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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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金錦姬

1979년 부산 출생.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novelist79@hanmail.net

 

 

 

센티멘털도 하루이틀*

 

그 나라 사람들은 하루를 여섯시간씩 네번으로 나눈다고 했다. 아누차와 김의 대화를 들어보니 그랬다. 그곳에서는 새벽 한시, 아침 한시, 오후 한시, 밤 한시, 이렇게 네번의 한시를 만난다. ‘띠능’ ‘몽 차오’ ‘바이 몽’ ‘능툼’. 같은 한시라도 이름은 다 달랐다. 감춰졌던 시간의 결들이 페이스트리 빵처럼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인생도 두배쯤 더 늘어날 것 같았다.

그전에 살던 중국인에 비하면 태국인 아누차는 유령처럼 조용한 세입자였다. 종종 월세가 밀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술은 덜 마셨다. 다만 부엌도 없는 방인데 자주 요리를 해서 문제였다. 홍은 향신료 냄새를 왜 이렇게 풍기냐고 따졌다가 김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너무 매정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누차는 고향 음식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홍이 외출한 틈을 노려 여전히 요리를 했다.

홍은 이혼한 지 칠년 만에 이 다세대주택을 샀다. 옥탑방까지 사층이었고 일곱가구가 살았다. 원래는 한 집이던 반지하에 두 가구를 들이는 바람에 월세를 더 낸 쪽만 실내 화장실을 쓸 수 있었다. 십만원이 그렇게 큰 차이라고 외할아버지는 역설했다. “백만원은 또 어떻고.” 보증금을 그만큼 더 주면 지상에서 살 수 있었다. 거기다 세를 올리면 더 넓은 방을 쓸 수 있고, 전세로 돌리면 작은 베란다를 가질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게 세상이니라” 했다.

어쩐지 치사하다고 생각했지만 말대꾸할 수는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집 여러채로 재산을 불려온 어엿한 임대사업자니까. 2002년, 홍이 아홉살이나 어린 김을 재혼 상대로 데려왔을 때도 외할아버지의 분석은 임대사업자다웠다. 김이 홍의 다세대주택에서 세나 받아먹으며 편하게 살 심산이라는 것이었다. “세—에나 받아먹으며”라고 할 때 외할아버지는 신발창에 붙은 껌을 들여다보듯 언짢은 말투였다. 결혼 초만 해도 외할아버지와 김 사이에는 쟁 하는 긴장이 일곤 했다. 세법이 개정돼 부동산세를 더 내야 했을 때 그 긴장은 정점에 달했다.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 정권을 뽑은 ‘손모가지들’을 싹 다 잘라야 한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서 언쟁은 사라졌다. 외할아버지는 여전히 김을 ‘빨갱이’라고 불렀지만 김은 더이상 “그런 시절은 지났습니다”라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삼수생이 되었다는 소식을 김과 홍에게 어떻게 알리나. 스물한살에 애엄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나는 마당 평상에 걸터앉았다. 수능을 망친 표는 결과도 안 보고 외국으로 떠났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학원에 다니겠다고 했다. 나는 말리지 않았고 임신했다는 말도 안 꺼냈다. 표는 매사에 진지해서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내가 널 쿨하게 놔주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막상 병원에 가보니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혈액검사로 임신을 확인하고 초음파 사진을 찍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자, 간호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술 가능한 방법들을 설명했다. 습관적으로 볼펜을 까딱까딱 흔들면서 몇몇 단어를 메모해주었는데 ‘9주’ ‘흡입’ ‘약물’ ‘분쇄’ 같은 말이었다. 나는 흘려써서 ‘ㄹ’자가 형체도 없이 풀려버린 간호사의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오래 남을 것 없이 얼른 날아가고 싶은 듯한 필체였다. 평소에도 겁이 많았던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결국 산모수첩을 구겨넣고 병원을 나왔다.

어쩌다 재수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볼품없던 애와 연애했을까? 그건 일종의 연민 때문이다. 판단을 잘못했거나 남자 보는 눈이 없었던 게 아니란 말이다. 누가 따져물으면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김과 홍이, 외할아버지가, 친구들이. 그렇다면 그놈의 연민은 어디서 왔나. 나는 평상 다리를 툭툭 찼다. 그건 바로 집 때문이었다.

내가 크는 동안 집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세입자들이 들락거렸다. 직업도 다양했다. 정육점 직원, 간호조무사, 대리운전 기사, 마트 계산원, 애견 미용사, 보험설계사, 요가 강사, 물리치료사…… 개중에는 도둑이나 사기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인중개사였던 홍은 집에 거의 없었고 세입자들은 낮에도 한둘쯤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내 것까지 중국음식을 시켜주거나, 내 줄넘기 횟수를 세어주었다. 아주 가끔은 반대로 하기도 했다.

열두세살 무렵 지하방에는 긴 머리칼의 여자가 세들었다. 여자는 의수를 낀 남자와 살았는데 비 오는 날이면 비빔국수를 만들었다. 국수 면발은 여자의 머릿결처럼 윤이 흘렀고 양념장은 청양고추를 넣어 매콤했다. 홍은 그때도 세입자들에게 깐깐해서 짐차로 대문을 막아놓는다고 한소리하곤 했다. 하지만 컵라면이나 햄버거 따위에 물린 나는 일부러 여자의 방을 서성이다 국수를 얻어먹었다.

여자는 글씨를 아주 잘 썼다. 반듯하고 둥글고 흐트러짐 없이 마치 스케이트를 타듯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글자들을 보며 나만 감탄하는 건 아니었다. 여자가 글씨를 쓸 때면 남자도 하, 하고 무릎을 쳤다. 남자는 마치 자기가 글씨를 쓰는 듯 한쪽만 남은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홍은 자기들끼리는 얼굴만 봐도 좋은가 보지, 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 무렵 내 방에는 ‘이중칼날 칼가리’ ‘써라운드 이어폰’ 같은 글씨를 연습한 종이들이 굴러다녔다. 내가 여자의 ‘양귀비 염색약’ ‘오동나무 효도손’을 완벽하게 따라쓸 수 있을 때쯤, 남자의 발걸음이 끊겼다. 남자는 왜 그랬는지 평상에다 의수를 벗어놓고 갔는데 여자는 그걸 화단에 꽂아두었다. 남자의 몸에서 떨어져나오자 그것은 하나도 손 같지 않았다. 대신 넝쿨이 손가락을 휘감고 자라면서 꽤 훌륭한 지지대가 되었다. 마당에 꽃나무를 심기는 했지만 너무 바빠서 돌볼 겨를이 없었던 홍은 그게 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도 짐을 챙겨 사라졌다. 의수가 뽑혀나간 자리에는 클로버가 수북했다. 세간 몇가지를 남기고 갔는데 고장난 세탁기도 한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방 안 곳곳에 숨어 있는 소주병을 찾아서 세탁기를 가지러 온 고물장수에게 팔았다. 마흔여덟병이었다.

나는 방을 서성이면서 여자의 글씨가 적힌 종이를 주웠다. ‘매직 스펀지’ ‘한국산 바늘’ 이외에 ‘애드벌룬’ ‘보잉747’ ‘인공위성’ 같은, 용도를 알 수 없는 말들도 있었다. 그러다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인 ‘쥐덫’ ‘바퀴’ ‘박멸’ 같은 단어가 주는 어떤 아이러니와 비애를 비로소 눈치챘다. 이런 글씨를 쓰는 사람이 불행해지는 건 불공평하다 생각했고 눈물이 났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자 김은 무척 감동받은 눈치였다. “훌륭하구나.” 김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했다. 새아빠가 꽤 마음에 들었던 나로서는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김은 그런 마음을 연민이라 한다고 했다. 연민,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 말은 사랑과 비슷했지만 온도는 좀더 낮았고 덜 비밀스럽고 오래된 듯 느껴졌다.

 

일단 김에게 알리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김은 지금쯤 동네 운동장에 있을 것이다. 한 계절 전에 축구심판 3급 자격증을 따더니 경기만 있으면 심판을 맡았다. 자격증은 협회교육을 이수하고 시험을 치르면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축구심판으로 직업을 바꾸려나, 나는 생각했다. 김은 수학강사가 싫다며 한동안 공사장 인부, 농산물 직판장 배달원, 삼겹살집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했다. 신선한—신성한이었을 수도 있다—육체노동을 하겠다고 해서 홍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일년쯤 직업의 세계를 유랑하던 김은 결국 학원강사로 되돌아갔다. 난 좀 실망했다. 모험의 세계로 떠난 칼잡이가 조용히 돌아와 푸줏간에서 고기 써는 걸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내 미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선 대학부터 붙어야겠지만.

이따금 축구공이 허공으로 솟았다 떨어질 뿐 운동장은 고요했다. 김은 팔자걸음의 사내에게 반칙을 주고 있었다. 동네축구에서 너무 빡빡하게 군다며 사내가 투덜댔다. 김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더니 손을 흔들어 경기를 재개시켰다. 김은 동네축구라는 말을 싫어했다. 동네에서 한다고 축구가 축구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작다고 해서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예를 들어 0은 작지만 이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