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다시 장편소설을 말한다

 

분노와 경이

오늘의 장편소설과 새로운 경이

 

 

허윤진 許允

문학평론가. 평론집 『5시 57분』이 있음. hdthoreau@hanmail.net

 

 

놀라운 이야기

 

이야기 속의 가상세계를 압도하는 충격적인 일들이 현실에서 연일 벌어지는 나날이다. 9·11테러 이후에 현실이 가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은 것이 되었다. 현실은 바야흐로 우리가 가상세계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상상력을 역으로 모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이라고 믿기에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흔히 ‘거짓말 같다’ ‘소설 같다’ ‘영화 같다’ 등의 비유적 표현을 쓰곤 한다. ‘소설 같다’거나 ‘소설 쓰고 있네’ 같은 표현은 어떤 상황이 낯설다고 말하는 데 가장 적합한 관용어구다. 과연 이 관용어구는 놀라움의 표현으로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이해받고 싶다는 인간의 본질적인 갈망은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 충동과 발화본능은 반드시 문자를 중심으로만 살아남을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체인 서사 자체는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사라지지 않겠지만, 서사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문학이 오래 누려왔던 서사의 왕권은 바야흐로 인접 장르들로 활발하게 이양 중이다. 첨단 기술이 흑백의 활자가 아니라 총천연색의 입체 영상으로 서사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시대에, 권력을 자식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이 쓸쓸한 서사의 왕은 누구와 더불어 어디로 갈 것인가? 남은 것은 아무런 독자도 청중도 갖지 못한 이야기꾼이 늙은 왕처럼 폭풍우 속에서 읊조릴 광기어린 독백뿐인가?

현대소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 고유명사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해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의 시대에는 새로움이라는 것이 전통에 비해 부수적인 가치였고,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통을 잘 반복하는 일이었다. 예술작품에서 새로움이라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게 된 것은 컨베이어벨트 시대 이후일 것이다. 공장에서 쏟아져나오는 신제품을 계속해서 소비해주는 층이 있어야 산업시설이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창작품을 계속해서 소비해주는 층이 있어야 예술제도가 유지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예술의 혁명군으로서 지녔던 전위의 정신에 반드시 강박증적인 생산-소비의 이분법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전위가 예술의 신상품을 홍보하는 가장 좋은 명찰과 완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완벽한 고유명사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토록 찾고 있는 새로운 서사는 사실 할머니의 옷장에 잠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결혼식 문화에서 신부는 ‘옛것’으로도 자신을 치장해야 한다. 예컨대 어머니의 진주 목걸이라든가 할머니의 레이스 장갑 같은 것. 최근 각광받는 패션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때로는 50년대로, 60년대로, 70년대로 달려가는 것은 ‘옛것’의 힘과 매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 「전통과 개인적 재능」(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 1921)에서 T.S. 엘리엇은 예술가(시인)가 처해 있는 당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영원성에 가닿고 전통으로 남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감각과 맥락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우리는 전통 없이 독자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우리가 당대에 살아 있음을 인식하게 해주는 존재는 이곳에서 이미 살았던 죽은 이들이다.

우리가 서사 하면 떠올리게 되는 주요 장르인 소설이 서사의 왕국에서 현재의 지분을 차지한 것은 오랜 일이 아니다. 소설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내면과 작가의 문체라는 깊고 내밀한 심연을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주인공이 위치하고 있는 세계의 복잡성을 잊었다. 프랑스의 누보로망(nouveau roman)이 우리에게 남긴 큰 교훈 중 하나는 내면의 미시적 세계와 그것을 추적하는 미시적 문체는 찬란하리만치 아름답지만, 이때 한 인간이 지니는 어쩔 수 없는 지평의 한계로 말미암아 소설이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좁은 길만 달리게 된다는 점이다.

쇠락해가는 듯한 서사의 왕국에서 우리는 과거의 영화(榮華)를 떠올린다. 그것이 가장 영화로웠던 한때는 문학이 환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시절일 것이다. 여기에서 환상은 오늘날 하나의 장르로 규정되는 판타지(fantasy)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로 귀화한 동구권 출신의 문학비평가이자 이론가 츠베땅 또도로프(T. Todorov)의 관점을 빌리자면 환상은 어떤 사건이 현실의 합리적인 법칙으로 다 설명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즉 자연의 법칙밖에 모르는 사람이 초자연적 양상을 띤 사건에 직면해서 체험하는 모종의 망설임인 것이다.1) 이때 환상에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그는 에드거 앨런 포우(E. A. Poe)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어떤 기괴함을 느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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