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형수 金炯洙
시인, 소설가. 1959년 전남 함평 출생. 1985년 『민중시 2』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조드』,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시집 『빗방울에 대한 추억』 등이 있음. millemi@hanmail.net
오자(誤字)
1
오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오자는 아니다. 다들 오자라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오자였다. 제길, 이름 따위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람! 하나, 오자는 정의와 도덕과 양심에 입각하여, 마치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기를 서슴지 않는 성품이었다. 이 순간에도 남쪽 가야 사투리의 가운데 토막이 펄쩍펄쩍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니기미, 이런 법이 어딨노.”
인격체를 지목해 오자니 탈자니 하는 게 옳다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세상 이미지의 밑바탕에는 한권의 책이 있다. 어떤 이는 팔만대장경쯤으로 알고, 어떤 이는 대한민국 상식백과로 알며, 어떤 이는 소설 변강쇠 같은 통속물로 알지라도 분명한 것은 모종의 체제를 가리켜 세상이라 한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자신의 존엄함을 ‘하나의 독자적인 정부’에 비유하는 독트린을 선포하기도 한다. 일개 자아의 무게가 체제의 크기와 맞먹는 영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결국은 모두가 서로의 인질이며 일사불란한 세상 관계의 일원일 뿐이다. 오자 이야기는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어떻든 오자에 대한 추억은 위대한 상식과 교양을 자랑하는 서울 시민들의 권태를 달랠 상당한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오자는 늘 일상의 안정을 흔들어왔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보니 좀 난감해지는 바가 없지 않다. 일상의 안정이라 함은 생애의 질서가 어떤 지속적인 흐름을 유지하게 하는 호흡 같은 걸 가리킬 텐데, 그것이 말이 되려면 밥 먹고 똥 싸고 숨 쉬고 자는 게 모두 장기적으로 ‘지금 이대로’일 수 있어야 한다. 시민들이 뜻을 모아 당대가 바로 그런 때라고 합의한다 하더라도 오자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세상일을 논하면서 배경에 치우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결코 시대적 배경을 생략하고 말할 수 없다. 6월항쟁을 겪고 서울이 때아닌 이데올로기의 백가쟁명을 맞던 무렵을 기억하는 이들은 알 것이다. 앞뒤 연대기에 흡수되고 만 숱한 연대들처럼 그 시대에도 역시 사람들이 살았다. 왕년의 어느 때보다 기운찬 새가 울고 꽃이 피느라 분주했지만 일용할 양식이 될 열매를 제공한 바 없으니, 그날을 추억하는 것은 아무런 업적을 남기지 못한 빈 가지의 공허를 확인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 시대의 일들은 모두 5·18 이후 지상의 풍경이 마치 모세의 광야처럼 황량했던 시기에 발생한 것이다. 냉철한 지식인들도 전두환 시대가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때, 역사가 그 커다란 현실을 젊음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혁명의 밀물은 열정과 반대되는 일체를 밀어버렸다. 그것이 인간을 몰염치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누구나 할 말이 있었고 누구에게나 난폭할 이유가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그 격렬한 활극의 무대를 마음껏 휘젓는 게 무사가 아니라 문사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인문학적 건각(健脚)들 틈에서 늘 모난 어깨 모서리에 부딪치면서 그때마다 사지가 깨지는 것 같은 스트레스를 참으며 젊음을 보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똑똑하고 위세당당하고 12시 정각처럼 고개가 꼿꼿한 사람들 속에서 가슴 졸이던 날을 떠올리다보면 초라한 자화상이 오히려 대견해진다. 제길.
“어이, 젊은이가 역작 「배고픈 다리」의 시인인가?”
생면부지에, 고작 한살 많다는 이유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구는 경우를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아주 흔했다. 이를테면 그해 가을 점심나절로 기억된다. 조금 한적한 매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존재감이 없지 않은 문예지에 나의 시가 물경 여섯편이나 발표되는 경사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내내 고대하던 등단을 엉겁결에 한 것이다. 그 책이 버젓이 서점 판매대에 놓여 있다는 전화를 받은 지 세시간 만이었다.
“당신 독자인데, 철길 앞 식당으로 나오시게.”
“누구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름을 꼭 대야 쓰까?”
나는 대번에 오금을 저렸다. 이름을 듣고 보니, 명색은 독자로되 삼류 문청이 아니라 한창 주가가 뛰는 명사인바 당장에 황송하기부터 했다. 혈연, 학연, 지연은커녕 그 언저리에 닿을 꼬투리조차 감촉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후다닥 튀어나가 굽실대기 시작했다.
“난 그대가 따발총이 아니어서 좋아. 한국어는 따발총이라 시 나부랭이들도 항상 다, 다, 다, 다…… 한다, 된다, 없다로 끝난다고. 물론 꼰대들은 말이 되지. 가령 이 뭐시기 같은 자들은 온 산야가 다, 다, 다, 다…… 하는 따발총 소리, 꽹과리 소리, M1소총 소리가 비명, 폭음과 함께 잠시도 그칠 날이 없는 전시체제를 살았으니까.”
세상이란 이런 어처구니없는 담화로 궁합이 맞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파격을 좋아하는 자들은 지겨운 알리바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다. 하나, 나처럼 소심한 자에게는 남의 호방함을 견디는 것이 편할 리 없다. 첫 작품을 지목해 얼핏 ‘역작’이라는 말을 내비쳤다는 이유로 이토록 당당하게 밥을 사게 하고, 술을 따르게 하며, 근무시간을 까먹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나는 모처럼 채용된 모 회사에 말단직원으로 충성하던 참이라 시간이 경과하면 할수록 염통과 허파 언저리가 들썩거렸다. 그래, 식사를 마치자 곧 일어서고 싶었다.
“저,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신입사원이라……”
“뭐라 카노? 내가 팬이여. 당신 팬이래니께! 이 섹시한 술잔에 거침없이 입술을 맞춰야지.”
자기 말만 세우는 순 고집불통 같은 위인을 맞아 나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깊은 격전지에 들어섰는지 실감했다. 동시에, 이 폭력적인 애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그는 무일푼 상경 넉달 만에 일자리를 구한 가난한 청춘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많게는 일주일에 두세번, 적게는 이삼주에 한번.
나는 이같은 위인을, 아니 이같은 위인을 대량생산한 시대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무엄한 것은 그가 아니라 그 시대였다. 보잘것없는 빈털터리를 동조하고 마음껏 고무, 찬양해도 되는 ‘폐허’의 자유밖에 없었던 시대, 학생혁명, 군사혁명, 시민혁명 따위의 정변을 줄지어 경험한 민초의 면역력에 값할 정치 주제가 없었다. 천지는 공권력을 업신여기는 풀잎들로 차 있어서 구름 하나도 무사히 건너다니지 못했다. 다들 어떤 방식으로든 시련을 헤쳐갈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거리는 날마다 증명했다. 목청이 크면 누구나 주인공이었고, 시대정신을 말할 수 있으면 누구나 혁명가였다. 당연히, 점잖은 사람일수록 예기치 못한 시간에 예기치 않은 자리에서 날벼락을 뒤집어쓰기 십상이었다.
그 발원지가 굴레방다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화문에서 마포까지 즐비한 언론사, 출판사 가운데 얌전한 언어로 강철 기질을 벼리는 대장간 같은 것들이 굴레방다리에 모여 있었다. 그래서 자칭 거장들이 넘치고 또 넘쳤던, 삼류 이데올로기의 사령부 중 하나가 도서출판 파랑새인데, 외양은 지식 고물상 같은 창고일지언정 내용은 혁명이론의 백화점이었다. 주위에 얼마나 많은 식솔을 거느렸는지 위정자들은 공안사건만 터졌다 하면 자금줄이 혹시 그곳에 있지나 않을까 수사권을 사용하겠다고 으르렁댔다. 들락거리는 사람도 백면서생이 다수지만, 군사독재가 자기 존속을 꾀하면서 희생시킨 무수히 많은 부상자와 적색 보균자들도 있었다. 그것을 즐기는 문제적 개인들은 저마다 기십, 기백명에 이르는 심복을 거느린 두목들처럼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그 하나하나가 십수개의 구치소에서 금방 쏟아져나온 별들을 맞아 낮술을 마시는 호프집, 통닭집 따위에서 얼마나 허황된 르네상스의 영광을 재현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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