청년에게 말했다. 알바하는 친구가 있는데 할아버지보다 할머니 손님들이 더 싫대요. 세명이 와서 이인분 시켜놓고는 주문하자마자 자기 자리만 빨리 안 갖다준다고 화를 낸대요. 물이 차다, 숟가락을 바꿔달라, 불렀는데 바로 안 왔다. 큰 소리로 야단치고. 맞아요. 청년이 맞장구를 쳤다. 남의 말을 일분 이상 듣는 노인을 못 봤어요.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화부터 내는데 마지막에는 꼭, 내가 너 같은 자식이 있다, 이러는 거예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가 안 가요. 왜요? 저 우리 아버지 싫어하는데요? 이럴걸 그랬나.
모든 종류의 알려주는 말을 싫어하는 요셉은 잔소리를 거부할 청년의 권리를 지지했다. 청년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가 이해가 안 간다는 점에 대해 좀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요셉이 생각하기로 한국의 노인들은 양손에 근대화와 봉건주의라는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쥐고 편의에 따라 그 두가지 중 하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밀었다.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리고 편법과 눈가림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속도경쟁을 하고 남과 비교하고 과시적이고 허세를 부리고 빈둥거리는 걸 못 참고 또 행여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봐 늘 표정이 불만스럽고 경계심에 차 있는 것은 모두 급하게 진행된 산업화와 경제개발에서 얻은 생활의 지혜였다. 그런 한편 그 모든 욕망의 서사를 ‘너 같은 자식’을 둔 가장으로서의 헌신으로 포장하는 게 그들의 알리바이였다. 너 같은 자식이 있다는 말로 타인을 유사 가족의 범주 안에 집어넣는 것은 서열을 매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셉의 눈에는 노인들이 줄을 안 서는 것은 새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경제개발시대의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를 받으려는 권리행사로 보였다. 공중도덕을 어기고 남의 권리를 무시함으로써 위풍당당하게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는 사회정의는 그런 방식으로 질서를 잡아왔기 때문에 무리도 아니었다. 요셉은 그런 것이 노인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근대사의 천박함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노인들은 한번도 개인이 되어본 적이 없었으며 지금도 단체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 큰 비극은 뒤늦게 개인의 고유성에 눈떠도 그것을 실현할 방법을 모른다는 거였다. 노인들한테 자기가 젊었을 때 지금 자기 나이의 노인들처럼 뒷방 늙은이로 살라고 하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제 노인들은 몸에 달라붙는 운동복에 산악자전거를 끌거나 쌘들에 반바지 차림으로 커피를 마시러 까페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고작 쩌렁쩌렁 큰 소리로 전화를 받고 순서를 무시하고 아르바이트 점원에게 모욕을 주고 다른 손님들에게 공경을 요구할 뿐이었다. 요셉은 요즘처럼 사회가 젊은이한테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한편 모든 면에서 젊음을 의식하며 돌아가는 때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다 노인들의 질투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젊은시절 살아남기 위해 자기 스스로 굴복했던 권위에 대한 권위적인 방식의 복수인 셈이었다.
청년이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운 동안 여제자는 거울을 꺼내 입술에 립밤을 발랐다. 잠시 후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청년이 투덜댔다. 남자화장실에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불쑥 들어오는 거 진짜 적응 안돼. 사람들이 화장실 더럽게 쓴다고 막 욕을 하더라구요. 나 들으라는 듯이. 왜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욕을 먹어야 하죠? 화장실 쓰는 사람들을 무지 미워하는 것 같아요. 화장실을 아예 아무도 안 쓰면 편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되면 청소부도 필요 없고 아줌마는 해고일 텐데. 여제자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 한국에서는 그런 말 하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들어요.
요셉은 조금 전 우편물을 건네주던 오피스텔의 수위를 떠올리고 있었다. 도경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십분도 안돼 초강력 접착제를 사용하여 ‘입주자 외 주차 금지’라는 경고 스티커를 붙이곤 하는 수위였다. 새벽에 들어오는 요셉을 불러세워 자정 이후에 들어오고 싶으면 반드시 정문을 이용하라고 훈계를 했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마다 뒤따라와 뒷짐을 지고 지켜서 있는가 하면 복도바닥에 니스칠을 하는 날이면 안내방송을 하고 안내문을 붙이는 걸로 모자라 종일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며 각층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칠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신발바닥을 깨끗이 하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거였다. 요셉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의 분노와 탄식이었다. 입주자와 의견충돌이 생기면 그는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말라며 핏대를 올렸다가 다음 순간 자신 같은 무식한 사람이 뭘 알겠느냐며 자학적 탄식을 하곤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보다 돈도 없고 수면시간도 부족하고 친구도 말 한마디 나눌 직장동료도 밥 차려줄 가족도 노후에 용돈을 줄 자식도 없고 축구도 못하고 변비와 불면증에 시달리고 정해진 휴일도 교대근무도 없는 요셉 같은 입주자를 도덕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그는 감시와 통제처럼 잔소리의 권한이 주어진 일 이외의 업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기다리던 택배가 주소불명으로 반송돼버렸기에 확인하러 갔던 요셉은 약자를 괴롭히는 가해자가 되어 되돌아와야 했다.
요셉은 약자의 피해의식이 권력이 되는 건 역설적으로 보수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에게 의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어린아이와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의 부자처럼 되기를 꿈꾸는 가난한 자들은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지속되기를 원할 수밖에 없으므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요셉은 또한 가난하다는 이유로 남을 동정하는 것이야말로 돈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물질만능주의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힘없는 자의 편이 되어서 싸우거나 그들을 위로한다며 노골적으로 목청을 높이는 감상적이고 진지한 소설들이 지겨웠다. 요셉의 생각이 맞다면 도덕적이고 정당한 주장일수록 배타적으로 되기 쉬웠고 폭력의 성격을 띠기 일쑤였다. 그것은 노인들의 단체생활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요셉이 포착하고 싶은 것은 그 단체생활에서 혼자 떨어져나온 개인이었다. 요셉은 인간을 표본집단으로만 보는 정신분석이나 진화 생물학 같은 전체주의적이고 패턴화된 진단방식을 멸시했다. 왜곡된 부자관계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졌다, 둘째아들이라서 우유부단하다, 지나친 성적 금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되었다 등등. 또는 여성은 자기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남자에게 반한다, 아이 울음소리가 듣기 싫은 것은 빨리 아이를 돌보게 하기 위해서다 등등. 그런 결정론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계급투쟁적인 사고방식에도 피로감을 느꼈던 것이다. 빈부와 상하관계와 계급이 뒤바뀌면서 이루어내는 신분상승과 인생유전의 서사에는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누군가 간파했듯이 대중은 소위 인간적이라는 작가들에게 몰렸다.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대중처럼 어중간하게 멈추어 불가능과 적당히 타협하며, 혼돈상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조금 전 읽은 보험설계사의 수필만 해도 요셉의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요셉은 다시 심사원고를 집어들고 뒤적였다. 접수번호 165번의 글이었다.
“어느새 나는 보험 설계사로서의 길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강사 선생님들의 교육을 받을수록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국사람은 전부 다 옳은 말만 하면 의심을 한다고 한다. 한가지 정도는 틀려줘야 한다. 그러면 그걸 자기가 고쳐주면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머지 이야기도 믿는다고 한다.”
요셉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펜을 들어 그 원고 위에 A라고 썼다. 그런 다음 너무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으므로 커피를 한잔 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옆자리 남녀가 일어나면서 흘끗 요셉을 바라보았다. 그 못마땅한 눈빛에서 요셉은 다음번 그들의 회화수업이 오늘 옆자리에서 자기들의 대화를 엿듣던 아저씨에 대한 성토로 끝맺을 수도 있다는 걸 눈치챘다. 요셉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커피는 다른 까페에 가서 마실 작정이었다. 1회에 한해 리필을 해주는 까페라서 아쉽긴 했지만 심사평을 쓰기 위해서는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했다.
요셉이 알고 이안이 모르는 것
십년 동안 요셉은 류와의 재회를 수없이 상상해왔다. 그가 상상했던 어떤 방식과도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이제 그 시간은 내일로 다가왔다. 어제 이안은 류 앞에서 요셉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섭외력을 과시하고 또 토요일의 술자리에 요셉이 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이안의 말대로라면 「위기의 작가들」은 문단의 냉혹한 경쟁과 상업성, 권위주의를 고발하는 영화였다. 요셉을 모델로 한 K교수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작가의 비전을 제시한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요셉은 보통의 시시한 영화인가보다 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이안은 출세주의자인 데 지나지 않고 그것을 쉽게 들켜버리는 촌스러운 진지함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