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다시 장편소설을 말한다

 

기로에 선 장편소설

장편소설과 비평의 과제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평론집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1. 논의를 시작하며

 

2010년대는 장편소설을 꽃피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한국문학사를 통틀어 이만한 기회는 드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절호의 기회는 심각한 위기와 맞물려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한동안 찾아오지 않을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는 아픈 실패의 경험 때문에 기회를 살리기가 훨씬 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이 기회/위기의 시기에 비평은 별로 움직임이 없다. 사실 이 비평적 대응의 부재야말로 한국문학의 위기를 나타내는 징후가 아닐까 싶다.

『창작과비평』 2007년 여름호의 특집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 이래 장편소설은 놀라운 양적 성장을 거듭하여 이른바 ‘장편소설 붐’을 맞이했고, 이를 계기로 폭넓고 밀도있는 비평적 논의들이 연이어 나오리라 예상되었다. 하지만 장편소설의 (불)가능한 미래를 놓고 김영찬(金永贊), 김형중(金亨中)과 내가 벌인 논쟁1)을 제하면 장편소설에 대한 열띤 토론이나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의 ‘장편소설 붐’이 2010년대 한국문학의 지형을 크게 바꿔놓을 것이 분명한 만큼 이에 대한 대응은 비평의 최우선적 과제인데, 비평가들은 개별 장편에 대한 논의는 하되 중요한 장르로서 장편의 가능성과 방향성에 대해서는 좀처럼 발언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지난 오년 사이 장편소설의 범람 속에서 우리의 소설문학이 어디쯤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은 실종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랄까.

논의 부재에 대한 해명으로, 비평적 견해를 본격적으로 개진하기에는 때가 이르다는 입장도 있다. 가령, 장편소설의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예술적 성과를 논할 만큼 뛰어난 작품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일리가 없진 않다. 오랫동안 단편 위주로 단련된 소설가들이 장편에 도전해 뜻깊은 작품을 써내려면 꽤 오랜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장편소설 붐’의 규모와 다양성, 예술적 성격과 질적 수준의 윤곽이 드러나려면 앞으로 오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그 성과와 문제점을 분명하게 회고할 수 있을지언정 비평적 개입의 적기는 놓치는 셈이다.

장편소설 ‘형식’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실제적인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는지 모른다. 장편 형식의 특별한 미덕을 실감하지 못해 “한국의 ‘장편소설’이란 개념이 원고의 분량 (그리고 그것이 주는 몇가지 경제적 이점) 외에 별다른 내포를 지시하지 않은 개념이 되었”2)다는 김형중의 주장에 공감하는 비평가가 적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테면 ‘장편소설 종언론’ 혹은 ‘장편소설 무용론’이 별다른 논의도 거치지 않은 채 일종의 이데올로기처럼 평단 내부에 상당히 퍼져 있는 것이다. 또한 김영찬의 경우가 그렇듯이, 장편소설의 중요성을 믿더라도 근대문학의 종언을 확신하는 평자라면 뒤늦게 도래한 ‘장편소설 붐’에 사뭇 곤혹스러워할 수 있다. 다행히 김영찬 자신은 그 곤혹스러움을 한참 ‘앓은’ 후에, “지금은 불가피한 ‘장편의 시대’”3)라고 천명하며 젊은 작가들에게 장편의 무대에 용감하게 뛰어들기를 요청한다.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없진 않지만 장편소설에 대한 그의 전향적인 입장은 일단 고무적이다.

김영찬이 ‘장편소설 회의론’에서 ‘장편소설 불가피론/기대론’으로 선회하는 입장을 보인 데 반해 김형중은 ‘장편소설 회의론/불가능론’에서 흔들림이 없고 그렇기에 김영찬 식의 곤혹스러움도 없다. 물론 김영찬과 김형중 외에도 주목할 만한 탐구와 논의를 수행하는 비평가가 없지는 않다. 가령 서구 이론가의 저술을 활용하여 단편과 장편의 특성을 규명하고 장편소설의 본질을 ‘윤리학적 상상력’에서 찾는 신형철(申亨澈)의 비평적 시도도 검토해볼 만하다. 아울러 장편소설에 관한 견해를 밝히지는 않지만 특정한 작품의 선택과 특정한 방식의 독해를 통해 장편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 가령 서구의 반체제적 지적 유산을 자양분으로 삼아 주로 장르적이고 비주류적인 소설을 열정적으로 독해하는 복도훈(卜道勳)의 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장편소설이라는 형식도 역사적인 산물이며, 따라서 흥망성쇠의 변화에서 면제되어 있지 않다. 장편소설이 ‘서사문학의 꽃’이라든지 ‘근대문학 최고의 장르’라고 불려왔다고 해서 향후에도 그런 특별한 지위를 누릴지는 미지수다. 다만 문학의 주체인 작가와 비평가와 독자가 자기 몫을 충실히 수행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장편소설의 미래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장편소설이 기로에 선 이 시점에서 그 향방에 관한 논의를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장편 형식의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시대의 장편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고, 그 현재적 성과와 문제점을 진단하며 이를 토대로 이 장르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먼저 논하는 것이 하나같이 비평가의 몫이다.

나아가 이런 비평작업은 한국문학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되 세계문학의 차원에서,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한중일 세 나라에서 나타나는 장편 형식의 급속한 변화와 서로 다른 양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세계문학의 사례들을 참조하되 한국문학의 맥락에 집중하고자 한다. 실제적인 토론이 되려면 구체적인 작품 논의가 충분히 제시되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몇몇 작품을 촌평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2. 근대/탈근대 문학과 예술적 보수/진보

 

장편소설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기정사실화하고 현시기 문학을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탈근대문학’)으로 인식하는 발상이다. 설령 ‘근대문학’이 끝난 것은 아니라 해도 이미 예술적 효력을 잃었기에 곧 사라질 운명의 문학으로 인식하는 것도 이런 발상의 한 변종이라고 하겠다. 이 단절의 구도에서는 ‘근대문학 최고의 장르’라는 장편소설의 위상이 애매해진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대략 두가지 비평적 경향이 나타난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김영찬처럼 “‘근대문학’ 이후를 살아가는 한국소설이 근대적 의미의 장편(novel)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장편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제”4)를 새롭게 설정하는 길이다. 기존의 형식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장편을 시도해보자는 취지는 훌륭하다. 아쉬운 점은 한국소설이 “‘근대문학’ 이후”를 살아간다고 규정함으로써 ‘근대문학’이 내장하고 있는 풍부한 자산—그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근대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과 통찰—을 이 새로운 예술적 기획에 활용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단절로 인한 빈약한 예술적 자산을 가지고서는 ‘새로운 시대의 장편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제’의 실현이 어렵지 않을까. 역으로 말하면 ‘근대문학’의 자산을 활용하여 창조적으로 재구성된 ‘새로운 시대의 장편’이 나오더라도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할 공산이 크리라고 짐작된다. 그가 박민규(朴玟奎)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와 김애란(金愛爛)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2011)장편의 성과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또 하나의 경향은 장편이라는 장르, 나아가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유효성을 의심하고 그 경계를 해체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런 경향이 2000년대 이후 소설 창작에서 일부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평이 앞장서서 이런 경향을 추동하는 측면이 두드러진다. 가령 한 젊은 평론가는 이런 서술을 한다.

 

소설은 시나 희곡, 또는 개별 민족의 다양한 문학 장르를 자체에 복속시키며 성장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결과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을 구분할 방법은 거의 없어졌다. 가령, 1930년대 이상의 소설과 에세이는 구분이 어렵다. 학자의 방식에 따라 어떤 에세이는 소설로 구분되고 있다. 사정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김태용과 한유주의 소설을 에세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기호가 성경의 조판 방식과 언어 습관을 차용해 쓴 소설은 어떤가. 박형서가 연구 논문의 형식으로 쓴 소설은 어떤가. 아무리 영민한 문학평론가라 할지라도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5)

 

이 구절을 읽고 어리둥절한 것은 초두의 ‘소설’은 장편(novel)임에 틀림없고 ‘1930년대 이상의 소설’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소설’은 단편(short story)일 수밖에 없는데, 첫 문장의 서술은 단편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영어로 번역하기는 불가능한데, ‘소설’을 ‘novel’ 또는 ‘short story’로 구분하여 옮기는 순간 논지 자체가 붕괴 돼버린다) 문맥에서 요구되는 장・단편의 구분을 삭제한 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실수인지 아리송하다. 어쨌거나 평자가 무리와 과장을 무릅쓰고 전달하려는 것은 장편 형식은 물론 소설 장르 자체의 경계가 해체되고 있다는 메시지일 것이다.6)

문학의 장르와 형식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를 고착화하려는 움직임은 예술적 보수 혹은 수구일 공산이 크다. 그러나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가정하에 근대문학의 모든 장르와 형식을 해체하는 것이 무조건 예술적 진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탈근대문학)’이라는 발상의 일차적인 문제는 그 속에 깔려 있는 단절론과 단계론이 역사적 상황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근대’(modern)와 ‘탈근대’(postmodern)라는 용어를 떼어내어 시대 구분과 성격 규정의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근대’의 핵심적인 성격을 자본주의체제와 연관 짓는 입장에서는 이 체제가 지속되는 한 근대가 끝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이때의 ‘탈근대’는 근대 이후의 역사적 시간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탈근대’는 근대의 틀—근대의 지배적 이념・가치・제도—에서 벗어나려는 충동이나 경향을 뜻하거나(성격 규정) 그런 충동이나 경향이 두드러지는 근대 말기의 시간대를 뜻한다(시대 구분). ‘탈근대’라는 ‘시대’는 근대에 대한 자기반성이 심화되면서 근대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빈번해지는 시기라고도 하겠다.

문학 논의에서는 탈근대적 성향이 정확히 언제부터 두드러졌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탈근대적인 충동과 계기들이 어떤 방식으로 전유(專有)되느냐에 주목을 요한다. 근대 자본주의체제는 교활하여 탈근대적인 요소들조차 체제 내로 포섭하여 문화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체제의 입장에서는 이 요소들이야말로 꼭 포섭해야 할 대상일지 모른다. 그것들이 새로운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을뿐더러 그 잠재적 변혁성을 무력화하는 것이 체제의 자기보전에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탈근대적인 성향을 ‘역사화’(historicize)하지 않고 무조건 진보적/혁신적인 것으로 인지하는 것은 자본주의체제의 포섭에 걸려들기 안성맞춤이다.7) ‘동일성’ 대신 ‘차이’를 강조하고 ‘타자의 윤리학’을 표방하는 서구 현대의 이론도 이런 포섭대상에서 면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8)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탈근대의 충동과 계기를 자본주의 상품화과정과 체제 내의 회로에 포섭되게 하지 않고 근대극복의 소중한 예술적 자원으로 만드느냐를 고민해야 마땅하다.

한가지 유력한 방법은 근대의 장편소설을 근거지로 삼되 ‘탈근대적 상상력’을 근대의 경계를 뚫고 새 길을 개척하는 일종의 전위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탈근대적 상상력’이라는 전위는 근거지에서 근대성찰 세력으로부터 힘을 충전하되 그 내부의 근대주의 수구세력과도 싸워야 한다. 근대 장편소설이 내장한 근대성찰의 풍부한 지적 자산과 탈근대적 상상력의 결합, 이것이 김영찬이 제기한 ‘새로운 시대의 장편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핵심적인 전략이 아닐까. 사실은 빼어난 장편소설이 내장한 근대성찰의 지적 자산 속에는 이미 과거 여러 시대의 탈근대적 상상력이 응축되어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대의 장편은 새 시대 고유의 탈근대적 상상력을 핵심의 일부로 필요로 한다. 장편소설은 무엇보다 당대성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다루더라도 현재와의 연관이 중요하며 그 예술적 촉수는 어느새 미래를 향해 뻗어 있기 마련이다.

‘근대문학’과 ‘그 이후의 문학’(탈근대문학)을 단계론적으로 나누어 각각을 예술적 보수(수구)와 진보로 대응시키는 발상은 현단계 문학예술의 복잡한 지형을 통념적으로 단순화한 결과다. 이는 서구중심주의와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의 유지와 확장에 유리한 지적・문화적 구도를 재생산해낸다. 한국문학에서 이런 발상이 퍼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물론 카라따니 코오진(炳谷行人)의 근대문학 종언론이다. 그런데 종언론을 추종하는 한국의 비평가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카라따니가 문학판을 떠나게 된 이유이다. 그는 ‘근대문학’을 밀어낸 ‘근대문학 종언 이후의 문학’이 예술적 진보는커녕 오락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하고 문학에 대한 희망을 접은 것이다.

 

 

3. 단편, 중편, 장편의 본질적 특성

 

앞의 도식적 발상에 잡혀 있지 않더라도 장편소설의 본질을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장편소설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은 채 어떻게 그 미래를 논할 수 있겠는가. 세계문학에서 (장편)소설론은 루카치(G. Lukács), 바흐찐(M. Bakhtin), 모레띠(F. Moretti) 같은 비평가들에 의해 발전되어왔지만, 이들의 논의를 끌어들여 작금의 한국 장편소설에 대한 진지한 입론을 시도한 예는 드물다. 한때 맑스주의 문학론의 정수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루카치의 소설론과 그 중추인 총체성, 전형성, 당파성 개념은 현실반영론과 함께 낡은 미학의 기표처럼 취급될 뿐이다. 이질성과 다성성을 강조하고 총체적 장르를 지향하는 장편소설 개념을 제시한 바흐찐, 서구 교양소설의 종언과 ‘근대의 서사시’(modern epic)라는 새 발상을 제시한 모레띠의 소설론도 면밀하게 연구되기보다 자의적으로 발췌・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소설론 빈곤상태에서 최신 서구 이론가의 저술을 활용하여 단편과 장편의 본질을 규명하고 작품 논의까지 시도한 신형철의 평문9)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들뢰즈・가따리의 저서를 거론하면서 단편의 특성을 논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꽁뜨와 단편을 비교하면서 단편의 본질을 규정한다. 꽁뜨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구축된다는 것이다. 꽁뜨가 ‘발견’의 형식이라면 단편소설은 ‘비밀’의 형식이다.”(376면) 얼핏 그럴듯하기도 의아하기도 하다. 확인해보니 국역본은 nouvelle(novella)을 ‘단편소설’로, conte(tale)를 ‘꽁뜨’로 각각 옮겼는데, 오역이 아닐 수 없다.10)

묘한 것은 들뢰즈・가따리가 ‘중편소설’의 본질로 제시한 특성을 ‘단편소설’의 본질로 이해해도 어느정도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가령 “중편은 근본적으로 비밀(발견될 비밀의 재료나 대상이 아니라 끝내 간파되지 않는 채로 남는 비밀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단편은 발견(무엇이 발견될 수 있는가와 무관하게 발견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11)에서 ‘중편’의 자리에 상당수의 단편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권여선(權汝宣)의 「은반지」(『한국문학』 2011년 여름호)는 발견의 형식이라기보다 비밀의 형식이다. 멜빌(H. Melville)의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1853) 같은 작품은 어떤가? 발견과 비밀이 중첩되는 형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단편 중에 뛰어난 작품일수록 비밀의 형식을 포함할 확률이 높으니, 단편과 중편이 형식상 중첩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편소설과 단편소설이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들뢰즈・가따리는 중편이 “삶의 선()들을 발생시키고 조합하는 고유의 방식”(194면)에 초점을 맞춘다. 가령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에세이 분석에서 그들은 붕괴하는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세개의 선을 구분해낸다. 그것은 그의 삶을 무너뜨리는 세 종류의 결정적 타격이 나아가는 선이다. 하나는 외부에서 오는 타격의 선(절단선), 다른 하나는 내부로부터 오는 타격의 선(파열선), 그리고 기왕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단절과 탈주의 선(단절선)이 그것이다. 이 부분을 소개한 후에 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단편소설은 절단선과 파열선과 단절선 모두를 효과적으로 조합할 때 성립된다고 말하면 될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 지나친 요구일 것이다. 피츠제럴드에게서 세개의 선을 발견해낸 이들의 관점에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이런 최소한의 정의를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고 삶에서 하나의 파열선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삶을 가로지르는 아주 미세한 파열선 하나’를 포착하기만 해도 단편소설은 성립될 수 있다. (378면, 강조는 원저자)

 

들뢰즈・가따리는 세개의 선을 이야기하지만, 신형철은 하나의 선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중편을, 그는 단편을 염두에 두고 논하기 때문이다. 중편 형식은 세 선의 조합으로 구성되지만, 단편 형식으로는 세 선 모두를 수용하기 힘들다. 이것이 두 형식의 차이일 것이다. 신형철이 세 선 중에서 “우리 삶을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갉아먹는 파열선”(378면)을 단편의 본질적인 선으로 고른 것은 타당한 선택이다.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고 삶에서 하나의 파열선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라는, 그가 재구성한 정의도 들뢰즈・가따리의 원안보다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은 정의라 해도 이 장르의 본질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공식이 될 수는 없다.12) 중편 형식에 대한 들뢰즈・가따리의 논의도 마찬가지다. 풍부한 탈근대적 상상력과 복잡・정교한 논리를 지니고 있어서 중편이 늘어나는 우리의 입장에서 경청할 만하지만13) 이것도 중편을 읽는 하나의 흥미로운 방법일 뿐이다.

장편소설에 대한 논의에서 신형철은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을 도모하는 서사전략”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상기시키고 그 연장선상에서 “장편소설은 최소한의 경우 스토리텔링이지만 최대한의 경우 의제 설정이자 사회적 행동일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편다(379면). 장편소설을 사회적인 의제나 행동과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는 평단의 경향에 비추어 상당히 진취적인 태도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장편 형식을 사회의 다른 담론 형식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장편소설은 의제 설정과 사회적 행동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는데, 신형철은 이것을 ‘문학적 판단’ 기능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설명한다.

 그 기능은 어떤 지배적인 판단체계로도 파악할 수 없는 진실이 있음을 고지하면서 사건을 특정 판단체계의 권력으로부터 회수하여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사유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옳고 그름에 대한 통념적 규정을 뒤흔든다는 점에 주목해 그 문학적 판단체계를 ‘윤리학적 상상력’이라 명명할 수 있다. (380면)

 

이 대목은 분명 장편소설이 어떤 최종심급의 진실 혹은 진리와 연관이 있는 장르라는 뜻이다. 장편소설은 일찍부터 특정한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계층・체제의 옳고/그름과 선/악의 기준에 매이지 않는 ‘진리’의 문제와 씨름해왔으니, 이는 그리 새로운 인식이 아니다. 다만 장편 형식과 진리의 연관성을 망각한 듯한 요즘의 평단에서는 상기할 가치가 충분하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윤리학적 상상력’이라는 명명이다. ‘윤리학적 상상력’이라는 용어를 대하면 일반적으로 ‘타자의 윤리학’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여기서의 뜻은 정확히 그 반대다. 이때의 윤리학은 바디우의 ‘진리의 윤리학’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사실 바디우의 『윤리학』에 개진된 ‘진리의 윤리학’이 신형철의 장편소설론—특히 그 핵심인 ‘윤리학적 상상력’론—을 새롭게 가다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이 책 4장 ‘진리들의 윤리학’의 주요 대목을 인용하면서 ‘사건으로서의 진리’의 과정을 꽤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바디우에게 ‘주체’란 ‘진리과정의 담지자’이며, ‘진리의 윤리학’이란 ‘진리의 과정을 지속시키는 원리’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사실 바디우 철학의 ‘사건’ ‘주체’ ‘진리 과정’ 등의 개념이 장편소설 형식에 풍부한 함의를 갖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신형철은 또한 ‘윤리학적 상상력을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 필요하다면서 슐링크(B. Schlink)의 『더 리더』(The Reader)를 검토하고 이 소설의 3단 구성—어떤 사건의 발생(1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짐(2부), 진실에 대한 주체의 응답(3)—에 주목한다. 그런 후에 “『더 리더』가 따르고 있는 ‘사건-진실-응답’의 3단 구성을 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씌어지는 장편소설의 기본 문법”(381면)으로 상정하고, “3단계 구조를 ‘진리의 윤리학’(바디우)의 풍부한 함의를 포괄할 수 있도록 다듬어”서 만들어내는 시각을 ‘서사윤리학’이라고 지칭해보자고 제안한다(382면).

이로써 신형철의 장편소설론은 ‘윤리학적 상상력’(장편소설의 의제 설정과 해결을 가능케 하는 문학적 판단 기능), ‘사건-진실-응답’의 3단 구성(장편소설의 기본 문법), ‘서사윤리학’(윤리학적 상상력을 분석・평가할 수 있는 관점), 세개의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빈틈없이 짜이게 된다. 멋진 이름의 개념들로 구축된 그의 장편소설론은 꽤 근사해 보인다. 사실 현재의 평단에서 장편소설 논의를 위해 이런 비평적 건축술을 보여준 사례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멋진 ‘이름붙이기’(命名)의 욕구와 모든 것을 특정한 틀(정의나 도식)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다소 과도한 것은 아닐까. 그의 명명법과 그에 따른 이해의 도식이 지닌 유용성과 상대적인 미덕을 실감하면서도 무리하고 부당한 면이 눈에 밟힌다.

먼저 ‘윤리학적 상상력’(그리고 ‘서사윤리학’)이라는 명칭의 적절성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디우는 『윤리학』의 2, 3장에 걸쳐 ‘타자의 윤리학’이니 ‘차이의 윤리학’이니 하는 최근 서구이론의 온갖 ‘윤리학’ 타령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오로지 ‘진리들(혹은 진리 과정들)의 윤리학’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윤리학임을 누차 강조한다. 이런 『윤리학』 전체의 논지에 비춰볼 때, 바디우의 ‘진리의 윤리학’의 핵심을 끌어와 장편소설론에 활용하면서 그것을 (‘진리’와의 연관이 드러나기는커녕 바디우가 그토록 비판한 ‘윤리학’ 타령을 연상케 하는) ‘윤리학적 상상력’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장편소설의 ‘기본 문법’으로 제시된 ‘사건-진실-응답’의 3단 구성은 『더 리더』를 포함한 상당수 장편에 유용한 도식이 될지 몰라도 독창적인 걸작 장편에는 공연한 족쇄가 되기 쉽다. 3단 구성은 바디우의 ‘사건으로서의 진리’ 과정과 닮아 있다. 그런데 장편소설에서 진리가 드러나는/구현되는 방식이 바디우의 ‘사건으로서의 진리’ 과정 혹은 ‘사건-진실-응답’의 3단 구성과 동일하거나 유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장편소설에서 어떻게 진리가 구현되는지를 도식화할 수 없다. 뛰어난 장편소설은 제각각 진리를 구현하는 고유한 방식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과 예술작품에서 이뤄지는 진리 구현은 동일한 차원이 아니다.14)

장편소설의 실제비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말보다 소설서사의 ‘예술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작가의 의도와 실제 구현된 작품의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작가의 주문이 아닌 작품의 언어를 읽는 독법이 필요한 것이다.15) 신형철이 ‘서사윤리학’의 관점에서 황석영(黃晳映)의 『손님』(창비 2001)과 김연수(金衍洙)의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 2008)를 읽는 부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한편으로는 작가의 의도에 휘둘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진실-응답’의 3단 구성에 집착함으로써 정작 작품에 대한 비평감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두 장편은 모두 주목할 만하지만 『손님』의 경우 작가의 의도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구현된 데 반해 『밤은 노래한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밤은 노래한다는 복잡한 구성과 추리적 기법, 공식 역사와 어긋나는 사실을 들춰내고 꼼꼼히 기록하려는 미덕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사랑과 역사적 진실의 문제에서 어딘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신형철이 지적하듯 역사라는 큰 이야기를 “한 개인의 사랑과 그 상실이라는 작은 이야기로 해체”(384면)하려는 의도는 분명한데, 소설 속 남녀가 진짜 사랑한다기보다 작가가 나서서 둘은 진짜 사랑하고 있다는 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런 말을 자주 할수록 사랑은 상투적이고 감상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화자 김해연이 이정희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도 여옥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도 그렇다. 이는 역사라는 큰 이야기의 해체를 염두에 두고 사랑이라는 작은 이야기를 작위적으로 구성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김연수의 신작 『원더보이』(문학동네 2012)는 그런 큰 이야기 해체의 강박에서 벗어난 듯 서사의 흐름이 한결 가볍고 유연한데, 이는 초능력의 아이를 화자로 설정한 덕이 크다. 역사나 사랑에 대해 진지하고 성숙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어졌거니와 환상적인 요소의 운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복잡한 지적 미로를 즐기는 현학적 취향은 여전하고 초능력의 도입으로 포스트모던 소설의 특징은 더 두드러지지만, 그 특유의 탈근대적 발상과 기발한 언어유희가 상당한 효과—특히 타인들의 심중의 말이 화자의 독심술에 감지되어 불쑥불쑥 흐린 활자의 형태로 출현할 때의 효과—를 발휘한다.

 

 

4. 삶과 죽음의 충동, 2010년대 소설문학의 흐름

 

우리시대에 장편소설 형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특정한 장편소설론이 얼마나 유효한지를 묻기 위해서는 주목할 만한 장편들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시대의 ‘주목할 만한 장편들’로 무엇을 꼽는가의 문제부터가 사실은 논의의 시작이다. 2000년대 이래 소설문학은 상당히 다양해져서 각양각색의 장편이 출간되고 있으니, 그중 몇몇을 선택하는 데는 평자의 비평적 판단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개별 작품의 평가뿐 아니라 이른바 ‘본격/장르’의 구분에 대한 입장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장편소설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평자라면 또다른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선별할 것이다. 김형중은 최근 발표한 두편의 평문16)에서 이러한 작업을 시도하는데, 장편소설에 집중된 논의는 아니되 장편 형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간단히 짚기로 한다.

김형중은 최근에 번역・출간된 브룩스(P. Brooks)의 『플롯 찾아 읽기』(Reading for the Plot, 1984)를 참조하여 근년의 한국소설의 흐름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재검토하면서, 삶의 충동보다 죽음・파괴의 충동이 지배하는 서사가 ‘우세종(優勢種)’이 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욕망과 희망의 서사보다 죽음과 파국의 서사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윤성희의 「부메랑」, 한유주의 「도둑맞을 편지」,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 박형서의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 김태용의 「포주 이야기」, 강영숙의 『아령하는 밤』, 김사과의 「정오의 산책」, 김유진의 『숨은 밤』 등을 거론한다. 또한 작품 논의는 하지 않지만 조하형(『조립식 보리수 나무』 『키메라의 아침』), 박민규(『핑퐁』 「깊」 「슬」), 백가흠(『귀뚜라미가 온다』), 김애란(「물속 골리앗」), 편혜영(『아오이가든』 『재와 빨강』 『저녁의 구애』), 서준환(『고독 역시 착각일 것이다』)도 언급한다.

김형중의 이번 주장은 서구 19세기 리얼리즘 소설 이후 “세계가 더이상 유기적이고 인과적인 인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사회의 총체적 조망은 더이상 불가능할 만큼 모호하고 파편적”으로 변해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 가망 없는 작업”17)이 되었다는 자신의 ‘장편소설 불가능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번에 그가 브룩스의 저서에서 착안한 것은 19세기 소설 내부에 들어온 증기기관이다.

 

피터 브룩스의 말마따나 19세기의 소설들이 근대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증기기관이 지배하는 세계를 잘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소설 내부로 증기기관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위대한 소설들 내부에는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면서 서사를 추동하고 플롯을 만들고 의미있는 결말이 있기 전까지 독자들의 리비도 집중을 유인하는 어떤 모터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프 역할을 했던 증기기관이기도 했고, 주로는 주인공들의 욕망이었고, 신분상승에의 의지였고,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 같은 것들이었다. 더 크게는 근대 전체를 떠받치고 있던,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면 별 근거가 없어 보이는 ‘끝없는 진보’라는 신화였다.18)

 

연이어 그는 “전시대 한국문학 내에도 증기기관은 장착되어 있었다”고 단언하며 80~90년대 한국문학을 추동한 근대적 에너지는 구체적 발현양태는 달라도 그 구조에 있어 서구 19세기 소설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주장한다. 이쯤에 이르면 김형중의 최종적인 주장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즉 200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에서 삶의 충동 엔진을 장착한 소설보다 죽음과 파괴의 충동 엔진을 장착한 소설들—앞서 열거한 작품들—이 점점 우세종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형중의 이런 주장은 일리가 없진 않으나 일면의 진실을 전부인 것처럼 밀어붙이는 또 하나의 예이다.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절반의 진실’은 솔깃하지만 완전한 엉터리 논리보다 사태를 왜곡하는 데 오히려 더 효과적이다. 우선 서구 19세기 소설에 대한 브룩스의 정신분석학적 내러티브 연구가 지닌 미덕과 한계에 대한 비평적 감각이 없거니와, 브룩스의 논지를 단순화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문제도 있다. 간단한 반론을 펴자면—『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1861) 같은 영국의 장편소설들도 그렇지만—19세기 중반 ‘미국문학의 르네쌍스’를 꽃피운 호손(N. Hawthorne), 멜빌, 포우(E. A. Poe)의 소설들은 이런 일면적인 ‘증기기관 장착론’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가령 추리/공포/환상소설의 개척자인 포우는 김형중이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의 우세종으로 거론한 죽음과 파괴의 충동을 장착한 소설들의 효시이다. 호손과 멜빌은 또 어떤가. 미국의 독립 이후 희망에 들뜬 시대 분위기 속에서 미국사와 근대문명의 어둠을 끝까지 직시하여 “근대 전체를 떠받치고 있던 (…) ‘끝없는 진보’라는 신화”의 가장 깊은 뿌리까지 성찰한 작가들 아닌가. 호손의 『주홍글자』(The Scarlet Letter, 1850), 멜빌의 『모비 딕』과 「필경사 바틀비」 같은 소설은 바로 근대의 개인과 사회 내부에 ‘장착된’ 증기기관에 대한 섬세하고 심오한 예술적 탐사이다. 이에 비하면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은 자기 내부의 증기기관을 해체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세상 속의 증기기관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직시하지 않는/못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김형중이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우세종으로 꼽는 소설들의 꽤 긴 명단에 대해서는, 우선 죽음과 파국의 서사가 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우세종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주관적인 판단임을 지적하고 싶다. 시쳇말로 ‘쪽수만’ 따져서 우세종으로 떠오르는 것은 상품성을 최대화하려고 애쓰는 대중적 소설들이 아니겠는가. 이런 소설들은 팔리기만 한다면 감상적 사실주의는 물론이고 추리와 스릴러, 판타지뿐 아니라 재난과 파국의 서사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죽음충동을 내장한 작품들의 ‘쪽수’가 아니라 예술적 ‘수준’을 따지자면 종말론적 서사의 정치성을 포함한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19) 우선 이런 계열의 소설들끼리도 어느 작품이 더 나은가를 가늠할 필요가 있거니와, 다른 계열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도 평할 필요가 있다. 죽음과 파괴의 충동으로 씌어지는 소설들 가운데서도 포우의 작품처럼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경우는 드물다. 장편소설 논의와 관련해서 눈여겨볼 것은 죽음과 해체의 감각이 압도적인 포우가 (단편 양식에서의 업적은 선구적이었으나) 빼어난 장편을 쓰지 못한 반면, 삶과 죽음의 리듬감을 둘 다 지닌 호손과 멜빌이 미국문학 최고의 장편을 썼다는 사실이다. 이는 뛰어난 장편은 삶과 죽음의 충동 가운데 어느 한쪽의 독주가 아니라 둘의 협주에 가깝다는 것을 암시한다.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우리의 젊은 소설가들 가운데서도 삶과 죽음의 감각, 창조와 해체의 리듬을 겸비하고 있는 작가가 상당수 있다고 본다. 김형중의 명단에 올라와 있는 윤성희, 박민규, 김애란, 그리고 그 명단에서 빠져 있지만 특이한 감수성을 지닌 황정은을 포함하여 다수의 작가가 그러하다. 설령 지금은 한쪽 충동이 강한 작가라도 다양한 서사 실험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요컨대 젊은 소설가들이 좋은 장편을 쓸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는 흡족할 만한 것은 아님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신경숙(申京淑)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와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후에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정도를 확실한 성취로 꼽을 수 있겠다. 이 작품에 대해 장편이냐 아니냐의 시비까지 있었지만 그에 대해 다른 지면에서 논한 바가 있으므로20) 여기서는 한두마디만 덧붙이기로 한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전통적인 장편소설론의 관점에서 보면 결격사유가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사회적 지평이랄 것이—전혀 없지는 않더라도—빈약하다. 흔히 장편에서 기대하는 개인의 삶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역사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비중이 턱없이 적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장편소설이 사회현실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놓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장편소설이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들의 구체적 삶이 먼저”이고 “유일무이한 단독자로서 그 개인의 삶, 그 개인이 타자와 맺는 관계, 주위의 자연이나 사물과 맺는 관계의 진실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밀고 나가면 그것이 시대현실에 대한 물음에 닿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중요하다.21)

이 작품은 한아름이라는 구체적인 개인이 맺는 두 관계에 집중한다. 하나는 부모,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고 다른 하나는 가상공간에서 만난 이서하라는 가명을 지닌 사람과의 연인관계다. 양자의 관계에서 모두 이 작품은 이전의 소설들이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경지로 나아간 면이 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혈육을 전제로 맺어지고 천륜이라는 당위성이 부여된 전통적인 부자관계에서 벗어나 부모 역시 타자로 받아들이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한아름과 이서하의 관계에서는 가상현실이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된 우리시대에 사랑의 본질이 새롭게 탐구된다. 가령 사랑이란 고정된 정체의 개인들이 상대방의 정체를 알고 나서 그에 기초하여 친밀한 관계를 이뤄나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세요?’라는 물음과 그에 대한 응답을 본질로 해서 맺어지는 어느 순간의 참된 관계 맺음이 먼저이고 개인들의 정체는 그 관계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되는 면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렇기에 이서하가 정체를 속였음을 알고도 한아름은 “너와 나눈 편지 속에서, 네가 하는 말과 내가 했던 얘기 속에서, 나는 너를 봤어”(두근두근 내 인생 308~9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최근에 붐을 이루는 SF와 같은 장르소설과 재난과 종말의 서사에서는 여러편의 수작 단편들이 나와 있고 이를 토대로 조만간 성공적인 장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리시대 여성의 삶과 그 시대적 질곡을 성찰하는 서사들 역시 빛나는 단편이 많지만 장편에서는 아직 확실하게 만족할 만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다만 김이설(金異設)의 『환영』(자음과모음 2011)과 최진영(崔眞英)의 『끝나지 않는 노래』(한겨레출판 2011)는 그 잠재력 면에서 눈여겨볼 만하여 차기작을 기다리고 싶다. 배수아(裵琇亞)의 『서울의 낮은 언덕들』(자음과모음 2011)과 한강(韓江)의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2)은 두 작가 각각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존재의 새로운 층위를 탐사하면서 언어와 존재, 장소성과 관계성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중편 형식에 더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들의 다음번 서사적 모험을 기대하게 된다.

최근에 중견작가들 중심으로 성장기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설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가령 천명관의 『나의 삼촌 브루스 리』(전2권, 예담 2011), 김영하(金英夏)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문학동네 2012), 권여선의 『레가토』(창비 2012) 등은 작가 개인사의 결절점과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계기를 연결하여 현재의 성숙한 시각에서 다시 쓰려는 시도이다. 장편만이 할 수 있는 기획이고 영화, 드라마, 만화 같은 대중문화 장르의 코드를 활용함으로써 시장바닥 장르 특유의 활력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나쁘게 볼 이유가 없다. 하지만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만족시키기는 쉽지 않은데, 예술적 성취의 관건은 역사를 즐겁게 소비하는 대중문화의 방식으로 귀착되지 않고 그 개인의 삶과 성장기 시대현실에 얼마나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현재적 삶과의 연관 속에서 얼마나 끈질기게 추궁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이 계열의 작품들은 현재 연재 중인 것도 상당수이다.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은 제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인물들의 고유성과 관계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 언어적 밀도와 활력에서 돋보이는 『레가토』가 주목할 만하다. 고통 받는 삶의 현장을 사려깊은 마음으로 헤아리는 공선옥(孔善玉)의 『꽃 같은 시절』(창비 2011)과 김려령(金呂玲)의 『가시고백』(비룡소 2012)은 흔히 사실주의 서사 혹은 청소년문학으로 분류되어 평단의 관심 밖에 놓여 있지만 주목할 만한 장편에 포함시킬 만하다. 또한 칭기스칸(테무진)의 성장기를 다룬 김형수(金炯洙)의 『조드』(전2권, 자음과모음 2012) 출간을 계기로 그간 역사적 진실에 대한 관심은 퇴색하고 자의적인 해석이 넘쳐나던 역사소설 장르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김영찬의 말대로 2010년대는 불가피하게 장편의 시대이다. 소설의 창작현장은 여러 장르와 분야에서 단편의 성취를 바탕으로 성공적인 장편을 내놓고자 분투하고 있다. 이를테면 단편의 언덕에서 장편의 더 높은 산으로 몸을 던져 오르려는 힘겨운 모험을 감행하는 형국이랄 수 있다. 비평가들이 그 창작현장을 지키며 적실한 논의를 하느냐 아니면 침묵을 지키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느냐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1) 한기욱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 현단계 소설비평의 쟁점과 과제」, 『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 김형중 「그러니까, ‘장편소설’이란 무엇인가?」, 『교수신문』 2011년 7월 5일; 한기욱 「최근 소설과 비평의 지나친 탈근대적 성향이 불편한 이유」, 『교수신문』 2011년 7월 13일; 김영찬 「공감과 연대: 21세기, 소설의 운명」, 『창작과비평』 2011년 겨울호 참조.

2) 김형중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소설 쓰기: 2011년 여름, 한국 소설의 단면도」, 『문학과사회』 2011년 가을호 223면 각주 1번.

3) 김영찬 「공감과 연대: 21세기, 소설의 운명」 310면.

4) 김영찬, 같은 글 304면.

5) 서희원 「2012년 봄호를 펴내며」, 『문예중앙』 2012년 봄호 3면.

6) 서희원이 ‘소설’ 대신 고려하는 용어는 ‘픽션’이다. 가령 “21세기 한국문학에서 ‘픽션’을 담당하고 있는 네분의 소설가를 만났다. 박형서, 김성중, 윤이형, 조현이 그들이다”(같은 글 4면) 참조.

7) 제임슨(F. Jameson)의 저서 제목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자체가 이를 웅변한다.

8) 가령 알랭 바디우는 ‘차이’와 ‘윤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최근의 이론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Alain Badiou, Ethics: An Essay on the Understanding of Evil, Verso 2002, 2장, 3장 참조.

9) 신형철 「‘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쓰고 ‘서사윤리학’으로 읽기: 장편소설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단상」, 『문학동네』 2010년 봄호. 앞으로 이 글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밝힘.

10) 국역본(『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은 8장 제목(1874년—세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서부터 ‘nouvelle/novella’를 ‘단편소설’로 번역하는 심각한 실수를 범했다. 프랑스에서 ‘nouvelle’은 장편소설(roman)보다 짧은 소설을 뜻하며 주로 중편을 지칭한다. 들뢰즈・가따리가 ‘nouvelle’의 예로 거론한 작품들도 단편이 아니라 중편이다. 그렇기에 영역자는 ‘nouvelle’의 역어로 ‘short story’가 아닌 ‘novella’를 택한 것이다. ‘conte’는 짧은 이야기로서 그 성격상 영어의 ‘short story’보다는 ‘tale’에 더 잘 어울린다. 프랑스문학의 ‘conte’는 우리말 ‘꽁뜨’와는 완전히 어감이 다르므로 ‘단편’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 8장에서 들뢰즈・가따리는 ‘리좀’(rhizome) 철학을 적용하여 제임스(H. James)의 「새장에서」(In the Cage)를 비롯한 중편소설들과 피츠제럴드(S. Fitzgerald)의 중편 분량의 자전적 에세이 「무너짐」(The CrackUp)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삶의 세가지 ‘선’(line) 개념을 제시한다.

11)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 Schizophrenia, Tr. Brian Massum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193면. 번역은 필자의 것임.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밝힘.

12) 아르헨띠나 소설가 삐글리아의 ‘단편소설에 대한 테제’가 더 나은 정의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단편소설이란 ‘보이는 이야기’와 그 속에 숨겨진 ‘비밀 이야기’의 다양한 방식의 조합이며, 그중 “비밀 이야기가 단편 형식의 열쇠”라고 주장한다. Ricardo Piglia, “Theses on the Short Story,” New Left Review, JulyAugust 2011 참조.

13) ‘경장편’이라 불리는 500매 안팎의 소설들—가령 황정은(黃貞殷)의 의 그림자처럼 경장편 연재를 통해 탄생하는 소설의 대다수—은 영미문학에서라면 중편에 해당하며 이런 작품들에 장편소설론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14) 가령 미국문학 최고 장편으로 꼽히는 『모비 딕』(MobyDick, 1851)의 경우 이질적인 장르와 양식의 혼합으로 말미암아 선형적인 3단 구성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설령 그중에 전통적인 소설서사에 가까운 에이헙의 광기 이야기만 떼어놓고 다룬다 해도 제2단계에서 사건의 ‘진실’이 말끔히 밝혀지기는커녕 더 애매해지기도 한다. 묘한 것은 이 때문에 오히려 작품 차원에서 ‘진리’의 드러남이 가능해지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15) “예술언어가 유일한 진실”이며 “예술가는 대개가 형편없는 거짓말쟁이지만 그의 예술은 그것이 예술인 한은 그날의 진실을 일러줄 것이다”라는 로런스의 발언은 장편소설을 읽을 때 특히 명심해야 한다. D. H. Lawrence,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Penguin 1983, 8면.

16) 김형중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1」, 『문예중앙』 2012년 봄호 및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2」, 『문학들』 2012년 봄호.

17) 김형중 「장편소설의 적: 최근 장편소설에 관한 단상들」, 『문학과사회』 2011년 봄호 256면.

18)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2」 279면.

19) 종말의 정치적 주체를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비평적 논의를 시도한 예로 황정아 「재앙의 서사, 종말의 상상: 근래 한국소설의 한 계열에 대한 검토」, 『창작과비평』 2012년 봄호 참조.

20) 졸고 「가족의 재구성: 가부장제와 근대주의를 넘어서」, 『오늘의 문예비평』 2012년 봄호 272~78면 참조. 신경숙, 권여선, 김이설, 김애란, 공선옥의 장・단편 소설을 특정한 주제와 연결해서 다룬 이 글은 장편에 초점을 맞춘 논의는 아니지만 필자 나름으로 눈여겨본 장편소설들을 논의에 포함시켰다. 권희철의 곡진한 평문(「감정교육: 김애란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을 위한 노트」, 『창작과비평』 2012년 봄호)도 이 작품이 그저 좋은 소설 정도가 아니라 빼어난 장편임을 실감케 해준다.

21) 졸고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 227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