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법의 정당성 위에 삶의 정당성을 재정위하라

정도상 장편 『은행나무 소년』

 

 

정은경 鄭恩鏡

문학평론가. 저서로 『한국 근대소설에 나타난 악의 표상』 『디아스포라 문학』 『지도의 암실』 등이 있음. lenestrase@hanmail.net

 

 

2031정도상(鄭道相) 장편 『은행나무 소년』(창비 2012)은 두개의 서사 축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재개발지역의 철거를 중심으로 한 갈등이고 또 하나는 주인공 만돌이의 성장담이다. 열두살 만돌이는 3년 전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외할머니와 재개발지역인 ‘천사마을’에서 단둘이 살아가는 외로운 소년이다. 어린 만돌이가 철거민들의 반대와 망루에서의 농성, 그리고 강제진압을 목격하고 또 한편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입원하게 되는 것을 겪으면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다.

이 소설의 주된 서사 모티프인 ‘재개발’과 ‘성장’은 단순한 소재에 그치거나 별개의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선 성장소설적 측면에서 보면, 만돌이는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질병과 죽음’이라는 생의 이면을 알아가는 한편 철거 현장을 통해 정의에 등 돌린 경찰의 세계, 즉 어른의 복잡한 산수를 알게 된다. 택시운전을 해가면서 생계비를 벌고 헌금은 몽땅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는 천사교회의 최목사님과 축재에만 관심있는 외삼촌 박예찬 목사가 이 세상에 공존한다는 사실, 목사와 스님이 종교를 초월하여 연대감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알아간다. 또한 ‘갑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만돌이는 용역 박정철의 도끼 번개 문신의 가슴이 아니라 포클레인에 맞짱 뜨는 여수경에게서 진짜 ‘갑빠’를 보게 된다.

성장소설의 일반적 특징인 입사의식,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상상계적 질서에서 상징계적 질서로의 편입은 이 소설에서 ‘은행나무’라는 객관적 상징물로 제시된다. 만돌이에게 엄마를 의미했던 은행나무(엄마의 뼛가루 상자를 묻었기 때문에)가 철거될 위험에 놓이자 만돌이는 밤새워 은행나무 곁을 지킨다. 그러나 결국 나무는 잘리고 만돌이는 뼛가루 상자와 함께 은행알 하나를 얻는다. 그 은행알은 화분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나는데, 그 새로운 생과의 만남은 만돌이에게 ‘엄마’로 대변되는 상상계적 질서를 벗어난 세계, 곧 선과 악, 죽음과 생, 모순과 부조리가 공존하는 상징계적 세계로의 진입을 뜻한다. 철거용역 박정철이 폭력깡패이기도 하지만 강제진압에서 철거민 어머니를 잃은 아들이자 그 역시 집을 잃은 철거민임을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그러한 인식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만돌이의 성장 모티프는 이 소설을 낡은 것, 죽은 것, 약한 것을 품는다는 의미에서 사랑과 생명의 에로스적 세계로 이끄는 한편 이 소설의 한축을 이루는 ‘재개발의 논리’는 강퍅하고 도식적인 죽음의 세계로 이끈다. ‘합리, 편리, 과학, 새로움’을 앞세운 재개발은 ‘낡은 것, 불편한 것, 더러움, 비효율성’ 등을 오염된 타자로 규정하고 없애버림으로써 획일적인 삶을 건축한다. 이렇듯 과거와 디테일을 매장한 도시의 축도는 외할머니의 치매로 표현된다.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의 기억 창고에서 기억이 하나둘 지워지듯, 천사마을 곳곳에 새겨진 굴곡 많은 생의 사연들은 포클레인에 의해 파헤쳐지고 묻히고 마는 것이다.

『은행나무 소년』은 표면적으로는 철거민의 패배, 곧 법적 정당성을 내세운 공권력에 의한 삶의 패배로 끝난다. 한겨울 철거민과 조합원이 경찰의 폭력에 패배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데, 이 비장한 패배는 불과 눈의 대조적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에피파니(epiphany, 현현)를 선사한다. “사람이 탄다. 얼어붙은 땅 위에서 몸을 구르지만 사람의 몸에 심지를 내린 불꽃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죽음의 불꽃춤이다. 사람이 운다. 울음소리가 새벽하늘을 가득 채운다. 사람의 울음을 군화가 짓밟고 곤봉이 때리고 방패로 찍는다. 사람의 울음에 불이 붙는다. 그 울음 위로 함박눈이 내려 소복소복 쌓인다. 불에 타는 사람이 눈사람이 된다. 다리가 없는 눈사람 위에서 사람의 울음이 얼어붙는다.”(291면)

장송곡처럼 울려퍼지는 장중한 장면 속에 철거민의 외침도, 악동 만돌이의 외로움도, 망루 위의 분신도, 경찰과 용역의 폭력도, 주민들의 반목도, 빈부의 갈등도 모두 덮이고 만다. 삶의 세목을 다 덮어버리는 절대적인 무기질의 세계는 독자를 숭고함으로 이끌어 침묵하게 만든다. 작가는 후기에서 “투쟁을 그리고자 하지 않았고 오히려 패배와 존엄성을 그리고자 했으며” “그 패배 속에서 소년은 자란다”라고 쓰고 있다. 저 침묵과 정지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작가가 우리들에게 안긴 ‘패배’ 속의 어떤 꿈틀거림일 것이다. 그 꿈틀거림은 웅성거리는 어떤 소리를 담고 있다. “폭력을 사용하는 권력은 이미 권력이 아니며 아무런 정당성도 없다. 그것은 권력 세력이 아니라 폭력 세력이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전언과 함께 들려오는 그 소리는 삶의 정당성을 법의 정당성 위에 재정위(再定位)하라는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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