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바흐찐의 소설이론과 그 현재적 의미

 

 

변현태 卞鉉台

서울대 노문과 교수. 역서로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논문으로 「바흐찐의 소설이론: 루카치와의 비교의 관점에서」, 「바흐찐의 라블레론」 등이 있음. smex36@snu.ac.kr

 

 

1. 서론

 

최근 한국문학에서는 몇몇 논자들이 ‘장편소설 르네쌍스’라고 부르는 장편소설의 활황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평단의 평가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장편소설 르네쌍스’가 한국문학의 새로운 미래로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확신하는 낙관론이 있는 반면, 시작이 아니라 실은 ‘끝’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는 비관론도 있다. 이러한 논의를 보면서 필자가 떠올린 것은 20세기 초반 러시아문학의 상황이다. 다소 거칠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한편에서 ‘소설의 종말’(O. Mandelshtam 1922)이 선언되는 동시에(물론 이 경우 만젤쉬땀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유럽소설이다), 다른 한편에선 고전적인 리얼리즘 소설의 자기갱생과 이와 다른 미학을 내세우는 모더니즘 소설의 등장으로 나름의 활력을 보여주는 상황.1)

이런 속에서 근대소설에 대한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고 발본적인 사유가 등장했다. 이바노프(V. Ivanov)와 이 글에서 다루는 바흐찐(M. Bakhtin, 1895~1975)이 두 주역이다. 이들은 소설을 하나의 형식으로서 다시 검토의 대상으로 삼고, 그 형식의 재명명을 통해(이바노프의 경우는 ‘소설-비극’, 바흐찐의 경우는 ‘소설-대화’) 소설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색의 구체적인 근거가 다름 아닌, 근대소설의 절정 중 하나인 도스또옙스끼였다는 사실이다. 소설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루카치(G. Lukács)의 『소설의 이론』(1915)을 떠올릴 것이다. 도스또옙스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예비하며 쓰인 이 책도 마찬가지로 소설에 대한 재명명을 시도한다(소설-서사시). 이들이 소설을 재명명하는 방식은 달랐고, 나아가 소설형식을 재형식화하는 이들의 시도가 서로 교차・대립되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들의 작업이 가져다준 가장 큰 성과는 아마도 근대소설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일 것이다.

물론 최근에 장편소설 논의를 야기한 상황은 이보다 훨씬 복잡해 보인다. 아쉽지만 필자에게는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 것은 현재의 장편소설 논의가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면 한결 깊고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렇다면 바흐찐의 소설이론을 경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법하다. 그러나 바흐찐의 소설이론, 이 문제도 간단하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바흐찐의 소설이론이란 좁게는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반에 쓰인 일련의 소설장르론 관련 논문을 가리킨다. 60년대 초반 일군의 러시아 문학연구자들이 바흐찐을 재발견한 이후, 이 시기의 글 대부분은 바흐찐 자신이 보유하던 초고들을 손질해서 편집한 『문학과 미학의 문제들: 여러 시기의 논문들』(1975)에 포함되어 출간된다.2) 이러한 사정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러시아와 서구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도 바흐찐의 논저는 늘 시간적으로 전도되어 알려졌고3) 이것이 바흐찐 수용에서 일정정도 왜곡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바흐찐 수용에서의 이 왜곡은 바흐찐의 대표적인 두 저서, 『도스또옙스끼 시학의 문제들』(1963, 이하 『시학』)과 『프랑수아 라블레의 창작과 중세와 르네쌍스의 민중문화』(1965, 이하 『라블레』)를 중심으로 그의 전체 사유를 자의적으로 정리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4) 소설이론에 국한해 이야기해보면, 『시학』의 ‘다성악적 소설’, 『라블레』의 ‘카니발’이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같은 범주들을 중심으로 이 저작 이후에 출판된 바흐찐의 초기 철학과 미학의 범주들을 재배치하거나 혹은 바흐찐의 초기 사유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그의 소설이론을 구성하려는 시도들이 그렇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바흐찐 수용이 이런 양상을 띠며 한국에서 대표적인 경우가 김욱동(金旭東)일 것이다.5)

비교적 근자에 러시아와 서구에서 바흐찐을 다룬 주요 논문을 다양한 주제로 엮어서 총 4권의 책으로 펴낸 가디너(M. Gardiner)는 편집자 서문에서 바흐찐의 사유가 포스트모더니즘에 쉽게 동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고 단정한바 있다.6) 가디너가 주도했던 이 작업은 1970~8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흐찐 연구에 대한 일종의 ‘중간결산’의 성격을 갖는데, 가디너의 지적은 이를테면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바흐찐 전유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착취와 왜곡된 수용의 반대 극단에는 바흐찐의 전체 사유 속에서 소설이론의 입지를 부정하는 방향이 있다. 바흐찐 이론의 세계적인 확산에 기여했던 또도로프(T. Todorov)가 그 선두 격인데, 그에 따르면 바흐찐에게 소설이라는 낱말은 그의 철학(또도로프가 ‘철학적 인간학’이라고 명명한)의 은유일 뿐이며, 바흐찐에게 고유한 의미의 소설이론은 없다. 또도로프식 입장의 다른 면은 소설에 대한 바흐찐의 글을 스딸린 시대에 대한 일종의 게릴라 투쟁, ‘이솝의 언어’로 쓰인 비판으로 독해하는 방식이다.7) 이런 맥락에서라면 바흐찐의 서사시 비판은 스딸린 시대의 ‘독백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카니발의 민중론은 소련 시절의 ‘인민 대중’, 즉 이데올로기에 잘 조련되어 있는 ‘호모 소비에트쿠스’에 대한 비판으로 독해되어버린다.

그러나 바흐찐의 일련의 글 속에는 소설을 바라보는 고유의 관점이 있으며, 이것은 또한 스딸린 비판이나 소비에뜨 시대의 주류 소설이론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근대소설 전체를 바라보는 어떤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그 시야의 현재적 의미를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