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제1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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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崔正和

1979년 인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daysmare@hanmail.net

 

 

 

팜비치

 

 

그는 텐트 안에서 반소매 티와 칠부 카고팬츠를 차례대로 벗고 이월상품이라 인터넷에서 육십퍼센트 할인가격으로 구매한 야외용 수영팬츠를 입었다. 수영팬츠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기하학적 무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형광색으로 프린트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해골 모양이었다. 아내가 어째서 그런 디자인을 선택한 건지 의아했지만 그는 옷의 스타일에 그리 민감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촌스러운 무늬에 대해서는 금세 잊어버렸다. 해변에서의 수영은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수영복 차림이 낯설었다. 그는 속옷을 입은 채로 수영팬츠를 입었다가 잠시 망설였다. 속옷을 입고 수영복을 입어야 할지 속옷을 벗고 입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그는 결국 수영팬츠를 벗고 속옷을 벗은 뒤 다시 수영팬츠를 입었다. 발가벗은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발가벗겨 마당에 세워놓았고 동네 친구들이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그는 끔찍이도 두려웠다. 이후로 그는 아이를 훈육할 때 절대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해왔고 불가피하게 체벌을 해야 할 경우는 회초리를 사용했으며 매질을 할 때 감정이 실리지 않도록 엄격히 자제했다.

그는 삼십대 중반이었지만 또래에 비해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엉덩이는 탄력을 잃었고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선 채로는 자기 발가락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일어서서 양말을 벗다가 비틀거렸다. 제기랄. 그는 자신의 균형감각에 대해 의심하기보다는 비좁은 텐트를 탓하는 쪽을 택했다. 양손으로 양말을 쥔 채 두어번 자세를 바꾸다가 포기하고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텐트 바닥 밑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딱딱한 자갈이 엉덩이에 배겼으나 그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묵묵히 양말을 벗어 두개를 반듯이 포갠 뒤 목 부분을 한꺼번에 접어 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했다. 이어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풀었다. 백금으로 도금한 그 시계는 처남이 선물한 스위스제 워터 프루프였지만 설명서에는 그걸 끼고 헤엄을 쳐도 된다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찜찜했다. 그는 시계를 들고 머뭇거리다가 바지주머니에 넣었고 그걸로는 안심할 수 없었는지 바지를 둘둘 말아 셔츠 밑에 두었다. 텐트 안에 있으니 자신이 지나치게 둔하다고 느껴졌다. 너무 뚱뚱해서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초등학교 동창이 떠올랐다. 그애는 입학할 때 체구가 이미 졸업반 선배들과 비슷했고 졸업할 때 몸무게는 교장선생님을 앞질렀다. 그 뚱보에게서는 항상 오래된 액체풀 냄새가 났는데, 그는 어디선가—어쩌면 자신의 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콧구멍을 두어번 벌름거렸다. 동창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자 그는 서둘러 텐트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썬글라스에 챙이 넓은 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짚모자는 자그만치 이십오만원짜리였다. 가격표를 잘못 읽은 그는 모자의 가격이 이만오천원이라고 생각하고 모자가 아내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다. 아내는 벌써 스무개째 모자를 쓰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는데 그의 눈으로는 그 스무개의 모자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나같이 둥그런 모양에 짙은 누런색이었고 한가운데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는 아내가 대체 무얼 망설이고 있는지 몰랐고 직접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갔다. 직원이 일시불로 할 건지 할부로 할 건지 물었을 때 그는 자기가 동그라미 하나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아내의 들뜬 얼굴을 보고 사태를 되돌리기에 좀 늦었다는 걸 알았다. “3개월로요.” 그는 공들여 천천히 서명했고 낮은 기계음과 함께 기다란 영수증이 나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갑을 열고 영수증을 쑤셔넣었다. 지갑 속은 이달 말까지 그가 처리해야 할 영수증들로 불룩했고 그는 거기에 한장을 더 추가하면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이처럼 정확히 수치화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러나 잠시 무력감을 느꼈을 뿐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신조를 떠올렸다. 그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만큼 작은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린 뒤 재킷 안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모자가 든 커다란 쇼핑백을 든 아내는 이번에는 왕골 비치백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당신이 사준 이 모자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아내는 ‘당신이 사준 모자’라고 또박또박 발음하면서, 비치백과 모자는 엄연한 한쌍인데 그가 자기를 한쪽 신발만 신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빠뜨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십분 후에 그는 또 하나의 기다란 영수증을 지갑 속에 쑤셔넣고 있었다.

 

“텐트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아내가 모자를 고쳐쓰며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아내의 불평이 자신을 향한 것으로 들렸다. 그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들 사이는 너무 오래되었다고 말이다. 아내의 허리에 팔을 두르려다 그냥 딸애의 손을 잡았다. 정오의 햇살이 정수리를 향해 뜨겁게 쏟아져내렸다. 아내가 비치백에서 모자를 꺼냈다.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받은 카키색 야구모자였다.

“당신도 모자를 살걸 그랬어.”

“이거면 충분해.”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그는 발걸음을 좀 빨리해서 아내와의 간격을 벌렸다. 슬리퍼 안으로 모래알갱이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모래는 직사광선에 달구어져 뜨거웠다. 딸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한걸음씩 디딜 때마다 샌들을 신은 작은 발이 모래 속에 파묻혔다. “뜨겁지 않니?” 딸애는 대답 대신 깔깔댔다. 딸은 네살인데 아직 말을 잘 못했다. 그는 딸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넣고 번쩍 들어올려 목말을 태웠다. “무서우면 말해.” 그는 모래사장을 한창 달릴 판이었다. 딸의 양손을 꼭 쥐고 준비자세를 취했다. 딸애가 다시 까르르 웃었다. 그는 딸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거라고 이른 뒤 달리기 시작했다. “넘어지니까 조심해.” 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빨리, 빨리.” 딸애가 주문했다. 그는 보폭을 넓히고 속도를 냈다. 저기 보이는 바다까지 냅다 뛰어가서, 파도가 막 쓸고 지나가 아직 거품이 빠지지 않은 축축한 모래사장 위에 아이를 내려놓을 셈이었다. “달려, 아빠, 달려!” 딸애는 흥분해서 몸을 흔들었다.

아직 반밖에 안 왔는데 숨이 차고 발이 무거웠다. 벌써 두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내가 뒤에서 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깨 위에 올라탄 딸이 실망할까 두렵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있는 힘을 다했다. 다섯 발쯤 더 앞으로 나아갔을 때 왼쪽 가슴 갈빗대 쪽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슴을 움츠리고 절뚝거리며 속도를 늦추었다. “뛰어. 뛰어라, 말아!” 딸의 작은 엉덩이가 그의 어깨 위에서 들썩거렸다. 그앤 백마를 탄 공주였고 그 세계를 지켜야 할 의무가 그에게 있었다. 천진난만하고 앙증맞은 주문에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허리를 쭉 폈다. 가슴께의 통증은 잊고 다시 냅다 뛰었다. 다행히도 호흡곤란이 오기 직전에 결승선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딸을 내려놓으려고 허리를 구부렸을 때 그는 아찔함을 느끼며 모래사장 위로 고꾸라졌다.

아이는 그게 목말 장난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래사장 위에 벌러덩 누워 깔깔댔다. 그애는 해변에서 가장 목청이 좋은 아이 같았다. 아내가 달려와 그를 마주보고 섰다. 그녀는 쌍커풀이 진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아내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몰라 되도록 천천히 일어났다. 아내가 쓸데없이 걱정에 빠지지 않도록 적당히 둘러대야 했다. “왼발이 접질린……”

하지만 그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