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토록 명랑한 세계

이병일 시집 『옆구리의 발견』

 

 

남승원 南勝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결손과 소모의 시읽기 그라운드 제로에 선 소설들 댄디들의 외출 등이 있음. epist@hanmail.net

 

 

2031이병일(炳一)의 시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평범한 우리의 삶을 꼼꼼하게 복기하고 있는 그의 시들은 슬로비디오처럼 삶의 현장을 느리게 관통한다. 시작은 이렇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밤, 흙벽 너머 들리는 아버지의 기침소리와 모과차가 풍기는 향(「소한에서 대한 사이」). 일찍이 백석(白石)이 보여주었던, 하지만 그 어떤 시인이 보여주기 이전부터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일종의 기원적 풍경들이다. 이병일은 구체적인 장소와 결부된 개인적 경험들을 근거로 이 풍경을 담담하게 풀어간다. 맹목적인 추억의 열기를 덜어낸 이 장면들에서는 “영양주사”를 맞고 “농협 들러 막내아들 대학등록금”을 보내는 “일흔다섯살의 아버지”의 모습까지도 평화롭게 그려진다(「어떤 평화」).

이 같은 인식이 가능한 이유는 이병일의 시적 배경에 자연의 모습이 공통적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을 동물원에서처럼 삶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통제와 조절을 통해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희로애락과 맞물린 채 돌아가는 거대한 톱니바퀴로 보여준다. 즉 그에게 배경으로서의 자연은 ‘시적인 것’을 도출시키는 이상화된 시공간이 아니라 삶의 현장 그 자체이며, 궁핍하고 처절한 우리 삶의 모습은 다시 그대로 자연의 일부가 된다.

자세한 모습은 이렇다. 멀리 바다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배 한척. “수평선을 감고 있는 새우잡이 닻배가 웃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배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그곳은 “배때기를” 걷어차이면서, 또는 “고막이 터진 귀를 닦아”내면서 하루를 보내는 노동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상과 폭력이 구별되지 않는 공간에서 시인은 ‘우리들, 나’와 같은 개별적인 존재들을 폭력의 피해자로 등장시켜 고통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는 데 몰두한다. 그리고 폭력의 주체는 ‘당신’이라는 흐릿한 호명 속에서 오히려 우리 주변에 만연한 모습으로 자리잡는 데 성공한다. 주제적 측면에서, 이같은 폭력적 현실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폭력의 피해자인 ‘나’가 자신의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의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진술에 이르면 우리는 다소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새우잡이 닻배가 웃는다」). 그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구별 가능하고 그에 따른 선악의 기준 역시 명확하다고 여겨왔던 것들, 이를테면 가해자와 피해자, 고통과 일상의 경계가 무너져버리는 데서 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병일을 통해 우리 시의 새로운 개성을 만난다. 그는 지난 시기 우리 시문학이 조금씩 확장해온 길을 충실히 따라가는 한편, 새로운 길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길에서 탈락한 것들이 뒤처진 채 “숨 가쁘게 썩는 부패의 힘”에 주목한다(「어느 똥통 지옥」). 따라서 그의 꼼꼼한 시선이 느릿하게 지나간 자리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걸작의 맛”으로 다시 태어나거나(「닭발이 없었다면」), “치욕을 통째로 삼키”고 있는 “부패 속에서” 새롭게 “환함”이 피어오른다(「물옥잠」).

그림을 그려보면 이렇다. 1865년 마네(E. Manet)가 아카데미 쌀롱에 제출한 「올랭피아」. 유례없는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 작품. 그러나 시선 뒤로 은폐되고 알려지기 두려워한 치부를 당시의 사람들 앞에 과감하고 명랑하게 드러낸 이 한장의 그림은 실제의 모습 그대로 현실을 통째로 전도시키면서 근대회화의 시금석이 된다. 이병일은 그림과 같은 제목으로 ‘올랭피아’를 다시 한번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이에 대한 자신의 각별한 관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만의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부분은 그림의 모델을 “영롱한 꽃병”으로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상의 형태적 완결미보다는 기능적 측면을 가능하게 만드는 부분, 즉 그림 속 ‘올랭피아’가 그랬듯이 수동적인 대상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끝없는 열림”을 추구하는 시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좌충우돌의 “방탕”에 그치고 말 것인지, 또는 “해탈”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이 될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올랭피아」). 하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궁핍과 공포가 박혀 있는” 곳에 대해 “방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다만 느리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일 뿐이므로 좀더 그를 신뢰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순간 그의 ‘명랑함’으로 순식간에 전도된 세계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날 때까지(「명랑한 남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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