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모험하는 언어와 서정시

하재연과 김중일의 새 시집에 대해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저서로 『얼굴 없는 희망』 『말과 시간의 깊이』 『잘 표현된 불행』 등이 있음. dasungumi@gmail.com

 

 

‘미래파’가 등장한 것은 지난 2000년대 중반이었지만, 그 선언이 발표된 것도 아니었고 그 윤곽이 정확하게 그려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떤 유파가 결성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한번의 명명이 있었을 뿐인데, 그 일은 작은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권혁웅(權赫雄)의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문예중앙』 2005년 봄호)은 지극히 전략적인 글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자기 세대 젊은 시인들이 시쓰기에 바치는 열정과 그 독특한 언어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 노력과 결실이 우리 시에 새로운 활로를 개척할 것이라고까지 말하였지만, 정작 ‘미래파’라는 말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교묘하게 비워두었다. 이 때문에 공공연히 미래파를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름에 연루될 만한 여러 젊은 시인들은 거의 모두 그 이름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거부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시전문지에서 ‘미래파 특집’ 같은 것을 꾸밀 때에도, 경향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젊은 시인들이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시를 보냈다. 대부분 70년대 전반기에 태어나 저 불행했던 70년대와 80년대의 처절한 전투 속에 뛰어들거나 그 언저리에 머물러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확인할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이 세대는, 이 명명 뒤에서 자신의 문학적 모험을 차별화하면서도 거기에 구애되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이 여유는 또 하나의 여유로 이어졌다. 그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문화적・정치적 환경에서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벌여야 하는 자신들의 언어적 모험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오랜 대립 구도를 넘어서서 양쪽의 외연을 넓히고 그 내용을 확충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했다. ‘창비파’나 ‘문지파’가 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튼튼한 문학적 입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 용기도 거기서 생겨났다. 이 점에서 미래파의 명명은 유파의 성립이 아니라 그 해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국시가 아무개 시인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는 말은 전략적인 표어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지만, 미래파 이후 한국 시단의 지형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시와 비정치적 시의 구분을 무효화한 용산의 젊은 시인들이나, 바로 그들에게서 제기된 ‘문학의 정치성’에 관한 논의가 그 달라진 지형을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내용 없는 명명이라도 이름은 내용을 만든다. 미래파라고 지목된 시인들은 미래파가 되려고 애썼다. 그 이름을 굴레로 여기는 시인들 곁에는 그 이름을 부적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실도 미래도 믿지 않으며, 결국은 시조차도 믿지 않는 이 알리바이의 부적은 현실을 현실 그대로 남겨놓을 뿐 눈을 씻고 다시 보아야 할 현실로 만들지 않는다. 시의 새로운 언어, 또는 모험하는 언어가 늘 우연에 기대를 거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우연이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우연이 경이에 이를 때, 더 많은 우연은 그 지리멸렬한 상태를 끝내 벗어버리지 못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이 지닌 온갖 가능성에 대한 시인의 믿음이며, 언어가 현실과 만나는 온갖 층위와 다양한 접점에 대한 그의 끈질긴 탐구일 터인데, 결국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나는 올해 출간된 젊은 시인들의 여러 시집 가운데 완전히 다른 외양을 지닌 두 시집, 하재연(河在姸)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문학과지성사 2012)과 김중일(金重一)의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비 2012)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는데, 저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 예증을 찾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 믿음이 어떻게 다른 힘으로 유지되고 그 끈질긴 탐구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말하고 싶지만, 그것도 아마 에둘러서 말하게 될 터이다.

 

 

하재연의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