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13년체제 논의의 진전을 위하여
2013년체제 건설에서의 북한 변수
정현곤 鄭鉉坤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 집행위원장, 세교연구소 상임기획위원. 주요 논문으로 「남북사회문화교류 발전을 위한 방안」 「남북교류거버넌스의 실태 분석 및 평가」 등이 있음. jhkpeace@empas.com
지금 남과 북의 관계는 어디쯤 와 있을까? 남남처럼 지내는 데 아주 익숙해져 있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관계이기는 한 것일까? 새삼스런 이 질문은, 이명박정부를 지나는 동안 남북관계에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직감에 기초한다.
남북관계의 역사적 전환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가지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 우리는 또 2013년체제 건설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자각하고 있다. 2013년체제라는 것이 2012년 권력교체기를 주요한 계기로 포착하고 있음은 다 아는 바지만, 2012년의 역사적 하중이 단지 남한에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북에서 역시 2012년은 하나의 중대한 결절점이다. 2012년은 북의 체제성립 100년 역사가 꺾이는 해로, 북은 이른바 ‘강성대국’을 천명하고 있다. 게다가 북은 절대적 지도자를 잃고 총력체제를 가동중이다. 우리는 또 그들의 이런 행보가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리가 2013년체제 논의에 남북관계를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에 와서 2013년체제가 최소한의 남북 공유지점을 통과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1953년 정전체제 해소 문제다.
1. 2008년 8월 이후 한반도 정세와 대북정책 결산
남북관계 또는 북미관계에서, 북이 보이는 행동의 동기와 반경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체제인정’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유효하다. 그 견해에 따르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균형적인 힘을 회복하려는 의지 속에서 상호대칭성이 관철되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상호대칭성은, 말하자면 북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미국을 위협할 것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의 공격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임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이 상호위협을 감소시키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2000년 10월의 북미공동코뮈니케로 표현되었다. 남북관계의 경우, 북에 체제인정을 보장하면서 마찬가지로 남한이 느끼고 있는 전쟁위협을 감소시킨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그것이 2000년 6・15공동선언의 의미1)라 본다.
지금에야 분명해졌지만 2009년 4월 북의 인공위성 발사와 5월의 2차 핵실험은 체제 내부의 동기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것은 체제유지를 위한 본질적 동기와 그 연장선에서 후계구도를 완비해야 하는 특수한 동기까지를 말함이다. 우리가 알기에 북은 2009년 1월에 후계자를 선정하고 이를 내부에 통보했다. 그러나 여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북이 느꼈을 체제유지의 심각성이, 외부로부터 온다고 느꼈을 위협 인식과 매우 밀접하다는 사실이다. 우선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의 뇌졸중 이후 남한정부가 북한붕괴론 쪽으로 자신을 무장해가고 있었다는 점이 그러했고,2) 이 시기 중국의 태도가 불분명했다고 북이 판단한 지점이 그것이다. 중국이 북의 지정학적 가치에 입각하여 대북관계의 전략을 새롭게 정리하던 시기가 2009년 가을이라고 본다면,3) 북으로서는 2008년 8월 이후의 시점에서 절대적 지도자의 유고상황에 따른 체제 안전보장에 관해 더욱 크게 우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09년 4월 당시 북이 인공위성 발사를 강행한 일련의 사태 전개는 미국으로서는 조금 낯선 것일 수 있다. 2009년 초입에 출범하면서 대화 원칙을 천명하던 오바마 행정부의 선의에 대해 북이 거절한 형국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면 전개야말로 미국 내에 부정적 대북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미국 내 인식이 북한붕괴론으로 이동하던 남한정부의 전략구도에 자신을 내맡긴 미국의 한계로 작용했다.
중국의 경우는 이미 지적한 대로 북이 핵실험까지 강행하고 난 후에야 전략적 협력관계로 돌아서는데, 이러한 결정에는 북의 핵실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북의 핵실험은 중국이 가진 대북 영향력의 실체를 폭로한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느꼈을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그 이듬해에 있었던 천안함사건의 전개에서 좀더 선명해졌다. 천안함 ‘폭침’의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미국 항공모함이 서해로 진입해 들어오려는 군사력 전개가 그것인데, 중국 포위라는 의미가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이같은 군사력 시위를 통해 일본 내 미군기지인 오끼나와의 후뗀마(普天間)를 유지시키고 항모전단의 군사력 전개범위를 급격히 확장했다.4)
그리고 미중과 남북, 그리고 일본까지 포함된 이같은 힘의 압축적 표출은 그해 11월 북한에 의한 연평도 포격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제 북을 통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구도가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 그리고 그런 충돌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북의 김정일 위원장은 강력한 북중연대의 길을 열고 1980년 6차 당대회 이후 중앙당 회의로는 30년 만에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를 개최, 북 체제의 최대 위기라 할 수 있는 후계구도를 정돈했던 것이다.
한편 2011년 5월 17일 한 언론은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견해임을 확인해주는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다.5) 그런데 이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스스로 보수라 규정하는 사람들,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서도 같은 견해가 발견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조사에서 대북정책 재검토 의견은 58.2%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34.9%보다 20% 이상 높게 나왔으며, 이 의견에는 54.25%의 보수층과 51.1%의 한나라당 지지층이 동의했다. 국민의 대다수가 이런 견해를 가진 가장 큰 이유는 북중협력 때문이라는 것이 당시 여론조사기관의 견해였다. 이런 힘이 작용한 탓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부장관을 현인택(玄仁澤)에서 류우익(柳佑益)으로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