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12년 대선과 민주개혁의 과제들
천안함사건이 보여준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
서재정 徐載晶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국제대학원 교수. 저서로 『한미동맹은 영구화하는가』 『한반도의 선택』 등이 있음. jsuh8@jhu.edu
남태현南兌鉉
미국 쏠즈베리대학 정치학과 교수. 저서로 『영어 계급사회』 등이 있음. txnam@salisbury.edu
한국 민주주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1987년 민주화가 시작했고 1998년 김대중 야당 후보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평화적인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시 2008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주의 절차가 뿌리내렸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을 바라보는 지금 한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1) 새로운 시대적 요구, 즉 경제민주주의, 보편적 복지, 남북관계 개선, 소수자 보호 등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할 때이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체제도 질적으로 도약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천안함사건은 우리에게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큼 와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좌표라 하겠다.
천안함사태는 민주주의의 문제이자, 분단의 문제다. 천안함 침몰 이후 국가와 시민사회가 보여준 모습은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분단체제의 절반의 영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하더라도 이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 기형적 민주주의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분단체제의 한계를 넘어설 추동력은 시민사회에 있고, 시민사회의 역량이 이제 그 한계와 힘을 겨룰 만큼 성숙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1987년 이후 선거제도를 중심으로 한 절차적 민주주의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천안함사건은 남북문제가 여전히 강고한 성역으로 남아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그 성역 안에서 민주주의적 절차와 원칙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던 탓에, 과학적 근거에 반대되는 ‘폭침설’이 정부의 공식입장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행정부는 입법부를 철저히 배제했고, 국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는 했지만 실질적 활동 없이 이를 해산, 행정부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기능을 스스로 포기했다. 이후 천안함과 관련된 일련의 재판에서 사법부도 독립적 기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국가기구 간의 권력균형과 상호견제가 무너진 가운데 행정부는 ‘폭침설’에 합리적인 의혹을 제기하는 시민들에게 ‘종북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공권력을 들이대며 의사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 권리를 제한했다.2) 즉 천안함 정국은 분단체제 아래서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민주주의가 총체적으로 훼손될 수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한계와 동시에 천안함 정국은 긍정적 가능성도 내비쳤다. 즉 시민사회의 의식과 역량이 이전 시기와는 뚜렷하게 다를 정도로 성장하여 정부 차원의 ‘북풍’이 예전과 같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방선거를 불과 보름여 앞두고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의해 폭침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나오고, 이어서 남북관계를 전면적으로 중단한다는 5·24조치가 취해지는 등 안보위기감을 극대화하는 조치가 잇따랐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과거의 투표행태와는 달리 야당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보수언론을 비롯한 많은 매체에서 공세를 퍼부었지만 국민의 3분의 2는 정부의 ‘폭침설’을 신뢰하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의식을 보이기도 했다.2) 특히 참여연대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같은 시민운동단체들이 보고서 발표 등 정부에 대한 감시 및 견제의 역할을 수행했고, 이를 국제사회에까지 확장하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정부 조사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공식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
이 글은 천안함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즉 민군합동조사단(합조단) 보고서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4) 이 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논란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확인과정에서 2013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더 발전해갈 수 있는 가능성과 과제를 찾아보려 한다.
1. 천안함사건에서 나타난 정부 내 비민주주의
국방부는 2010년 3월 31일 합조단을 82명으로 구성했다가, 4월 12일 73명으로 재편성하여 조사를 진행했다. 연합군사훈련 도중 발생한 군 사고이므로 국방부가 조사를 주도해야 했다는 명분이 따를 수도 있으나, 군이 당사자인 사건을 군이 조사한다는 점에서 그 출발부터 한계가 있었다. 사건의 성격상 국방부에서 독립된 기구나, 사법부 또는 입법부, 아니면 민간 주도의 조사가 이뤄졌어야 함에도 국방부가 이를 주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사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제약했다. 조사 주체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못한 것은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밀주의의 보호 속에 민주적 감시・감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조사단에 민간인들을 참여시킨 것은 군의 투명성을 높인 진일보한 조치였다. 더군다나 최초 합조단 82명 중 민간인은 6명만 참가했던 데 비해 재편성 후 그 수가 27명으로 늘어난 것은 내부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5) 다만 ‘민간전문가’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나 국립해양조사원 등 국립연구기관이거나 삼성중공업이나 현대중공업처럼 국방부의 수주를 받는 관계에 있다는 점은 이들의 독립성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었을 가능성을 내비친다. 충남대와 울산대 교수 같은 학계나 국회에서 추천한 위원들만이 상대적으로 군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보면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민간인은 소수였을 것이다. 외국에서 파견한 전문가 24명은 기본적으로 군 내지 관으로 봐야 하고, 지원요원 98명 중 82명이 군인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합조단이 대부분 군이나 국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합조단의 독립성을 저해하고, 군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 구조적 한계가 합조단의 조사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우선 합조단 각 분과에서 조사 분석하여 보고한 데이터가 합조단 차원에서 내린 결론과 상반된다. 예를 들어 과학수사분과의 증거물채증팀은 해저 및 해역 함체에서 수거한 증거물을 분석한 후 “천안함사건에 사용된 어뢰의 파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금속은 식별하지 못했다”고 결론내린다(120면). 또 생존자 및 시신에 대한 검안 결과 “화상, 파편상, 관통상은 없었다”고 보고하고 “시신 대부분은 (…) 외상에 의한 사망 가능성은 적으며, 정황상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고 적시했다(132면). 그뿐 아니라 근접폭발시 충격파와 폭발소리에 의해 청각장애 환자가 다수 발행해야 하나 이러한 환자는 없었다고 인정한다. 근접폭발시 나타나야 하는 파손부위 열손상도 없었고(77면) 폭발 위치에 나타나야 하는 꽃무늬 모양의 파공도 남아 있지 않았다(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