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동아시아문학의 토포스와 아토포스

상하이 토론회를 참가하고

 

 

진은영 陳恩英

시인.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이 있음. dicht1@hanmail.net

 

 

오직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간, 즉 이웃만이 실제적이죠. 신은 이웃을 통해

우리에게 훼방을 놓고 우리는 이런 신의 활동에 직접 노출되어 있어요.

카프카

 

 

동아시아 지역문학이 가능할까

 

올해 225일, 중국 상하이대학에서 문학이론가 천 쓰허(陳思和), 왕 샤오밍(王曉明)과 본지 편집위원들이 만났다. 두 중국학자의 발표를 듣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창비에서는 2011년 겨울호의 동아시아문학 관련 특집을 중국어로 번역해 자료집을 만들어 사전에 참가자들에게 제공했다. ‘동아시아 지역문학이 가능할까?’라는 제목의 자료집에는 다양한 사유를 보여주는 다섯편의 글들이 실렸고, 이 글들의 논지를 수렴하여 밀도있는 토론을 진행시키기 위한 한기욱(韓基煜)의 발제문도 수록됐다. 오랜 고민과 진지한 성찰의 흔적이 가득한 글들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 글들은 막 따낸 이국 과일의 맛처럼 새롭지만 모호했다. 그런데 상하이의 푸둥(浦東)공항에 도착할 무렵, 나는 자료집의 제목을 잘못 읽었음을 알아차렸다. 제목은 ‘동아시아 지역문학이 가능할까?’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가능한가?’였다. 동아시아문학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진지한 뉘앙스를 내 무의식이 의혹과 반문의 뉘앙스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그 의심과 반문에는 어떤 매혹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에밀 씨오랑(E. Cioran)은 한때의 애국주의적인 마음을 담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프랑스의 운명과 중국의 인구를 가진 루마니아에 대해 꿈꾼다.” 약소민족으로서 고통과 울분에 찬 청년기를 보낸 지식인이라면 많은 인구와 거대한 영토, 제국의 운명을 가진 조국에 대한 바람을 한번쯤은 지녀보았을 법하다. 프랑스의 비교문학자 까자노바(P. Casanova)는 이것을 작은 민족, 작은 문학의 ‘존재론적 열등감’이라고 일축했지만 말이다.

동아시아 담론에 회의적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까자노바의 말이 맴돌고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론이나 동아시아 지역문학이라는 관념은 결국 경제대국 일본과 정치대국 중국에 편승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려는 야심에서 비롯된다, 그 야심이란 작은 나라 지식인이 지닌 존재론적 열등감의 공격적 표현이다, 그것은 초라한 동시에 위험한 욕망이다 등등. 이런 이유로 나는 중국학자들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했다. 존재론적 열등감과 무관하며 큰 지역적 규모를 지닌 나라의 지식인으로서 그들이 동아시아문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가 이 논의에 또 하나의 중요한 시각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으로서의 중국문학

 

회의는 백영서(白永瑞)의 사회와 백지운(白池雲)・서여명()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첫 발제자인 천 쓰허는 동아시아문학의 가능성을 중국의 국제적 위상 변화와 관련해 언급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생경했던 동아시아론이 이제 의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중국의 경제성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9·11사건 후 미국의 공격이 이슬람세계를 향하는 동안, 중국은 세계화의 국면에서 주도권을 지닌 동아시아 국가로서 실질적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세계로 하여금 우리를 받아들이게 하라’라는 표어로 개방정책을 실행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인들은 더이상 이런 표어를 쓰지 않는다. 이미 자신들이 세계의 부분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문학담론에도 새로운 흐름을 낳았다. 비교문학의 오랜 전통은 현대문학으로서의 영미문학이 주변부에 미친 영향관계를 연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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