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 은희경 장편 『태연한 인생』

 

고독의 연대, 움직이는 숲으로의 초대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1996년 『문학사상』에 김소진론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 『소설의 고독』 『소진의 기억』(공편) 등이 있음.

 

 

 
ⓒ 송곳

ⓒ 송곳

 

은희경의 신작 장편 『태연한 인생』(창비 2012)1930년대 모더니스트 박태원(朴泰遠)이 선점해버린 기념비적 소설 제목이 없었다면 ‘소설가 요셉 씨의 육일’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소설은 서울 서쪽 신도시의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두고 안 써지는 소설을 세상 탓으로 돌리며 이곳저곳 까페와 술집을 어슬렁거리는 사십대 후반의 소설가 김요셉의 엿새간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희경이라는 이름에서 곧장 첨단의 감각을 떠올리게 마련인 오늘의 독자들은 이런 실없는 가정에 대번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으리라. 먼지 풀풀 나는 ‘소설가 소설’ 혹은 ‘예술가 소설’의 의장(意匠)이나 제목은 우리가 아는 세련된 은희경 소설과 얼마나 먼가. 그러니 『태연한 인생』을 “글이 안 써져 고민하다가 짐 싸들고 떠나는 작가 이야기 말야”라는 소설 속 요셉의 냉소적 독설을 좇아 ‘예술가 소설’로 읽는 우를 범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된다. 이번 소설에서 중요한 서사적 공간으로 작용하는 영화 쪽 세상의 언어를 빌려서 말한다면 ‘예술가 소설’의 의장은 맥거핀(MacGuffin, 중요한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의 일종이다. 그 맥거핀을 따라가다보면 얼마간의 과장과 위악적 자기비하의 포즈 속에 그려진 소설가의 일상이나 글판 주변의 풍경을 가볍게 즐길 수는 있겠으나, 그 풍경의 밑은 허방이다. 앞으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소설가 요셉이 쏘피스트적 궤변과 현란한 반어법의 전시로 보여주는 소설가의 일상은 그 자신의 많이 ‘태연하지 못한’ 고독의 텅 빈 형식이라는 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태연한 인생’이라는 제목. 어떻게 ‘태연하다’는 말을 인생 앞에다 가져다놓을 생각을 했을까. ‘태연한 인생’이라고 하면 인생이 의인화된 주어인 셈인데, 이 가벼운 낯설게 하기는 허무의 태도나 연극적 위장의 포즈를 뉘앙스로 끌어들인다. 두 단어로 된 짧은 제목인데도 은희경 특유의 지적 긴장이 넘친다. 그리고 ‘태연한 인생’은 이번 소설의 인물들이 각자의 참호에서 기약없이 버티고 있는 총성 없는 전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와 가뭄 사이로 잠시 단비가 내리던 오후, 산뜻한 레인부츠를 신고 나타난 작가에게 먼저 제목에 대해 물어보았다.

 

은희경  다른 소설에 쓰려고 만들었던 제목이에요. 단편에 쓰려고 했는데 그냥 이 소설에도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까 내가 쓴 모든 소설에 다 어울리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첫 장편 『새의 선물』(1996)에서부터 ‘바라보는 나’ ‘보여지는 나’라는 설정이 있었고, 소설집 해설 제목에 ‘연기하는 유전자의 무의식에 대하여’ 이런 것도 있었고요. ‘태연하다’와 통하는 데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번 장편이 지금까지 내가 써온 소설의 종합판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고. 그래서 평이하지 않으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갔어요. 근데 태연한 인생이 어떤 인생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하겠어요. 인생에는 태연해야 할 일이 많다는 뜻 같기도 해요.

鄭弘樹 문학평론가. 1996년 『문학사상』에 김소진론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 『소설의 고독』 『소진의 기억』(공편) 등이 있음.

鄭弘樹
문학평론가. 1996년 『문학사상』에 김소진론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 『소설의 고독』 『소진의 기억』(공편) 등이 있음.

 

정홍수  이번 작품은 원래 구상하고 준비했던 장편이 좀처럼 쓰여지지 않는 와중에 뜻밖의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작가의 말’을 보면 다양한 ‘우연’의 개입이 있었던 듯합니다.

 

은희경  맞아요. 물론 장편은 이런 적이 없었죠. 장편 구상은 오래 하니까. 그런데 단편 쓸 때는 전에도 그랬어요. 가령 『새의 선물』을 절에 가서 썼는데 그때 절에서 지냈던 경험을 가지고 「그녀의 세번째 남자」를 쓴달지 하는 식으로. 글을 쓰러 새 장소를 찾아가지만 그때는 워낙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서 쓰는 것 말고도 뭐든지 보고 듣는 대로 빨아들여요. 그때 느꼈던 공간, 그때 스쳤던 사건들이 다음 소설이 된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장편을 완전히 바꿔서 전혀 새로운 걸 쓰는 건…… 이게 다 내가 창비 쪽에 못 쓰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일어난 사건이죠.(웃음) 쓰기는 해야겠고, 일단 소설이 안 써지는 소설가 이야기를 써보자고 설정해놓은 거예요. 그 이야기만큼은 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것만 갖고 장편을 쓸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원래 준비했던 장편이 여자 기숙사에서 만난 네 친구들의 30년에 걸친 인생 여정인데, 류의 부모 얘기를 쓸 때 그 일부가 나왔어요. 그러고는 문상, 생일, 씨나리오 심사 등등 연재하는 동안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재료로 이야기를 끌어간 거죠.

글쓰기와 관련해, 우연성에 대해 두가지 정도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하나는 메모를 해두었더라도 정작 써먹으려면 정서가 안 맞을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때의 감각이나 문제의식이 살아나지 않아요. 메모를 할 땐 굉장히 멋있는 것 같아서 써놨는데 그 느낌이 안 오면 소용없거든요. 그런 점에서 평소의 성실한 태도도 필요하지만, 모든 감각이나 문장력이 가장 열려 있을 때 받아들인 것을 가지고 쓰는 게,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