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 다시 현실을 묻는다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타원형 감옥의 외부: 『목화밭 엽기전』과 그 맥락」이 있음.
netka@hanmail.net
1. 빈곤의 문학사회학
2000년대 들어 괄목할 만한 문학적 변모를 보여준 바 있는 작가 배수아(裵琇亞)는 장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으로 자기 문학의 새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사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는 작가의 직접 기술처럼 보이는 에쎄이 한편이 종작없이 나타나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데 「예비적 서문—슬픈 빈곤의 사회」라는 제목의 이 장은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이렇게 썼다. “원래 처음 내 생각은 사람들의 초상화, 인간의 백서였다. 그러나 (…) 내가 느낀 것은 결국 빈곤에 의한 존재의 확인이었다. (…) 나는 빈곤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며 동시에 모든 가능한 것들의 종말이라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260면) 그뿐 아니라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는 이런 대목도 눈에 띈다. “그들(가난한 사람들—인용자)이 당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이 이제 이 사회에서 더 이상의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였다. (…) 빈곤은 문화적인 소외를 유발시키는데 그래서 몰락하여 예전의 자신의 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세습된 빈곤층보다 훨씬 더 절망에 빠지게 된다.”(261면) 여기까지 쓰고 나서 작가는 비로소 의문을 품는다. “빈곤의 문제에 집착하여 몇년 동안이나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과연 ‘공동체’라는 것은 진정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민족이나 국가 말이다.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단 한가지, 오직 외부의 위협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같은 면)
민족이나 국가를 둘러싼 난제들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배수아가 “모든 것의 시작점이며 동시에 모든 가능한 것들의 종말”이라고 쓴 것을 동시대의 다른 작가가 “모든 것의 석양”으로 변주한 것 또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언어와 함께 희랍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한강(韓江)의 장편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에 등장하는 희랍어 강사의 대사다. 이 작품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닌 채 자폐적이고 고독한 삶을 살아온 두 남녀(시력을 잃어버린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가까스로 사랑의 연대에 이르는 이야기를 통해 타자와의 찰나적 만남과 영원한 어긋남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모든 가시적인 것, 발화 가능한 것들을 소실점의 검은 심연으로 데려가 침묵하게 만드는 작가의 정념이 문명사적 전환기의 감각으로 과잉 추상화되고 있긴 하지만 개별자들의 정신적 빈곤1)을 공동체의 위기에 접속시키고 있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배수아의 선례와 유사하다. 그런데 「예비적 서문—슬픈 빈곤의 사회」가 취하고 있는 현실인식의 구도는 우연찮게도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그것과 공명한다. 배수아가 “공동체를 하나로 구속하는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빈곤의 문제는 초공동체적 성격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그동안 소시민들이 흔히 가지는 세속적인 부자에 대한 경멸이나 증오, 주입되거나 의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온갖 종류의 편견들을 만나고 다닌 것”(배수아, 앞의 책 261면)이라고 쓴 것을 바우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빈곤이라는 현상은 물질적 결핍과 신체적 고통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가난은 사회적이면서 심리학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 실존의 적절성이 그 사회가 정의하는 남부럽잖은 생활수준에 따라 측정될 때, 그 수준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은 그 자체로 괴로움과 고통, 굴욕의 원인이다. 그것은 ‘정상의 삶’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분노와 적의가 생기고, 그것은 폭력행위나 자기경멸의 형태로, 또는 둘 다로 배출된다. (…) 소비자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한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의 삶에 다가갈 수 없는 이들이다. (그것은—인용자) 결함있는 소비자가 된다는 뜻이다.2)
바우만의 자상한 분석이 도달하고 있는 지점은 배수아가 “문화적 소외”라고 부른 것과 거의 일치한다. 결함있는 소비자란 결국 문화적으로 소외된 자, 삶을 향유할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거나 기회를 박탈당한 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결함있는 소비자의 탄생 경로를 설명하기 위해 ‘노동윤리에서 소비미학으로’라는 명쾌한 구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생산자사회를 지배하던 윤리적 가치, 즉 “모든 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높였고, 모든 노동은 도덕적 올바름과 영적 구원의 발단”(바우만, 같은 책 65면)이라는 생각이 소비자사회에 들어서면서 미학적 가치로 전환되었다는 주장이 그 핵심이다. “삶의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노동은 이제 우선적으로 미적 감독 아래에 놓인다. 그 가치는 즐거운 경험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따라 평가된다.”(같은 책 64면)
서구자본주의 사회의 삶에 대한 바우만의 통찰이 2000년대 한국작가의 그것과 닮은꼴이라는 사실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그것은 우선 한국사회가 도달한 현대자본주의의 내면화 단계를 지시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스스로 범위를 확장해나가고 점점 빈곤 아닌 다른 것의 이름을 차용하거나 데카당한 가면을 쓰고 있기도 하면서 그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배수아, 앞의 책 267~68면) 요컨대 소비미학의 시대에 빈곤의 바깥은 없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노동윤리가 차지하던 영역을 소비미학이 본격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쯤일까. 혹자는 「예비적 서문—슬픈 빈곤의 사회」의 한 대목으로부터 성급하게 1997년의 IMF외환위기 사태를 유추해낼지도 모른다. “나는 단 한순간의 위기에도 처절하게 무너지는 아슬아슬한 소시민 계층의 삶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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