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 제2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
푸어(poor) 공화국, 대한민국
정지은 鄭知恩
1981년생. 인하대 국문과 및 성공회대 NGO대학원 졸업. 현재 인천문화재단 재직중.
solbitur@gmail.com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다. 중심이 버티지 못한다
—윌리엄 예이츠 「재림」 중에서
근래에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신규 아파트의 불을 켜는’ 신종 알바의 등장이었다. 자신의 몸을 실험실 쥐처럼 내맡기는 제약사의 ‘마루타 알바’보다 어감은 좀 낫다고 위로해보지만 현실은 여전히 마루타 알바만큼이나 오싹하다. 이 ‘불 켜기 알바’는 미분양, 미입주로 ‘불 꺼진 아파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막기 위해 동원된 건설사의 고육지책이기 때문이다. 중도금 대출이자 대납, 분양가 할인, 잔금 유예 같은 혜택을 제공하는데도 잔금을 받지 못해 유동성 위기를 우려하는 건설사들의 사정이 다급하긴 한 것 같다. 짓기도 전에 팔아서 돈을 받을 수 있는 건설사도 이렇게 힘드니, 일을 모두 마친 후에나 돈을 받을 수 있는 개인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버는 건 어려워도 쓰기는 쉽다. 대한민국은 최저시급(2012년 기준 4580원)으로 김치찌개는커녕 햄버거 하나 사먹기 힘든 나라다. 알바생의 시급과 맞먹는 스타벅스 라떼 한잔은 4400원‘이시고’, 주문한 물건들은 ‘나오는’ 게 아니라 ‘나오신다.’ 이 이상한 높임말은 백화점에서 시작되어 어느 순간 동네 가게들에까지 전염되어버렸다. “신상품입니다”는 왠지 무례한 것 같고, “신상품이세요”라고 해야 손님이 존중받는 것처럼 느낀다나. 과도한 높임말이 문제가 되자 약삭빠르게 직원들을 동원해 ‘잘못된 높임말 추방 캠페인’을 벌이는 백화점도 등장했다. 그런들 저런들 물건이 사람보다 높은 지위를 획득하고, 가격에 따라 대접받는 게 당연해져버린 현실은 추방 불가능하다.
동네 구멍가게가 사라지고 24시간 편의점을 위시한 각종 프랜차이즈들이 동네 상권을 장악하면서 ‘돈의 맛’은 더욱 달콤해졌다. 돈을 내는 사람은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고객’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대접받는다. 표준화된 접객 매뉴얼에 따른 선진 경영기법의 일환인 셈이다. 아이가 돈을 낸다고 하대했다가는 언제 어디서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를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1)의 감시망에 걸려 서비스점수에서 낮은 평가를 받아 잘릴지도 모른다. 전자회사의 서비스센터 수리기사나 민영화된 공기업의 직원은 자신의 서비스를 이용한 고객이 ‘매우 만족’하셨다는 문항에 싸인하도록 애걸하기도 한다. 심지어 칭찬글을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려주면 더욱 감사하겠다고까지 덧붙인다. 물론 이때도 고객은 구매력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존중받는다. 사회적 관계가 배제된 경제적 관계에서는 돈이 절대적인 기준이다.
하지만 대접받는 것은 ‘고객’일 때뿐이다. 누구든지 한번 수렁에 빠지면, 아니 한번만 ‘삐끗해도’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IMF 경제위기와 유럽발 금융위기를 거치며 한층 공고해진 ‘빚-비정규직-빈곤 노동’의 악성 트라이앵글2)이 개미지옥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중산층이건 고학력자건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빚진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은 일해도 빈곤하며, 그들은 다시 빚에 노출될 공산이 크다. “적금이고 카드고 최후의 보루조차 사라져 앞으로 살 일이 걱정”인데 “아들이 이제 대학생”인 박민규의 ‘그’와, “매달 13평형 원룸의 월세와 의료보험, 적립식 펀드 한개와 적금을 부어갈 만한 생활력을 갖”춘 김애란의 ‘그녀들’3)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푸어(poor, 빈곤) 시리즈가 끊이지 않고 유행한다. 직장이 있고, 집이 있고, 교육을 받았어도 스스로를 빈곤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취직 전에는 스펙푸어, 가까스로 일하기 시작하면 워킹푸어, 결혼할 때는 허니문푸어, 집이 있으면 하우스푸어, 집이 없으면 렌트푸어, 아이를 가지면 베이비푸어, 교육시킬 때는 에듀푸어, 나이 들면 씰버푸어란 자조 섞인 농담이 나돈다.4)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 이후에는 프랜차이즈푸어(franchise poor, 퇴직금을 프랜차이즈 창업에 써버리고 가난해짐)가 양산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한국인의 인생은 하나의 푸어를 벗어나면 또다른 푸어로 전락하는 ‘푸어의 징검다리’ 구조에 빠져 있는 셈이다.
이러한 푸어들, 특히 비정규직은 정치를 비롯한 각종 사회적 네트워크와 이슈에서 소외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사회는 그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는다. 그들은 일단 선거 때 투표를 하러 갈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일례로 2012년 총선에서 인천의 투표율은 전국 꼴찌를 기록했는데, 혹자는 그 원인으로 인천에 소규모 공장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선거날 쉬는 대기업 사업장과 달리 중소제조업 종사자들은 공휴일에도 출근해야 하고 투표장에 가는 것도 사업주의 눈치를 봐야 해서 투표율이 낮다는 것이다. 물론 신문을 읽을 시간도 없다. 시간이 있으면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지 머리 아픈 뉴스는 보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사회 문제에 무신경해지거나, 관심이 있어도 근무시간이 너무 길어 참여하기 힘들다.
게다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무언가를 공유하며 소속감을 느낄 모임이나 조직이 전무하다. 비정규직, 파견직과 용역직의 일상화는 직장의 네트워크마저 파괴한 지 오래다. 같은 회사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일하지만, 월급과 직급은 물론이고 명절 선물까지도 각각 고용된 회사에 따라 다르다. 정규직은 쌀 20kg, 계약직은 스팸세트, A용역회사는 와인, B용역회사는 올리브유 같은 식이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해고 통보를 문자메시지로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찬호(金贊鎬)의 지적처럼 한국사회의 위기는 단순히 경제의 어려움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으로 부가가치 생산능력이 심각하고 급격하게 고갈되어가는 데 있다. 자본주의의 역설은 비자본주의적 영역, 즉 위와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얼마나 건실하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그 경쟁력이 보장된다는 점5)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도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방을 찾아 헤매는,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 세대
학교 선배가 그러는데, 요즘 계급을 나누는 건
집이나 자동차 이런 게 아니라 피부하고 치아라더라
—김애란 「도도한 생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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