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임화의 문학사 인식논리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저서로 『이조시대 서사시』(전2권) 『한문서사의 영토』(전2권) 『문명의식과 실학』 등이 있음. lim1767@skku.edu

 

*본고는 제5회 임화문학심포지엄 ‘임화 시대의 지식인들’(2012.10.12)의 기조발제문을 조금 줄여 정리하면서 일부 보완하기도 했다.

 

 

1. 문학사가로서의 임화

 

나는 오래전부터 임화(林和)에 대해 가진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그의 개설 신문학사를 읽어보면 담긴 견해가 탁월할 뿐 아니라, 학적인 방법론과 체계가 자못 정연하다.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감하는 바지만, 근대 학문의 글쓰기는 결코 재주만 가지고 되지 않고 상당기간 제대로 훈련을 받아야 가능하다. 그런데 임화의 학력을 보면 중등과정 5년이 전부이고 학문제도에 입문한 기간은 보이지 않는다. ‘가방끈’이 짧아도 한참 짧은 그가 어떻게 손색없는 학술적 글쓰기를 수행할 수 있었을까?

임화 전공자들을 만나면 이 문제를 화제로 떠올려보았으나 신통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의 해답은 다른 어디가 아니고 임화 그에게서 찾을 도리밖에 없지 않은가 한다. 그 자신 평론적 글쓰기로 벼린 두뇌와 솜씨가 학문적 글쓰기로 전용될 수 있었던 것이 주체적 조건이 되었을 터요, 마침 1930년대 조선학이 발흥하였던 사실이 객관적 조건이 되지 않았을까.

문학에 대한 역사적인 조사 연구가 바야흐로 착수되면서 조선문학=국문학이란 개념을 사고하게 되었다. 이 초창의 과정에 그는 처음부터 참여했던 것은 아니고 학적 성과가 차츰 제출되는 것을 보고 뛰어들었다. 그가 남긴 신문학사의 저작을 읽어보면 학습능력이 비상한 사람임을 짐작케 한다. 그토록 학습효과가 고도로 발휘될 수 있었던 데서 보듯 내면에서 필시 학습의욕이 불탔을 것이다.

그 시절엔 요즘 흔히 연구와 비평을 겸업으로 하는 것과는 사정이 달랐다. 임화가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가 되려고 열심히 신문학사를 썼겠는가. 당시는 조선학=국학의 첫 출발과 더불어 우리 문학에 대한 학적인 접근이 시도되는 단계였다. 당대문학을 두고선 누구도 학적 대상으로 돌아보지 않았다. 좌파문학의 현장이론가인 그가 문학사로 시선집중을 한 데는 무언가 각별한 동기와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문학사 관련 작업은 1939~4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1) 앞서 1935년에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이란 표제의 글을 발표하는데 첫 장이 ‘문학사적 연구의 현실적 의의’다.

 

우리가 문학사적 사업에 요구하는 과학적 엄밀성은, 일층 가혹하고 또 고도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에 있어서 처해지는, 근소한 과학적 부정확성은, 명일에 볼 수 있는 우리의 문학적 창조에 있어 실로 금일에 앉아 상상키 어려운 심대한 결과를 초래할, 출발점이 되는 때문이다. (『임화문학예술전집』2권 『문학사』 374면)2)

 

현실에서 문제의식이 발단한 것이다. 자신이 취한 좌파 이론가의 논법으로 지금의 창조적 현실에서 내일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 문학사 작업의 ‘과학적 엄밀성’은 문학의 실천적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일임을 더없이 강조한 논리다. 당대현실을 그는 어떻게 진단한 때문일까?

 

현재 우리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어떠한 조건하에 있으며, 또 그외의 건전한 문학 전반이 미증유의 심각한 역사적 국면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다언을 요치 않을 것이다. (같은 책 375면)

 

193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프로문학이 어떤 조건에 놓여 있었으며, 그밖의 ‘건전한 문학’이라고 지칭한 것이 어떤 미증유의 심각한 국면에 있었던지 그는 “다언을 요치 않는다”고 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설명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1920년대가 전지구적으로 희망과 진보의 시대라면 30년대는 불안과 퇴행의 시대였다. 당시 태풍처럼 휩쓴 대공황으로 1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약동했던 ‘해방의 신기운’이 종식되고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그 직격탄을 맞았다. 20년대에 사상문화운동이 비록 식민지 억압 아래였지만 제법 활발하여 신간회운동으로 역량이 집결되는가 싶었으나, 이마저 실패하고 군국주의의 진군에 짓밟히고 일체의 진보적인 사상문화운동은 금지된 것이다. 위에서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어떤 조건하에 있으며”라 함은 카프의 조직이 일제관헌에 의해서 해체되고 프로문학이 더는 존립할 수 없게 된 사정을 뜻하는 것임이 물론이다.

프로문학이 일제의 물리적 탄압에 의해 퇴장하게 된 이 시기는 문학사에서 대개 ‘예술파의 득세’로 특징짓고 있거니와, 프로문학 진영 내부에서도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식의 투항주의적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예술이기를 포기한 속화·타락 현상이 만연하였다. 임화는 그런 현상을 ‘근대문학의 위기’로 진단했던바 위에서 “건전한 문학 전반이 미증유의 심각한 역사적 국면에 서 있다” 함은 바로 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가 가장 심각하게 우려한 것은 이른바 ‘복고주의의 탁류’였다.

그는 1936년 초두에 「조선문학의 신정세와 현대적 제상(諸相)」이란 제목으로 주목되는 평론을 발표한다. 곧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을 기고한 그해의 문학적 현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내용이다. ‘복고주의의 탁류’란 이 평론의 한 장인데 보자.

 

이병기, 최남선, 정인보, 한용운 씨 등의 동녹이 슨 유령들은 더불어 새삼스러이 논할 것도 없지만, 그들 없이는 그 연대의 찬연한 신문학을 상상할 수도 없는 김동인, 이광수, 이은상, 윤백남, 김동환, 김억 등 제씨의 근황이야말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의 가히 교훈 받을 바이다. (『평론 1557면)

 

위에서 정인보(鄭寅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