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고달프고 억울한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문학

 

‘이미 와 있는 미래’의 소설적 주체들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평론으로 「재앙의 서사, 종말의 상상」 「이방인, 법, 보편주의에 관한 물음」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이미 와 있는 어떤 미래?

 

얼마 전 어느 대선주자가 인용하여 유명해진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문구가 있다. 지난 10,20년간 우리의 상상력을 제약해온 ‘대안은 없다’(TINA)라는 완강한 선언에 대항하는 것으로 이만큼 적절한 표현을 찾기도 쉽지 않을 듯싶다. 대안이 없기는커녕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에 씨앗으로 혹은 열매로 자라고 있으니 잘 알아보고 소중히 길러가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이 주장은, 그런 점에서 더없이 희망적인 소식이다. 그러나 어떤 문장이든 대개 하나 이상의 해석에 열려 있게 마련이듯이 약간 각도를 바꾼다면 이 문장 역시 긴급하고 엄중한 경고로 읽힐 수 있다. 돌이켜보면, 쉽게 알아차릴 정도로 널리 퍼지진 않았으나 이미 와 있던 것들, 그리하여 결국 미래를 장악한 것들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무시무시한 것들이 적지 않았다는 편이 실감에 가깝다. 이를테면 정리해고나 비정규직이나 강제철거 같은 사태를 떠올려보자. 이런 것들은 한때 일시적이거나 예외적이거나 기껏해야 지엽적인 사건이어서 나 혹은 우리의 미래가 되리라고는 좀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누구는 조금 먼저 또 누구는 조금 나중일지 몰라도 결국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믿음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던 탓도 컸을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바에 따르면 현재 우리는 정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구조적 위기의 시간, 말하자면 체제적 전환기를 살아가고 있다. 구조니 체제니 하는 게 너무 묵직한 단어다보니 그것들의 위기나 전환을 검증할 잣대조차 막연하다. 하지만 적어도 세상이 이제껏 그래왔던 대로 굴러갈 수 없다는 느낌만큼은 이 거대한 진단에 직관적으로 감응한다. 월러스틴의 주장을 좀더 따라가보면 지금이 체제적 전환기라는 인식만큼이나 유의할 사실은 이 전환을 통해 옮겨가게 될 또다른 세계가 “비교적 민주적이고 비교적 평등한” 세계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지금 이 체제의 특징인 위계와 착취와 양극화”를 다른 형태, 아마도 더 나쁜 형태로 재생산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1) 사정이 실제로 이러하다면 이미 와 있는 나쁜 미래의 형태들이 더욱 섬뜩해진다. ‘우리 중 가장 약한 자에게 일어난 일’이 곧 우리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크기 때문이다. 수사(修辭)의 면도 없지 않은 ‘우리는 99퍼센트’라는 구호가 가진 위력과 함의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더라도 한 개인이 20퍼센트 혹은 단 1퍼센트에게만 이미 와 있는 더 나은, 그래서 실은 더 나쁜 미래에 더는 사로잡히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극심한 양극화라고 해도 한 극의 1퍼센트에게는 하루하루 터무니없이 더 좋은 시절이고, 좋다는 것은 아무래도 욕망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또 양극화의 다른 극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삶은 그것대로 터무니없이 고달프기에, 나 또한 그리로 이끌리고 있다고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널리 퍼지지 않아 미처 보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저쪽의 좋은 것들에 사로잡혀 보지 ‘않는다’는 또다른 종류의 ‘비가시성’에 연루될 위험이 여전히 있다. 이런 두겹의 비가시성에 대항하는 일은 인식의 싸움이면서 또한 가치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이미 와 있는 미래’에서 갈라져나온 희망과 경고의 메시지는 이렇게 해서 하나로 수렴된다. 절대 다수의 더 나쁜 미래를 경고하며 이미 와 있는 지극히 고달프고 억울한 삶을 응시하면서, 거기서부터 역시 이미 와 있는 절대다수의 더 나은 미래라는 희망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선을 앞둔 한국사회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같은 의제들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는 것과 맥을 같이하여, 문학에서도 고달프고 억울한 삶에 대한 응시는 ‘현실의 귀환’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뚜렷한 경향으로 존재한다. 용산참사 항의와 희망버스 운동에 적극 동참한 문인들의 움직임이나 문학과 사회현실의 관계를 새롭게 고민한 ‘문학의 정치’ 논의도 크게 보아 그런 경향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많건 적건 문학이 억압과 고통을 다루지 않은 시기란 없었지만 새삼 ‘귀환’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정면 응시’에 해당하는 작품이 한층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들은 가령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의 삶을 역설적인 신선함으로 그려보인다든지 현실의 압박에 일시적이나마 숨통을 트기 위해 발랄하게 의미의 뒤집기를 시도한 사례와는 또 다르게, 기발한 발상이나 차별화된 수식으로 완화 혹은 전환되지 않는 바로 그대로의 억압과 고통을 직시하는 방식으로 ‘문학의 정치’를 감행한다.

이 글에서는 그렇듯 고달프고 억울한 삶을 집요하고 정직하게 응시한 소설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이미 와 있는 것으로 포착된 경고와 희망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거기에 그려진 소설적 주체들이 어떻게 나름의 방식으로 억압과 고통에 맞선 싸움을 수행하는지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오늘의 고달픔과 억울함을 강제하는, 이미 와 있는 나쁜 미래의 성격을 탐구한 논의를 경유하기로 하자.

 

 

2. 우리 시대의 과잉 억압

 

우리 시대의 억압이 취하는 특별한 폭력성을 포착한 논의라면 ‘피로사회’라는 탁월한 명명(命名)으로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은 한병철(韓炳哲)의 분석을 빼놓을 수 없다. 피로사회 혹은 ‘성과사회’라 할 수 있는 현재는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폭력을 부과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그는 대표적으로 아감벤(G. Agamben)을 지목하여 “주권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폭력의 공간구조적 변화를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이러한 시대착오로 인해 (…) 오로지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정성의 폭력에 국한”하는 오류를 비판한다.2) 한병철에 따르면 성과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착취는 자유롭게 그리고 최대한으로 스스로를 실현하라는 압박의 형태로 행해지는 ‘자기착취’로서, 성과주체는 살인적 노동시간이나 학습시간을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심지어 그것을 완수하는 데서 어떤 자유의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된다. ‘자신과의 싸움’이라거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 같은 상투어들이 암시하듯이 이제 착취의 매개가 되는 경쟁 또한 다른 개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관계적” 성격을 띠며 이기고 지는 결정의 순간이 결코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대적 경쟁”이 된다.3)

이렇듯 자발적으로, 나아가 흡사 가치에 헌신하듯 적극적으로 착취과정에 스스로를 내어주게 만드는 긍정의 폭력은 극심한 피로와 소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나, 그런 피로와 소진마저 이 거대한 긍정성에 언제나 이미 포섭되어 있을 공산이 크다. 한병철이 묘사하는 피로사회의 자학적 주체는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소비주체라거나 끝없는 자본축적과 연동된 욕망주체를 둘러싼 분석을 일정하게 연상시키면서도 착취의 일선 현장인 노동과정까지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준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의 담론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착취 기제가 구사하는 긍정성 과잉의 전술을 상당히 설득력있고 실감나게 제시한 반면, 과잉을 강조하다보니 자칫 이를 전일성(全一性)으로 승격한다는 인상도 적잖이 남긴다.4)

다른 한편 우리 시대의 착취에 연루된 과잉을 사뭇 다른 언어로 진단한 논의도 있다. 폭력 일반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에띠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사회적·역사적 폭력에는 권력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탐닉의 요소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 요소를 “폭력의 가장 ‘과도하고’, 가장 ‘자기파괴적인’ 부분”, 다시 말해 “잔혹성”(cruelty)으로 정의한다.5)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잔혹성이 “특별히 현재성을 갖는 문제”라고 한 것인데, 그 근거의 하나로 제시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빈곤층이 겪는 과잉 착취로서의 “내재적 배제”(internal exclusion)이다.6) 발리바르는 물론 노동착취와 실업의 고전적인 형태에도 언제나 잔혹성의 요소가 있었으며 자본주의 경제란 원래부터 단순한 착취가 아닌 “착취의 과잉”(excess of exploitation)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정당하게 지적한다.7) 다만 현재 벌어지는 노동에서의 배제는 전체 임금수준을 낮추기 위한 잠정적 상태로서의 실직이라는 고전적 성격을 넘어서며, 이 새로운 빈곤층은 배제되는 와중에서도 시장의 틀을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한층 고통스런 상황임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긍정과 잔혹이라는, 언뜻 전혀 다른 개념을 구사하고 있으나 두 논의는 상당한 공통점도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양자 모두 오늘날의 착취가 어떤 과잉을 내포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과잉은 착취의 용이성과 관련된다. 과잉으로서의 긍정이 당사자의 자발적 동의를 조직함으로써 착취를 더욱 용이하게 만든다면, 과잉으로서의 잔혹은 동의 여부에 개의치 않는, 혹은 언제나 이미 동의가 전제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용이함을 구축한다. ‘적정 수준’이라는 잣대가 부과할 한도나 제한에 얽매이지 않는 ‘과잉’이기에 터무니없이 수월해진 착취인 것이다. 그렇듯 어떤 한계에서도 자유롭기 때문에 긍정성과 잔혹성에 포획된 주체는 극심한 소진과 파괴의 위협에 노출되며 말하자면 (비자발적) 자발적 부역자와 희생자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현실에서 긍정과 잔혹 둘 다 완벽하게 작동되거나 순순히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폭력과 그것들의 공모와 변주가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난제에 문학적 주체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피는 일은 현실에 귀환한 문학의 면면을 헤아려보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3. 비현실성의 현실성: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일찍이 이 난제에 자못 용감하게 맞선 소설로 박민규(朴玟奎)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 이하 『파반느』)를 떠올린다면 얼핏 느닷없어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파반느』가 직조하는 애절한 연애담이 “정치적인 사랑이야기들”8)에 속한다면,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말하는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차이에 관한 새로운 진리 하나를 생산”9)한 사랑이라면 마땅히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을 통해 정련되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파반느』의 화자가 사랑을 얻은 자신을 두고 “역시나 결국 여당과 독재자에게 그 이익이 돌아간다 해도 … 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천문학적 이익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 게 아닐까”(157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사랑을 잃은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고 “큰소리치는 인간도… 결국 독재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도… 실은 그래서 사랑에 실패한 인간들”(300면)이라고 하는 대목도 이 작품의 사랑이 세계와의 대결의식을 내장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사실 박민규는 세계의 실상을 포착하는 작업을 특히 지속적으로 수행해왔고 그런 만큼이나 이 현실이 어떻게 우리를 동원하는가, 다시 말해 우리를 어떤 주체화과정에 연루시키는가 하는 또다른 ‘거대담론’적 문제를 남달리 의식적으로 천착해온 작가였다. 가령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 2003)에서 그는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279면)가 ‘긍정성’을 통해 모두를 자기착취로 내몰고 있음을 진작부터 묘파한 바 있다. 누구라도 “도무지 야망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못 살겠단 생각”(31면)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파반느』 역시 그와 같이 ‘긍정’의 힘으로 모두가 같은 것을 지향하게 만드는 사태를 날카롭게 포착하면서도, 여러차례 등장하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라는 대구를 통해 긍정(부러움)이 그 자체로 폭력(부끄러움)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층 강조한다.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하나의 전구를 터질 듯 밝히면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하지. 실은 골고루 무수한 전구를 밝혀야만 세상이 밝아진다는 걸 몰라.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또 자신의 주변은 어두우니까… 그들에게 몰표를 던져.”(186면)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야. 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 거지. 안 그래도 다들 시시하게 보는데 자신이 더욱 시시해진다 생각을 하는 거라구. 실은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것없는 여자일수록 가난한 남자를 무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야. 안 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더더욱 불안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220면)

 

위의 인용에도 나타나는바, 『파반느』에서는 특히 긍정성의 폭력이 순전히 ‘자기관계적’ 성격일 수만은 없고 ‘우리 중 가장 약한 자’ 혹은 ‘내재적으로 또 한번 배제된 자’를 향한 잔혹성을 부추기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못생긴 여자’는 백화점 여직원으로 고단하게 살아가는 데 더하여 “그 자리에 존재함을 인정”(83면)조차 받지 못하는 이중삼중의 고통에 시달린다. 더욱이 ‘못생긴 여자’의 어쩔 수 없는 가시성은 부끄러움과 부러움의 잔혹성 또한 가장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만든다. 살아보려고 해도 “다 스러져가는 철거민의 단칸방을 허물고 불태우듯”,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해도 “세상은 못생긴 여자의 발버둥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282면). 그렇듯 긍정성은 결코 순수하게 그 자체로 작동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전일적일 수도 없다. 한구석에서 잔혹이 발휘되지 않고서는 긍정의 과잉이 가능할 리 없고 긍정의 과잉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잔혹이 묵인될 리 없는 것이다.

더욱이 『파반느』는 요한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 중 다수가 이런 긍정과 잔혹의 회로에 갇힌 우둔한 존재임을 신랄하게 냉소하면서도 궁극적으로 그것은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174면)가게 만드는 기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308면)를 질문한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은폐한 ‘적대’의 선을 놓지 않는 힘은 무엇보다 작품의 세 중심인물들이 실제로 각자의 자리에서 힘껏 부러움과 부끄러움의 논리에 저항하고 차이를 도입하는 데서 나온다.10) 이 작품에서 그런 차이에 해당하는 사랑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가는 거야. (228면)

 

이렇듯 미래를 ‘이미 와 있게’ 만드는 역설의 실천이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어느만큼의 비현실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것이 없고서는 새로운 현실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런 비현실이야말로 현실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보아야 한다.

 

 

4. 과잉에는 과잉으로: 『테러의 시』

 

대결의식의 강도로 치면 김사과의 작품들이 세계를 겨냥하여 발산하는 에너지를 넘어서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미나』(창비 2008)와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2009)를 거쳐 『테러의 시』(민음사 2012)에 이르는 김사과의 소설에는 압력으로 팽팽하게 눌렸던 에너지가 사정없이 분출되는 장면들이 등장할 뿐 아니라 그런 압력이 현재의 세계가 부과하는 억압이란 사실도 분명하다. 긍정과 잔혹으로 본다면 그의 작품은 단연 잔혹에 몰입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가령 『미나』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도발적인 폭력주의자”인 수정이 체현하는 잔혹은 “세계의 폭력”이 “그 세계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개인에게 이전되어 기계적으로 학습되고 반복적으로 수행”된 것이라는 점에서11) 일종의 긍정을 함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어떤 종류의 긍정인지, 그리고 그것이 반복하는 세계의 잔혹이 어떤 의미인지가 문제가 될 것이다.

『테러의 시』는 잔혹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온갖 종류의 폭력이 넘쳐난다. 주인공 제니의 삶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도대체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정도의 물리적 폭력으로 가득하다. 더욱이 사실적 정황의 묘사를 상당부분 생략하는 가운데 폭력이라는 사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잔혹은 극대화된다. 폭력에 노출된 자에게는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장르나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의 머리모양 따위가 중요할 리 없으며 오직 폭력 그 자체만이 압도적인 현실이리란 점에서, 그같은 선택적 묘사는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 강간과 인신매매와 성매매 희생자, 불법노동자와 불법체류자를 차례로 거치는 제니의 여정은 또한 ‘내재적인 배제’ 그 자체이기도 하다. 마음대로 처분될 위험에 있으나 희생자로 셈해지지도 않는 삶, 말하자면 ‘벌거벗은 생명’의 전형이다.

그런데 『테러의 시』에서 폭력과 착취의 잔혹성만큼이나 두드러진 요소는 다름아닌 제니 자신이다. 괄호로 지시되는 비어 있는 존재로 출발한 그녀가 제니라는 이름을 얻는 정황 자체가 폭력적인 우연의 과정이었던데다, 대체로 그녀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저항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감정적・정신적 충격이나 갈등 없이 그저 받아들인다. 그런 태도가 여하한 의식적인 순응, 다시 말해 (지독히 자학적인) 긍정의 결과라기보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아니”(33면)었기에 더 소진될 수도 더 파괴될 수도 없다는 데서 나온다는 사실이야말로 문제적이다. 제니의 ‘미()주체’ 혹은 차라리 ‘비()주체’로서의 성격은 “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게 뭔지 알아?”(140면), “이제 제니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더이상 말할 것이 없다. 텅 비어버렸다”(180면) 하는 식으로 소설 안에서 여러차례 반복적으로 상기된다. 그같은 ‘주체의 죽음’에 일말의 포스트모던한 환영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것, 그것이 철저히 세계의 폭력에서 기인한 억압임을 보여주는 것이 또한 김사과의 정치성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과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가능하며 『테러의 시』의 제니가 그런 존재인가? 그녀는 ‘안 좋다’는 분명한 느낌으로 정박사를 떠나 리에게로 가고, 아무도 구할 수 없는 휴머니즘이 역겨워 구역질을 하며, 그녀를 쫓아내려는 페스카마의 다른 사람들에게 대들고,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208면)을 망정 리를 사랑한다고 의식한다. 무엇보다, 환각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 환각 속에서나마 그녀는 폭력에 시달린 자신이 “정확히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것에 대해 내가 정확하게 상세하게”(213면) 말하고 싶어하며 심지어 가해자를 처벌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기를 강요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제니의 ‘주체성’의 증거는 아무래도 세계의 잔혹을 가장 처절하게 증언해줄 그녀의 비주체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테러의 시』의 기본적인 초점이 후자에 있으므로 사실상 흔적으로만 드문드문 허용된다. 애초에 ‘시’를 표방한 이 소설이 뒤로 갈수록 사실적 정당성과 함께 시적 긴장마저 현저히 흔들리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과잉 폭력에 인식적 혹은 미학적 과잉으로 대응하려는 김사과의 기획에는 늘 이런 관념성의 위험이 동반하고 있었다. 『테러의 시』에서 주체와 비주체의 균열은 다른 어떤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마침내 완전한 비존재를 의지하는 존재라는 형태로 파괴적 합일을 도모한다.

 

서로의 살을 씹고 서로의 뼈를 부수는 소리가 바닥을 흔든다. 네개의 피투성이 손이 부서진 몸을 더듬는다. 그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더이상 환각 속에도, 현실에도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이 없으므로, 더이상 아무도 그들을 불러낼 수 없다. 이제 그들은 (…) 아무도 쫓아올 수 없을 때까지,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을 향해, 더 멀리,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까지, 자취마저 지워질 때까지 서로를 으깬다. 완전히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그래서 더이상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다시 시작할 수 없도록, 그리하여 모든 게 진짜로 텅 비어버릴 때까지. (219면, 강조는 인용자)

 

여기에서 시스템의 작동에 진정한 위협을 가하는 “‘불길한’ 수동성”을 읽어내는 것은12) 소설의 관념성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이지 거기 담긴 정치의식에 대한 합당한 대접이 아니라고 본다. 파괴적 자기소진을 의지한 다음에도 “서서히 문이 열리고 문득 제니는 자신이 여전히 서울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219면) 것으로 소설은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으깨버린다 해도 “모든 게 진짜로 텅 비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듯이, 모든 게 건재하다 해도 자신이 “진짜로 텅 비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진작 인정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바로 그만큼이 이토록 비타협적으로 보이는 『테러의 시』가 억압의 비가시성에 지불한 ‘긍정’의 양일 것이다.

 

 

5. 여기 사람이 있다, 언제나: 『파씨의 입문』

 

과잉에 과잉으로 맞서고자 한 김사과의 기획과 묘한 대척점을 이루는 것이 황정은(黃貞殷)의 작품이다. 이를테면 제니만큼은 아니라도 그 나름으로 무척이나 고달프고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의 그림자』를 두고 하나같이 서정성을 지적했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더욱이 그 이야기는 일어서는 그림자라는 장치로 ‘비존재’의 위험마저 섬뜩하게 담았던 터였다. 어떤 잔혹함이든 황정은의 시선을 거치면 과잉의 양상이 탈각되는 이 독특한 정제의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소설집 『파씨의 입문』(창비 2012)에서 대부분 가난하고 서러운 삶을 그리고 있으며, 하나하나로서는 평범한 듯 보이는 산문적 문장들의 길이와 호흡을 조절하여 시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여전하다.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구어체의 리듬을 잃지 않는 이 문장들은 담담한 서술처럼 진행되면서도 어떤 진정성의 분위기를 실어나른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효과의 하나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상황이라도 거짓일 리 없을 것 같은 믿음이다. 이를테면 「낙하하다」의 시작은 이렇다.

 

떨어지고 있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검은 공간을 하염없이 떨어져내릴 뿐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고 생각해두었다. 삼십년은 지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득하다. 삼일 정도 지났을 거라고 생각해도 아득하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그렇게 생각하기로 생각해두었다. 삼년째 떨어지고 있다.(61면)

 

이렇게 말하는 데는 어떤 진실성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끝없이 낙하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면 화자가 “지옥일지도 모르겠다”(69면)고 생각할 정도의 이 암담함에도 도무지 ‘패닉’하지 않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대신 그녀는 그처럼 쓸쓸하면서 무서운 상황에 놓인 또다른 사람의 이야기, 자신이 그럴지도 모를 “입을 꼭 다문 얼굴, 말이 졸아붙은 듯한 얼굴, 더는 꿈꾸지 않는 듯하고 실제로 꿈꾸는 데 익숙하지 않은” “완고한 얼굴”(73면)이 되어버린 또다른 사람을 기억해낸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막막한 자리에서 도달하는 공감과 연민 덕분에 ‘끝없이 낙하한다’는 화자의 비현실적 상황은 하나의 상징적 현실성을 획득한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가난을 그리면서도 구태여 비장하거나 격앙된 어조를 택하지 않는다. 「양산 펴기」는 대학을 나오고 직장이 있으면서도 장어 하나를 먹자거니 말자거니 싸우기까지 하다 급기야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이른바 ‘워킹푸어’에 속하는 인물을 그린다. 이야기는 그 반나절 동안의 양산 파는 아르바이트를 찬찬히 따라가면서 진행되는데, 바자회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 팔아야 하는 양산의 생김새, 중간에 비가 와서 판매대를 접어야 했던 것이나 구청 화장실에 갔던 일 등 특별히 사건이랄 것도 아닌 에피소드가 아무렇지 않게 나열되고 있지만 바로 그런 아무렇지 않음에서, 아무럴 수가 없는 삶의 고단함이 점점이 묻어난다. 때마침 벌어진 철거민들의 시위 구호와 바자회의 호객 구호가 “국산 빤스 나와라 양말 세켤레 구청장 오천원 전통 있고 몸에도 좋은 우리 생존권”(147면)으로 뒤섞이는 장면도 우스꽝스럽기보다는 마찬가지의 고단함이라는 연결점을 만들어낸다. “곰 같은 것이 곰 같은 표정으로 버티고”(138면) 있던 화자가 어느새 목이 쉬도록 양산을 팔고 돌아오는 버스 바깥의 풍경도 다를 바 없다.

 

버스가 신호를 받고 멈췄다. 보리갯 떡 보리갯 떡, 하는 소리가 뒤로부터 다가오더니 엔진소리 요란한 트럭 한대가 내가 앉은 자리에 나란히 멈춰섰다. 짐칸에 실린 아마도 보리개떡이 담겼을 스티로폼 상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보리갯 떡 보리갯 떡 보리 떡 보릿 떡, 하며 놀 듯 노래하듯 확성되는 소리와는 다르게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피로에 눌린 듯한 모습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다른 말도 없이 보리갯 떡 보릿 떡, 하고 반복되는 소리를 노곤하게 듣고 있다가 눈물이 글썽 고인 채로 집까지 실려갔다.(152면)

 

이 과장 없는 장면이 만들어내는 애잔함과 말없는 공감은 독자의 자리로도 고스란히 옮겨온다. 그렇듯 글썽 고인 눈물에 연민 혹은 자기연민이 섞여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분노보다 반드시 덜 정치적이라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눈물의 주체가 긍정 과잉의 주체가 아니고 좀체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굳이 잔혹이 아니라도 살아가는 일의 고단과 서러움이 왜 늘 반인간적인 과잉억압인지 증언한다. 비록 화자는 내일 아침 오늘의 고단을 또 그저 이어갈 뿐이라 해도, 「양산 펴기」가 기록한 반나절의 시간을 거치며 그의 삶은 온전히 한 ‘사람’의 그것으로 재발견되었다. 이렇게 살아도 온전히 사람이지만 온전히 사람이기에 이렇게 살아서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듯 황정은의 소설은 어떤 과잉에도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현실의 과잉을 폭로하며, 한 사람 한 사람 인간적 존엄을 갖는 주체를 복원하는 방식으로 여기에 언제나 ‘사람이 있음’을 선언한다.

 

 

6. 이미 가진 것과 아직 갖지 못한 것

 

우리 시대의 문학을 현실로의 귀환이라 부른다면 두겹의 비난을 자초하는 셈이다. 도대체 무엇이 현실인가 하는 난해한 주제를 단순화했다는 의미에서 그렇고, 현실에 관한 무수한 해석 그 어떤 것에서도 문학이 결코 떠난 적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니 유독 고달프고 억울한 삶의 응시를 현실과의 대면이라 보는 것은 많은 해명을 요구하겠지만, 그런 ‘당파적’인 판단이 현재 우리 사회 절대다수가 갖는 현실감각에 조응하리라 믿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엇이 현실인가 하는 규정은 결국 정치적 사안인 것이다. 그렇다면 귀환은 어떨까. 이 수사를 떠받치는 문학적 성취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미 와 있는 나쁜 미래와 치열하게 대결한 앞의 소설들로 답을 대신하는 수밖에 없다.

박민규, 김사과, 황정은의 작품은 소설적 주체들을 때로 가혹한 자기비판과 파괴, 때로 험난한 재발견과 재구성의 과정에 나서게 하면서 이미 와 있는 나쁜 미래와 맞선다. 그런데 이미 와 있는 나쁜 미래를 과잉 억압의 형태로 규정할 수 있다 해도, 어떤 상태나 정도를 가늠하고 분류하는 듯 보이는 ‘과잉’이란 말 역시 실은 상당한 모호함을 내재한 표현이고 ‘억압’과 결합할 때는 더구나 그러하다. 억압이 없는 상태를 기준으로 한다면 억압의 존재 자체가 곧 과잉이다. 앞서 발리바르가 상기한 대로 착취의 고전적 정의가 바로 과잉 착취였듯이, 존재하는 순간 언제나 ‘더 많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과잉은 억압의 본래적 속성이라 볼 수 있다. 반면, 널리 퍼진 미래가 되어버린 경우라면 어떤 과잉 억압도 이미 과잉으로 경험되지 못한다. 가령 성과주체의 긍정성 과잉도 부정과 저항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에서만 과잉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일화된 과잉이란 애초에 형용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잉 억압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엄중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과잉 자체에 함몰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테러의 시』의 기획이 노정한 일정한 자가당착도 그와 관련될 것인데, 여기서 이미 와 있는 더 나쁜 미래를 경고하는 작업과 이미 와 있는 더 나은 미래를 알아보는 작업이 떨어질 수 없는 과제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는 대안의 제시 같은 진부한 요소가 아니라 문학이 갖는 어떤 수행적(performative) 힘을 가리킨다. 박민규의 ‘사랑’이 그러하고 황정은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미 가진 것으로 그려냄으로써 왜 아직 갖지 못하는 것이어야 하는지 묻는 일, 그리고 아직 갖지 못했음을 드러냄으로써 이미 가진 것으로 복원하는 일이 문학의 주체가 현실과 맞서는 유력한 수행적 형식일 것이다.

 

 

1) 이런 대목은 월러스틴의 저작 도처에서 발견되지만 인용은 2012년 9월 17일~18일 경희대에서 개최한 학술대회 발표문 “The Politics of a Civilizational Transformation”에 따른 것이다.

2)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108~109면. 한병철은 푸꼬의 규율사회 담론도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갖는다고 본다.

3) 같은 책 101면.

4) 이를테면 그는 긍정성의 과잉이 적대와 갈등을 완전히 묻어버리는 데 성공한 것처럼 묘사할 때가 많아서, 그의 논의 자체가 알게 모르게 적대와 갈등의 비가시화에 한몫한다고 볼 여지도 있다.

5) Étienne Balibar, Politics and the Other Scene, tr. Christine Jones, et al., Verso 2002, 135~36면.

6) 같은 책 141면.

7) 같은 책 142면.

8) 한기욱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402면.

9)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조재룡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52면.

10) 『파반느』가 그리는 사랑이 비현실적 혹은 낭만적 환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특히 결말에 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제시한 논의로 백낙청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 40~42면(『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에 보완 재수록) 참조.

11) 심진경 「무서운 소설, 무서운 아이들」, 『자음과모음』 2012년 봄호 179~80면.

12) 이경재 「장편소설의 새로운 가능성」, 『창작과비평』 2012년 가을호 450~51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