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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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뫼

1985년 광주 출생. 200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을』 『백행을 쓰고 싶다』가 있음. songbook1123@gmail.com

 

 

 

겨울의 눈빛

 

 

해만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K시이다. 나는 K시 출신으로 3년 전 해만으로 오기 전까지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줄곧. 그러니까 나는 K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의무교육을 마쳤으며 버스를 타고 한시간이 걸리는 인근 도시의 대학을 다닐 때조차도 K시에서 통학을 했다. 정말로 나는 줄곧 K시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랬으나 해만으로 온 이후로 마치 나는 그간 K시가 넌덜머리가 났다는 듯이 꼭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집에 가지 않았고 특히 해만에 온 첫해에는 1년간 K시에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가볼 만한 무수한 이유가 있었으나 그것들이 가야만 하는 이유로 바뀌지는 않았다.

줄곧 K시를 잊고 있다 떠올리게 된 것은, 아니 그러니까 K시라기보다는 K시의 극장과 거기서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게 된 것은 글쎄 별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잊고 지냈던 노래를 듣게 되기도 했으며 그 곡은 지난 한 순간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음악이었다. 며칠 전 흔하지 않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났고 그 이름은 내게 어떤 시간을 상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이 우연히 마주친 어떤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순간을 돌이키는 중요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거기에 아무런 우연도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라고, 아니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가라앉아 있던 것은 떠오를 때가 되어 잠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은 것이다.

 

K시에는 어떤 극장이 있다. 그 극장은 내가 극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머리에 그리는 근원적인 형태의 극장이다. 내게 유일하며 처음인 극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내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일곱살 때 처음 간 극장이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아주 멀리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잡은 최초의 기억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곳이 최초의 극장인 이유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갖는지 처음 인지하게 된 곳이라서다. 내가 그 극장에 처음 간 것은 십대 후반의 일로 한동안 나는 매주 그 극장에 들렀다. 정말로 매주 영화를 보았을지도, 아니 어쩌면 극장에 그저 들러 잠시 서성이다 온 것 같기도 하다.

그 극장에 대해 설명하자면 나는 극장이 서 있는 거리에서 시작하여 그 반대편 극장까지 머릿속으로 한발씩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수십걸음을 뒷걸음질 쳐 바라본 극장의 위치는 이러했다. 이차선 도로와 한개의 블록을 사이에 두고 극장 두개가 마주 보고 있다. 도로변에 있는 극장은 회색의 낮은 건물이고 도로를 지나 있는 극장은 갈색의 좀더 높은 건물이다. 좀더 먼 곳에서 바라다보면 이차선 도로와 두개의 블록을 사이에 두고 세개의 극장이 서 있다. 두개의 극장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하나의 극장은 하나의 극장 뒤에 서 있다. 즉 이차선 도로의 오른쪽으로는 두개의 극장이 왼쪽으로는 한개의 극장이 서 있는 것이다. 그런 형태로 극장들은 서 있었다. 세개의 극장 중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가운데 극장이다. 그 극장이 바로 내게 유일한 극장이었다. 하나의 극장을 마주 보고 또다른 극장 앞에 서 있는 바로 그 극장이 내가 가는 곳이었다. K시의 극장에 대해 말하기 위해 뒷걸음질을 쳐야 하는 이유는 한때 어떤 거리에는 극장들이 많이 있었고 이제 그것들은 없으며 나의 유일한 극장은 K시의 다른 몇몇 사람들에게도 유일한 극장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뒷걸음질하던 발을 멈췄다 다시 가운데 극장을 향해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나는 가운데 극장으로 가곤 했다. 이제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텅 빈 극장들을 순례하듯 지난 후에야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무수한 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계절과 바람이 선명했고 나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던 가을 오후의 익은 햇살과 늦여름의 쓸쓸한 바람과 장마의 시작을 말이다. 그러나 멀리서 나를 바라본다면 그러니까 극장을 바라보듯이 뒷걸음질 쳐 멀리서 의자와 탁자와 사람들과 함께 나를 바라본다면 내게서 나를 지나간 무수한 순간들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움직임과 표정을 어딘가에 조금씩 떼어놓고 와 표정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얼굴로 나는 극장에서 시간을 났다. 이차선 도로를 지나 하나의 블록을 지나 극장 간판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 여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손등을 덮는 길고 큰 옷에 파묻혀 움츠린 채로, 그러다 소매 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지폐를 떨어뜨리듯이 내밀고는 극장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소매가 움직이는 것 같겠지? 소매만이 움직여 돈을 내는 것 같아 보일 거야. 극장 안에서는 언제나 지겨운 표정으로 낡은 옷을 걸친 채 서 있었다. 가끔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했고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소매에서는 연하게 흙과 창고 냄새가 섞인 냄새가 났다. 여름에는 원피스의 목 부분에서 서랍 냄새가 날 때가 있었다. 어느 계절이건 늘 그런 식이었다. 마치 극장의 벽이나 의자나 벽지나 천장의 등, 복도의 액자 같은 것이 되고 싶은 것처럼.

 

며칠 전 방에서 발견한 노트 속 일기는 어느 해의 겨울과 그때 만났던 사람에 대해 적혀 있다. 그때는 아마도 겨울의 초입이었고 그 겨울의 어느날 나는 한국 감독이 만든 그해 주목받은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습관처럼 극장에 갔고 그 시간에 하는 영화를 본다. 그게 그 다큐멘터리였다. 그날은 상영이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가 준비되어 있었고 영화에 삽입된 곡을 부른 그리 유명하지 않은 포크 뮤지션의 짧은 공연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 다큐멘터리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영화는 3년 전 부산에서 일어난 어떤 사고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3년 전이라고 입을 떼면, 3년 전 봄의 어느 날짜를 대면 사람들은 어딘가 아픈 표정을 짓거나 지친 얼굴을 하거나 지겹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 그 이야기를 하는구나 같은 표정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고리핵단지의 정확한 주소는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고리로 해운대와 약 22km 떨어져 있었다. 아마 3년 전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뉴스에서 듣던 고리핵단지와 해운대를 연결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고리핵단지는 혹은 고리발전소는 뭐랄까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뉴스에서 나오는 말 같은 것이고 지난 정권의 금융정책이나 무역지수, 여야결의안 같은 그런 말 있잖아.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알아야 할 것 같지만 영영 알지 못하는 그런 수많은 말들 있잖아. 나는 그런 말들을 쉬지 않고 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서너개를 부르고 나면 이어지지 않는다. 해운대는 경포대나 낙산이나 아니면 서해안 어디 같기도 하면서 어느 대도시의 번화가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경주 안압지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음 그래 나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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