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루카치 장편소설론의 역사성과 현재성

 

 

김경식 金敬埴

독문학 연구자.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번역했으며 최근에 쓴 글로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을 읽기 위하여」가 있음. erden21@naver.com

 

 

1. 들어가는 말

 

어떤 사상이나 이론의 ‘현재성’을 가늠하는 외적 지표가 그것의 번역, 연구, 출판 등이 얼마나 활발하냐에 있다면, 지금 루카치(György Lukács, 1885~1971)의 사유는 ‘현재성’과는 거리가 꽤 멀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우리의 문학적 사유에 워낙 뚜렷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문학연구자나 평론가라면 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그럴 때 루카치는 그들의 다른 입장을 도드라지게 만들기 위한 어두운 배경화면으로 활용되거나 “루카치 유()의……” “루카치 식의……” 같은 표현을 통해 이미 이론적 ‘결산’이 끝난 인물로 취급당하기 일쑤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표현이 별 거리낌 없이 통용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문학론을 둘러싼 논의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중 특히 논의가 집중되었던 대목은 그가 주로 1930년대에 조탁(彫琢)했던 리얼리즘론이었는데, 우리 문학계의 관심이 리얼리즘 문제에 쏠렸던 탓이 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의 리얼리즘론에 대한 이론적 관심이 그의 장편소설1) 이론에 대한 진지한 관심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개진했던 리얼리즘 관련 담론들 대부분이 장편소설에 관한 성찰에 근거한 것이니만큼 그의 장편소설론에 대한 본격적인 고찰도 마땅히 이루어졌을 법한데, 유감스럽게도 이 분야에서 눈여겨볼 만한 성과는 거의 없다시피 한다.2) 이것은 비단 우리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닌데, 한때 그가 ‘미학의 맑스’ 대우를 받았던 서구에서도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시도된 그의 장편소설론을 본격적으로 고찰한 글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국내외의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루카치의 장편소설론을 다루는 이 글은 그의 문학론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있었던 빈 곳을 메우려는 ‘뒤늦은’ 노력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때마침 우리 문학계 한쪽에서 장편소설의 ‘종언’ 혹은 ‘부흥’을 둘러싼 성찰과 모색이 진지하게 전개되고 있는 마당이니 이왕이면 거기에도 일말의 기여를 할 수 있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그런데 짧은 지면에서 루카치의 장편소설론을 제대로 다루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의 장편소설론이 ‘하나’가 아닌 데서 연유하는 어려움이 가장 크다. 동구 사회주의블록의 붕괴와 더불어 루카치의 사유가 급속도로 망각되어간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새 독자를 만나고 있는, 그의 저작들 중 거의 유일한 작품인 『소설의 이론』(1916/20)에서 개진된 장편소설론(‘초기 장편소설론’)과, 그가 10여년에 걸친 “맑스주의 수업시대”3)를 끝내고 성숙한 맑스주의 시기에 접어든 이후 전개한 장편소설론—「장편소설」 및 이에 딸린 글들4) 그리고 「장편소설」을 둘러싼 논쟁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포함하고 있는 「서사냐 묘사냐?」(1936)와 『역사소설론』(1937)으로 대표되는 ‘중기 장편소설론’—사이에는 세계관이나 철학적·이론적 입장에서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 또, 스딸린체제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 건 희망과 집단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성에 대한 믿음이 아직 가슴속에 살아 있었던 30년대 중반의 루카치가 시도한 이 ‘중기 장편소설론’과 스딸린주의의 극복과 만신창이가 된 맑스주의의 재구축을 위해 마지막 열정을 쏟았던 60년대 후반의 루카치가 제시한 새로운 장편소설론의 단초들—특히 「쏠제니찐의 장편소설들」(1969)에서 그 싹이 제시된 ‘후기 장편소설론’—사이에도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단절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관류하는 연속성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이러한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두루 고찰하는 가운데 루카치 장편소설론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지면 사정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리얼리즘론의 형성과정과 맞물린 ‘중기 장편소설론’을 중심으로 그의 맑스주의적 장편소설론의 윤곽과 기본적인 구성요소를 살펴보고 몇가지 생각을 덧붙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2. 장편소설론의 방법과 기본얼개

 

맑스주의 문학이론의 역사에서 장편소설론을 수립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에 해당하는 「장편소설」에서 루카치는, 장편소설이 하나의 장르로서 식별 가능한 고유성을 지닌다면 그 고유성을 구성하는 원리는 무엇인지를 규명하려 한다. 루카치에 따르면 장편소설은 “부르주아사회의 가장 전형적인 문학장르”이거니와 “장편소설의 전형적인 특징들은 그것이 부르주아사회의 표현형식이 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311면). 따라서 루카치에게 전형적인 장편소설은 곧 근대 장편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전형적’이라는 표현은 장편소설이 부르주아사회(근대 자본주의사회)에만 배타적으로 귀속되는 문학장르는 아니라고 해석할 여지도 열어둔다. 실제로 루카치는 서구의 고대와 중세는 물론이고 아시아에도 장편소설과 유사한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루카치가 규명하려는 것은 특정 서사형식을 장편소설이게 하는 형식원리, 장편소설을 다른 문학형식들과 구분하는 고유의 특징이다. 이것은 고대 이래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장편소설’들을 모두 다 조사하는 실증적·경험주의적 방식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 루카치의 생각이다. 그런 접근법으로는 기껏 몇가지 외형적 공통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들이 각기 다른 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루카치는 맑스가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고전적 형태”(484면)로서 영국 자본주의를 분석했음을 상기시킨다. 맑스가 영국 이외의 나라에는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듯이, 고대나 중세 ‘장편소설’의 존재를 굳이 부인하지 않더라도 장편소설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인 근대 장편소설에 대한 발생사적·구조적 분석을 통해 장편소설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역사적 시공간에 존재했던 ‘장편소설’들의 역사적·미학적 성격 규정도 가능해진다는 것이 루카치의 생각이다.

장편소설의 형식원리에 대한 파악은 근대 장편소설 자체에 대한 발생사적·구조적 고찰뿐 아니라 다른 문학장르들과의 대비도 필요로 한다. 헤겔을 위시한 독일 고전미학의 통찰들이 이 대목에서도 크게 활용되는데, 특히 “근대 부르주아 서사시로서의 장편소설”이라는 헤겔의 명제는 『소설의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기 장편소설론’에서도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그런데 ‘부르주아 서사시로서의 장편소설’이라는 규정은 필연적으로 서사시와 장편소설을 포괄하는 상위의 범주를 필요로 하는바 “대()서사문학”(die große Epik)이라는—이 역시 헤겔에서 가져온—범주가 그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루카치는 ‘대서사문학’을 극(특히 비극), ‘소()서사문학’(특히 노벨레5)) 등과 대조하는 한편, ‘대서사문학’ 자체 내에서 서사시와 장편소설이 갖는 공통성과 차이를 역사적·미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문학체계 내에서 장편소설 형식이 가지는 상대적 고유성을 규정하고자 한다.

루카치에 따르면 ‘대서사문학’ 형식과 극 형식은 공히 개인들을 매개로 “삶의 과정(Lebensprozeß)의 총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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