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 황석영 장편 『여울물 소리』

 

사랑과 혁명, 그 끝나지 않는 이야기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 김준연

ⓒ 김준연

 

 

황석영의 장편 『여울물 소리』(자음과모음 2012)19세기 조선사회를 배경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이야기꾼 이신의 생애를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은 여성 화자인 연옥이 이신의 삶을 추적하고 상상하는 방식을 통해 문학과 역사가 얽히는 한 시대의 굴곡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장터에서 소설을 읽어주면서 신통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신은 전기수(傳奇叟)에서 출발하여 이야기꾼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천지도(天地道, 동학)에 관여하고 이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신통의 이야기는 그를 포함한 당대의 몰락한 지식인 및 민초의 삶과 연결되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과 그것의 좌절, 그러고도 계속되는 삶의 흐름을 유장하게 펼쳐보인다.

전통 구전문학의 양식에서 고안된 ‘이야기체 서사’는 빠른 장면전환과 압축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독특한 현재성을 전달한다. 이처럼 시공간의 연대기를 아우르는 서술방식이나 전통 구전서사에 대한 탐색은 황석영 소설에서 꾸준히 시도되어온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등단 50년을 맞은 황석영의 소설세계는 한동안의 공백을 뛰어넘어 후일담과 분단문제, 성장소설과 여성 수난사, 도시개발사, 쓰레기의 문명사적 탐구까지 실로 방대한 소재와 다양한 서사기법을 탐색해왔다. 『여울물 소리』는 이처럼 다양한 서사적 모색을 시도해온 근래 황석영 소설의 한 매듭을 이루는 중요한 성취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 담긴 사랑과 혁명이라는 주제는 지금 시점에서 절실한 문학적 메타포로 다가온다. 현실의 정치상황과 연관돼서 그런 것일까. 어느 시대건 고달프게 살 수밖에 없었던 민초의 삶, 혁명의 실패가 남긴 좌절과 고통,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상념이 겹치면서 작품을 읽는 내내 상당한 감정의 고양을 겪었다. 역사의 격랑 속에 살아가는 개인들의 운명을 굽어보는 소설의 담담하고도 깊은 시선이 위로가 되고 어느 대목에서는 가슴이 울컥해지기도 했다. 먼 과거 이야기꾼의 삶이 이토록 생생하고 현재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읽고 난 후 작가와 나누고 싶은 감흥도 커지고 여러 질문들이 꿈틀거리며 솟아나기 시작했다.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연초의 어느날, 파주에서 만난 작가는 어떤 질문과 감상이라도 너끈히 감당할 듯이 강건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19세기라는 시공간과 이야기꾼을 주목하게 된 계기를 묻는 것으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2013.1.15 창비사옥)

 

소설의 배경인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 할 만큼 조선사회의 모순이 절정에 이른, 숨가쁜 시대였어요. 역사학자들은 그때를 ‘반동의 시대’라고도 하죠. 근대화를 이룰 자생적 역량은 자랐는데, 그게 내부의 봉건 기득권세력과 제국주의 외세의 개입 등에 의해 여러차례 좌절을 겪었고, 또 그러면서도 진전돼왔어요. 동학혁명만 보더라도 시대상황에 따라 좌절하지만 말살되는 게 아니라 의병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면서 다음 시대로 연결되었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근대’가 지금까지 길게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외형적으로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우리는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죠. 우경화하는 천황의 일본이나 첨단 자본주의의 겉모습에 사회주의 개발독재를 실험 중인 중국을 포함해서 동북아 전체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근대의 잔재 속에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이번 대선을 보니 그런 점을 더욱 실감하게 되더군요. 일본 군복을 입은 청년 박정희(朴正熙)와 의문사한 장준하(張俊河)의 두개골 사진이 나란히 나왔잖아요. 그런 걸 봐서는 19세기 이래 우리가 겪은 근대의 트라우마가 지금도 내면에 그대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지요.

시대가 품은 역동성이 이렇다 보니 이야기꾼의 삶 자체가 역사와 얽혀들 수밖에 없지요. 처음엔 이 소설에서 역사 사실이나 현실을 빼버리고, 한 이야기꾼의 일생을 민담이나 설화 형식으로 허황하게 써보려고 했죠. 그런데 전기수나 강담사(講談師)에 관한 자료를 뒤지다 보니 19세기 당대의 현실이 너무 막중한 거예요. 도저히 그 현실의 무게를 무시할 수 없단 말예요. 이를테면 황아무개가 그냥 놀다 지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웃음) 처음 기획대로 옛날이야기 쪽으로 갔으면 구성, 인물, 서술 자체까지 메타포라든가 아이러니로 치장을 멋들어지게 할 수 있었겠죠.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놔버리지는 못하고 현실을 끌어안고 여전히 끙끙대며 쓸 수밖에 없었네요.

 

한국사회가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근대’의 문제를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작가의 고민은 이야기꾼의 삶을 조선 사회의 신분적 동요와 연결시킨 데서 잘 드러난다. 신통이 소설 읽기에 빠져든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서얼 출신이라 과거는 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관직생활은 할 수 없었던 신분의 제약은 그로 하여금 먼 길을 떠나게 했다. 그는 언패(諺稗) 독자에서 전기수로, 강담사와 재담꾼, 연희대본가와 혁명가의 행로를 거쳐 떠돌아다닌다. 신분의 제약을 지닌 신통의 삶은 당대 몰락 지식인들의 삶과 얽힌다. 작가는 이야기꾼과 연관된 다양한 직업들이 지배계층과 하층민을 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