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고달프고 억울한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문학

 

여기 사람이 있었다

르뽀, 죽음의 증언 그리고 삶을 위한 슬로건

 

 

복도훈 卜道勳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묵시록의 네 기사』 『눈먼 자의 초상』이 있음. nomadman@hanmail.net

 

 

1. 림보의 한가운데서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한 도시로/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1) 나는 단떼가 막 지옥문 앞에 도착해 읽은 문장과 최근 몇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잔인한 정치적・경제적 폭력의 참상 그리고 그로 인해 완전히 바스러진 삶과 죽음에 대한 참혹한 증언들을 어쩔 수 없이 몽따주하게 된다. 날것으로 육박해오는 것 같은 현실을 가공(架空)의 말로 버팀목 삼아 가까스로 견뎌내야 했다. 고통스러운 증언이 있고, 그 증언을 듣는 고통스러운 침묵이 있다. 하나의 고통이 다른 고통을 침묵 속에서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참혹한 살풍경에 대한 생존자와 기록자의 증언은 어떻게 말의 까마득한 공백을, 침묵의 컴컴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던 것일까. 나를 언어도단에 빠뜨린 몇몇의 르뽀르따주(이하, 르뽀로 약칭)는 자연사나 돌발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연사나 돌발사로 처리되고 마는, 철저하게도 그리고 처절하게도 정치적인 죽음에 대한 증언이었다.

해고노동자인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파트 베란다로 걸어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란 없다는 듯이 그 너머로 추락해버린 아내의 마지막 침묵, 망루에서 화염에 휩싸인 철거민들과 경찰의 끝내 들리지 않는 비명, 해고는 살인이고 철거는 죽음이며 이 모든 재난은 산재라는 도처의 피 묻은 절규, 해고에 저항하면서 죽어간 노동자들을 애도하는 추도사를 읽는 어느 목소리의 흐느낌, 법정에서 들려오는 심판의 목소리와 유가족의 항의, 한숨, 울음소리. 내가 있는 곳은 현실이었지만 그렇게 지옥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시인이 지옥의 입구 아케론강에서 들었던 온갖 “알 수 없는 수많은 언어들, 끔찍한 얘기들,/고통의 소리들, 분노의 억양들, 크고 작은 목소리들,/그리고 손바닥 치는 소리들”(3곡, 25~27절). 어떻게 저 소리들은 듣지 않으려 해도 끊임없이 들리고, 또 산 자가 죽은 자를 죽은 자가 산 자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면서 서로 부르며, 우리의 억울한 죽음을 너희가 살아 반드시 증언하라고 호소하는 돈호법의 형태를 띠고 있는가. 또한 그 돈호법은 도무지 외면하려 해도 끝내 보지 않을 수 없는 고르곤의 얼굴과 마주하라는 정언명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단떼의 지옥을 비스듬하게 거슬러야 한다. 또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지옥을 관상(觀想)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지옥을 빼닮은 현실 한복판에서 현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이상 단떼의 지옥은 하느님에게 영원히 버림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어난 선인(善人), 신성모독꾼, 협잡꾼과 사기꾼, 고리대금업자, 정치적 죄인이 영원히 고통받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지옥의 끝 모를 어둠은 천국을 감도는 과도한 광채와 찬양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완전히 투명한 빛으로 감싸여 천사들의 끝없는 할렐루야로 가득 찬 천국은 이제 후안무치한 1%의 자본가와 그의 하수인들이 희희낙락거리며 거주하는 그들만의 유토피아일 뿐이다. 과도하게 밝은 빛으로 둘러싸여 천사들의 합창소리를 들으며 천국의 권좌에 앉아 있는 하느님-자본에게 선고를 받아 죽어도 빚을 갚지 못하고 영원히 속죄해야 하는, “벌거벗은 지친”(3곡, 100절) 영육들이 오히려 지옥에 있다. 자본의 써치라이트와 할렐루야로 눈부시고 시끄럽기만 한 천국에서 무저갱에 있는 사람들은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면서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한국문학은 그 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보이지 않는 얼굴을 얼마만큼, 어떻게 보고 듣는 것일까. 그런데 어쩐지 아케론강과 화염으로 둘러싸인 진짜 지옥 사이에 있는, 흥미롭게도 수많은 문사(文士)가 거주하는 제1지옥, “희망 없는 희망”의 림보(limbo)에서는 “단지 한숨소리”만이 “영겁의 허공을/언제까지라도 떨게 하고 있었”다(4곡, 42절, 26~27절). 지옥의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실어증에 걸린 단떼처럼 한국문학도 말할 수 없는 것과 대면하여 겨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거기서 본 이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해야 할 긴 얘기가 날 앞으로 떠밀고,/말이 사실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으니”(4곡, 145~47절). 참으로 보고 들어야 할 이야기는 많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한마디도 제대로 발음하기 힘들다. 이러한 말할 수 없는 무기력을 그저 무관심과 무능함으로 간주하고 목청 높여 탓해야 하는지, 아니면 섣부른 현실참여에의 욕구를 미적 변용의 힘으로 적절히 제어하는 도중에 문학에 값하는 것의 도래를 천천히 도모해야 하는지.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미적 자율성과 문학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 시대의 참상에 대한 증언은 미와 형식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너무 직접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그럼에도 ‘말이 사실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또한 진실은 아닐까.

다큐멘터리 필름,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어쩌면 문학보다도 ‘말이 사실에 미치지’ 못함에도 거기에 도달하려는 현실대응력에서는 더 민첩하고 핍진할지도 모르겠다. 용산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2012)에서 용산철거민 사망사건 진상조사단원은, 어쩔 수 없이 멀리서 불타는 망루를 비추던 카메라가 용산참사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게 너무 없다는 굉장한 무력함의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력함이라고 해도 그것이 재현의 포기를 뜻하지는 않는다. 재현의 울타리를 넘나드는 목소리들은 계속 들려온다. 대물림한 빚을 떠안은 딸이 한 아버지에게 다른 아버지를 죽여달라고 기도한다. “저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제발 좀 죽여주세요. 제발 우리 아버지를 죽여주세요. 저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제발 우리 아버지 좀 죽여주세요. 제 눈앞에 우리 아버지 시체를 보여주세요. 하느님 아버지, 제발 좀 죽여주세요.”(영화 「화차」, 2012). 차라리 저주인 이 목소리는 곱씹을수록 더할 나위 없는 신성모독이다. ‘하느님 아버지’에게 ‘우리 아버지’를 죽여달라는 이 목소리에서 다른 두 아버지는 어느새 한 아버지로 합체된다. 그 순간, 소원은 저주이자 독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