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당분간 인간’에서 ‘아직은 인간’으로

서유미 소설집 『당분간 인간』

 

 

전철희 田哲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87년체제의 문학적 돌파 등이 있음. kjturi@hanmail.net

 

 

2031『돈이 없어』라는 만화가 있다. 삼촌의 빚에 팔려간 남자가 돈을 갚기 위해 남색을 거듭한다는 이야기다. 여러모로 꺼림칙한 내용이지만, 제목과 큰 얼개만큼은 자본주의의 생리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돈이 없는 자 굶어죽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몸이라도 팔아야 한다는 것이 이 체제의 기본 법칙이다. 그러나 만화가 보여주듯 생존의 수단이던 노동은 종종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멍에가 되기도 한다. 서유미()의 첫 소설집 『당분간 인간』(창비 2012)을 관통하는 문제의식도 꼭 이와 같다.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어떤 일을 한다. 그 노동에는 으레 “미래도시의 건설”(「삽의 이력」) 같은 거창한 명분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창의성이나 비판정신이 반영될 여지가 없는 관료적 직장에서 그것은 이내 사산된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이 지닌 의미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주어진 작업량만 기계적으로 채워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상명하달로 유지되는 회사의 질서 역시 그들을 피로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서유미는 상사의 눈치에 기록적인 폭설을 헤치고 출근해야 하는 대리(「스노우맨」), 하루 종일 손잡이를 돌리는 ‘숫자’들(「검은 문」), 이직한 새 직장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여성(「당분간 인간」) 등을 소설의 무대로 소환한다. 그들은 단순화된 노동과 상사의 압박이라는 이중고에 결국 눈사람이 되거나(「스노우맨」), 온몸이 산산조각 나기에 이른다(「당분간 인간」). 이런 비극적 결말들은 현대사회가 노동자를 인간 아닌 무언가로 만들어버렸음을 암시한다. 그러면 노동자는 무엇이 되었다는 것일까. 인간이 로봇으로 대체된 세상을 그린 작품 「저건 사람도 아니다」를 힌트 삼아 유추하자면, 할당된 단순노동을 반복하던 그들은 ‘기계’로 전락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같은 맥락에서 『당분간 인간』의 등장인물들이 알파벳이나 숫자로 약칭되는 것 역시 개별성이 무화된 익명적 ‘기계’로서의 현대인을 표상하기 위한 장치라 하겠다. 이쯤 되면 작가가 우리 시대의 노동자를 ‘당분간 인간’이라 호명한 것도 납득이 간다. 이 다섯글자의 경구는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하지만 노동을 할수록 품성을 잃어야 하는 현대인의 비극적 운명을 함축하고 있다. 맙소사, 우리는 ‘인간’이란 직위조차 비정규직으로만 가질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당분간 인간’은 또한 ‘아직은 인간’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기도 하다. 그토록 숨 막히는 사회라 할지라도 한켠에는 따뜻한 감정의 불씨가 살아 있기 마련이다. 서로를 비밀스럽게 감시하는 ‘곽’과 ‘원’의 이야기 「타인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영문도 모른 채 윗선에서 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거동을 체크해야 하는 그들은 극단적인 노동소외를 체감할 것이다. 그런데 서로에 대한 감시가 거듭될수록 곽과 원은 상대방에게서 스스로의 결여를 비추는 거울을 발견하고, 그것을 매개로 자신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키게 된다. 물론 그 변화는 미약하고 큰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 보인 공감과 연대의 정신은 세상에 ‘인간적’ 향미를 복돋는 향신료이자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변혁의 종잣돈이 될 것이다. 이런 형태의 연대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비루한 반지하에서 함께 ‘꿈’을 꾸는 수면 공동체의 이야기 「그곳의 단잠」은 말할 것도 없고,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스노우맨」이나 표제작 「당분간 인간」 같은 작품에서조차 나름의 방식으로 타자와의 소통을 꾀하는 인물들의 형상은 설핏설핏 찾아진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이 소설집은 인간적 품위를 복원하려는 노동자들의 고투를 담아낸다.

『당분간 인간』의 수록작품 다수에서 현실의 핍진한 묘사는 디스토피아적 알레고리로 수렴된다. 개중에는 단순하고 정형화된 구성으로 여겨질 것도 없지 않다. 수세적으로 기계화되어가는 ‘당분간 인간’들을 천착하다보니, 생동하는 주체적 인물이 존재할 여지가 없어지고 그에 따라 서사가 다소 밋밋해진 까닭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 장편들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인물 개개인을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켰던 것과 대비할 때, 이런 캐릭터의 부재는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그러나 『당분간 인간』은 또한 천민자본주의와 그것을 넘어설 연대의 단초를 묘파했다는 점에서 전작의 성취를 상회한다. 총체적 시각으로 현재의 정치적 교착상황을 주시해온 작가의 뚝심과 잠재성을 증명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장・단편을 통해 비슷해 보이면서도 약간은 다른 색깔의 미학을 정초한 그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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