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황정은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가 있음. aamudo@empal.com
장편연재 1
소라나나나기
小蘿
내 이름은 소라.
소라의 라는 미나리 라(蘿). 본래 열매 라(蓏)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러 간 할아버지의 실수로 미나리가 되었다. 생전에 미나리를 즐겨 드셨다고 하니 실수고 뭐고 다만 취향의 반영인지도 모르겠다. 이 할아버지에 관해서는 기억하는 바가 별로 없다. 내가 두살이 되던 무렵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고 간염으로 돌아가셨으므로 기억이고 자시고 남을 기회가 없었다. 전해들은 내용으로는 보통 몸집에 완력도 보통, 생활력도 보통, 무엇을 하든 보통이라는 평가를 듣고 산 남자였다고 한다.
있지.
네 할아버지는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고 죽은 것이 아니야,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홍수가 있었거든.
홍수가 나서 많은 집이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죽었거든. 네 할아버지는 그 난리 통에 낚시를 했단다. 집이며 짐승이며 사람 들이 쓸려가고 있는 흙탕물에 낚싯대를 던져두고 고기를 잡았단다. 그 물에서 건진 물고기를 먹고 죽은 거란다. 물에 휘말린 사람들을 생각해보렴. 오죽이나 원통했겠니. 오죽이나 고통스러웠겠니. 그런 물에 낚싯바늘을 담근 사람이라서, 급사(急死)한 거란다. 네 할아버지는 그 낚싯바늘에 뺨이나 등을 긁힌 사람들의 원한을 받고 죽은 거야.
어머니의 이름은 애자.
나나와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 때보다도 애자,라고 부를 때가 많다. 애자는 애자라고 불러야 애자답다. 애자의 애는 사랑 애(愛). 그 이름 그대로 사랑으로 가득하고 사랑으로 넘쳤다.
애자가 가장 애자다운 사랑으로 넘쳤을 시절은 아무래도 아버지와 연애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나와 나는 애자로부터 숱하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름에 시작된 연애였으므로 여름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규모로 태풍이 불었단다.
간판들이 날아가고 전신주가 넘어지고 가로수가 뽑혀나갈 정도로 바람이 불었단다.
그 바람 속을 둘이서, 옷자락 한번 날리지 않고 걸었단다. 바로 눈앞에서 부러진 가로수를 넘기도 하면서 우산을 쓰고 계속 걸었단다. 바람에 휘말린 잔 나뭇가지들이 뼈처럼 화살처럼 날아다니는 길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 걸었단다.
뭘 하며 걸었어?
라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애자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야기했지,라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말이지,라고 애자는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버린 거야.
몸?
들었다기보다는 먹은 거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남김없이 먹고 마셔서, 일체가 되어버린 거야.
아침에 먹은 우유 한모금이 피가 되고 근육이 되는 것처럼, 그 이야기들이 전부, 내 피가 되고 뼈가 된 거야,라고 말한 뒤 애자는 자기가 한 말을 생각해보는 듯한 모습으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연애하던 시절의 애자를 볼 수 있는 사진이 한장 있다.
애자는 사진 속에서 젊고 예쁘고 웃는다.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으로 알록달록한 차양 아래를 걷느라고 얼굴에 오렌지색 그늘이 져 있다. 입을 대고 빨면 달게 녹을 듯한 빛깔의 회전목마를 등진 채 사진을 찍는 사람 쪽으로 턱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목을 향해 둥글게 말아넣은 단발머리가 귀엽게 흩어져 있고 피부는 희고 눈썹은 검고 입술은 붉다. 백설 같다. 백설 같은 애자의 곁에 아버지가 있다. 찍히는 순간 움직였거나 움직이는 순간 찍혔거나 사진 오른쪽 모서리로 반쯤 빠져나간 채 흐릿한 옆얼굴을 보이며 웃고 있다. 이것 말고 나나와 내게는 아버지의 사진이랄 것이 없다. 애자가 전부 치워버렸다. 먹었나,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애자의 몸이 되어버린 이야기와 같은 방식으로 그 사진들도 전부 애자의 몸이 되었나.
이가 드러날 정도로 웃고 있으니 소리를 내며 웃었을 것이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 그가 어떤 소리로 웃었는지, 목소리는 어땠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애자의 피가 되고 뼈가 된 목소리란 어떤 목소리일까. 열살 때까지는 함께 살았으므로 어렴풋하게나마 나는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 무렵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나 자주 신고 다녔던 쌘들도 기억하고 있으니 그의 목소리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목소리일 것이다.
이런 목소리일 것이다,라고 여기고 있는 어떤 톤의 목소리를 이따금 떠올리고는 하지만 그 목소리를 틀림없는 아버지의 목소리,라고 우길 자신은 없다. 열살 때까지는 함께 살았으므로 수백번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지금 나는 그의 음성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소리들에 희석되어 사라져버렸다. 소라야,라고 불렀겠지,라고 생각하며 흉내를 내는 셈 치고 그의 목소리를 생각해보아도 소용없다.
소라야.
하고 종이에 적힌 검은 문장으로 떠오를 뿐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금주.
성이 김이었으므로 금(金)을 두번 사용해서 김금주(金金紬).
여자 같은 이름이네,라는 소리를 꽤 들으며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나나와 내가 각각 아홉살과 열살이었을 때 죽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거대한 톱니바퀴에 말려들었다. 상반신이 갈려 나왔으므로 공장에 남은 직원을 모아 점호를 해보고서야 사고를 당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나나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애자로부터 들었다.
있지.
넷이서 행복해지자며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가엾어.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산 걸까.
애자는 나나와 나에게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 뒤, 언제고 그런 식으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덧붙였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특별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란다.
그게 인생의 본질이란다.
허망하고.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단다.
나는 올해 사진 속 애자의 나이가 되었다.
애자는 여전히 예쁘지만 더는 젊지 않다.
늙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늙었다기보다는 다만 말라가고 있다.
팔뚝이 말랐다거나 몸이 여위었다는 의미도 아니고, 애자의 몸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비물질적인 부분이 마르고 있다는 의미다. 마르고 말라서 조그맣게 졸아들었다. 애자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을 때 어깨를 쥐고 흔들면 갈비뼈 틈에서 호두알만한 것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구를 것 같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살아가려면 세계를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고 애자는 말한다. 나나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수없이 들려주었다. 애자의 이야기는 부드럽고 달다. 부드럽고 달게, 그녀는 세계란 원한으로 가득하며 그런 세계에 사는 일이란 고통스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자초해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필멸, 필멸, 필멸일 뿐인 세계에서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애쓸 일도 없고 발버둥을 쳐봤자 고통을 늘릴 뿐인데. 난리법석을 떨며 살다가도 어느 순간 영문을 모르고 비참하게 죽기나 하면서. 그밖엔 즐거움도 의미도 없이 즐겁다거나 의미있다고 착각하며 서서히 죽어갈 뿐인데. 어느 쪽이든 죽고 나면 그뿐일 뿐인데.
죽고 나면 그뿐,이라면서 세계엔 원한이 가득하다고 애자는 말한다.
그뿐,이라면 원한이고 뭐고 남을 것이 있나. 듣고 보면 묘하게 모순이 있는데도 듣다보면 말려든다. 이런 이야기에 말려드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한 채로 듣다가 시간이 흘러서야 아차 말려들었다,라고 깨닫는다. 애자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렇다. 달콤하게 썩은 복숭아 같고 독이 담긴 아름다운 주문 같다. 애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귀를 통해 흘러든 이야기의 즙으로 머릿속이 나른해진다. 애자가 일러주는 이야기처럼 만사를 단념하고 흐르게 된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더 고통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특별히 더 달콤하다.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스럽지 않다. 본래 공허하니 사는 일 중엔 애쓸 것도 없다. 세계는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해진다.
아무래도 좋은 것뿐인 세계엔 아낄 것도 없고 소중할 것도 없다.
나는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소라.
소라의 라는 미나리 라(蘿).
본래 열매 라(蓏)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러 간 할아버지의 실수로 미나리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는 애자로부터 들었으므로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열매고 뭐고, 나는 본래 미나리인지도 모른다.
*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단풍잎을 보았다.
꿈에서.
바람이 불고, 붉은 잎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도 들었는데 꿈에서 깨고 보니 꿈이었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꾼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단풍 꿈을 꾸고도 하루가 지난 뒤였다. 하루가 지나고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선명해서, 그런 꿈을 꾸었다고 말하자 나나는 태몽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섹스를 한 지도 일년이 넘었으므로 내 경우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나나인가,라고 생각하며 나나를 보았다. 나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참외를 아삭아삭 먹고 있었다. 일요일 밤이었고 모처럼 영화를 보러 가자는 연락에 나나와 나는 나기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단풍이면 딸인가.
어째서?
빛깔이 화려했어.
그럼 아들이지. 화려한 건 대체로 수컷이니까.
그런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도착했다는 전화가 걸려와서 나나와 나는 나기가 차를 대놓고 기다리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나기는 라디오를 틀어두고 있다가 나나와 내가 차에 오르자 시동을 걸었다. 너희들 내려오기 전에 들었다며 나기는 최근 러시아에서 발표되었다는 미심쩍은 뉴스를 들려주었다. 다섯개의 혜성이 명왕성 부근에서 관측되었고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으며 두달 뒤엔 최소한 그 가운데 두개가 지구 지표에 충돌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빠른 건가,라고 나나는 말했다. 명왕성에서 지구까지 두달 만에 올 수 있다면 걔네, 엄청 빠른 건가.
자주색 넥타이를 맨 영화관 직원이 입구에서 검은 안경을 나눠주고 있었다. 이것을 쓰고 토끼 터널을 낙하하는 앨리스를 보았다. 저년이 열쇠를 탁자에 놓아둔 채로 작아졌잖아, 이제 어떡할 거야, 멍청한 년, 나나가 중얼거리자 멀리 뒤쪽에 앉은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나나는 팝콘을 먹으면서 팔꿈치를 긁느라고 여기저기 팝콘을 흘렸다. 그중 몇개가 수수깡처럼 가벼운 질감으로 내 무릎과 넓적다리 위로도 툭, 툭, 떨어졌다. 나나가 오늘은 산만하네, 평소하고 다르게 이상하게 산만하네,라고 생각하다보니 아무래도 임신한 것은 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수안경을 통해 화면을 보았다. 버섯 위에서 파란색 캐터필러가 물담배를 피우며 알쏭달쏭한 말을 흘리고 있었다. 캐터필러의 담뱃대에서 연기가 고불고불 피어올랐다. 비단처럼 부드럽게 잡힐 듯한 연기를 향해 손을 펼쳤다가 오므렸다. 간신히 코끝에 걸려 있던 안경이 흘러내려 그것을 자꾸 고쳐쓰느라고 이날의 영화엔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나와 나기와 나는 한달에 한번쯤 영화를 보러 다녔고 그럴 때의 일정은 반드시 일요일 마지막 상영으로 정해두고 있었다. 월요일에 관한 부담으로 관람객이 가장 적은 시간을 노리자는 것이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갈 때는 나기의 스쿠프를 애용했다. 나기의 스쿠프는 검은색으로, 출시될 당시에는 젊은 층을 겨냥한 스포츠카, 다가오는 매혹, 어쩌고였으나, 세월이 흐르고 여러 사람의 손과 운전습관을 거치며 낡은 차가 되었다. 여러군데 도장이 벗겨지고 엔진을 제외한 부품들은 벌써 몇차례나 교체되어서, 본래의 부품이랄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눈에 띄게 구겨진 데 없이 멀쩡했다. 속도를 높이면 바닥을 향해 가라앉은 채로 잘 나아갔다.
이 차에 관해 말해보자면, 도어가 두개라 세번째 탑승자가 뒷좌석으로 들어가려면 앞좌석에 앉은 사람이 일단 내려서 좌석 아래 숨은 레버를 만져 좌석을 바짝 앞으로 당겨야 한다는 점이 성가시고 재미있었다. 레버를 당기면 앞좌석이 엄청난 기세로 팡, 하고 접혀서 바닥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드륵, 하고 밀려갔기 때문에, 레버에 손을 댈 때마다 충격을 대비하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
-
2018년 봄호 최규석 만화 『송곳』황정은
-
2013년 봄호 소라나나나기(장편연재 3)황정은
-
2012년 겨울호 소라나나나기(장편연재 2)황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