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 다시 현실을 묻는다
사실, 역사, 그리고 시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21세기 오감도(烏瞰圖), 21세기 소년 탄생기(誕生記)」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1. “사실만을 말하려는 힘”1)
시편을 특징짓는 것은 말을 초월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으로 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시편의 본성을 유일하고 환원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탐구하게 만들며, 동시에 시편을 다른 역사적 사건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회적 표현으로 여기게끔 한다. 말로 씌어진 시편은 말 너머를 향하며 역사는 시편의 의미를 고갈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시편에 근거를 제공하고 또한 역으로 시편이 근거를 제공하는 공동체와 역사가 없다면 시편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2)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말이다.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시편들이 언어 안에서 쓰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부정성이나 전복성이란 명명으로 자주 거론된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좀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두곳이다. 첫째, 시편이 역사에 근거를 제공한다는 말. 둘째, 시편이 말 너머를 향하며 역사는 시편의 의미를 고갈시키지 못한다는 말. 사실 이 두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연쇄적이다. 빠스는 첫번째 물음에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가 없었다면 그리스라는 역사적 실재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한다. 경험의 추상화를 거부하는 시편들이 원초적 경험과 그것이 쓰인 이후에 오는 행동과 경험의 총체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빠스는 시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시작하며 발생하는 독특한 시간성을 보유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시는 흘러간 과거를 재현하는 장르가 아니라 그 과거에 잠재하거나 현재와 관련한 다른 시간을 계시(revelation)하는 역사성(historicity)을 지닌 장르로 파악한 것이다.
저 다른 시간을 계시하는 성격은 두번째 물음에 관련해서도 중요한 맥락을 지닌다. 빠스는 이미지와 리듬을 포함하는 시의 언어가 어떤 한정된 것을 지시하는 언어적 성격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시의 이미지와 리듬이 일상의 언어보다 앞서 있는 무엇이라고 여겼으며, 시의 언어는 특정 역사적 시점 이전에 있으며 새로운 경험을 비추는 기능을 보유한다고도 말했다. 우리의 감각을 포획하고 있는 직선적 시간관이나 도구적 언어관은 빠스의 저 말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게다가 유동적인 그의 사고가 다소 반복적이고 정적인 언어로 표현된 점도 이해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그의 말과 유사하면서도 좀더 동적인 언어를 빌려보도록 하자.
지나간 과거의 것을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도대체 어떠했던가>를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위험한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유물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 예기치 않게 느닷없이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꼭 붙잡는 것이다.3)
벤야민(W. Benjamin)의 말이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지점은 역시 두 부분이다. “위험한 순간”이라는 표현과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이라는 언급. 위험한 순간이라는 표현 속에는 현재의 위험을 얼마나 강렬한 강도로 느끼고 있는가에 대한 되물음이 잠겨 있다(물론 저 말은 당대의 위험 상황, 가령 나치당의 집권과 전쟁 발발 등을 지목하는 면도 있다). 빠스에 비해 벤야민은 항상 위험함과 위급함 속에서 역사를 바라보곤 했다. 그에게 역사는 늘 긴박한 싸움이었으며, 주의와 집중을 요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그는 저 주의와 집중의 시간에 이미 있었으나 적당한 사용처를 알지 못했던 과거의 사유와 힘들이 이미지의 형태로 재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나타난 과거의 이미지를 낚아채 과거로부터 현재가, 동시에 현재로부터 과거가 새롭게 충전되는 순간, 다른 시간이 도래한다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법하다. 그리고 이 다른 시간의 도래야말로 빠스가 말한 시편들의 움직임, 즉 고정된 의미로서의 역사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말 너머를 향한 운동성과 맞닿아 있다.
많이 에둘러왔지만, 옥따비오 빠스와 발터 벤야민의 저 말을 떠올린 건 실은 근간에 읽은 한 싯구 때문이었다. 거기에서 이제 막 얼굴을 드러내는 무엇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구절을 옮긴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아닌 것들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말하려는 힘.
—이장욱 「사실만을 말하려는 힘」 부분
당연한 말이겠지만, 저 시에 쓰인 “이명박(李明博)”과 “박근혜(朴槿惠)”는 특정 인물을 지시하고 한정하는 언어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니다. 거기에는 한정된 정의로 해결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맥락이 혼돈스럽게 얽혀 있다. 가령 저 이름들의 주위로 모여드는 사건의 이름들이 있다. 용산참사, 4대강파괴, 쌍용자동차사태, 강정마을 등등의 명명,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건의 이름들까지. 이 모든 사실들이 이명박과 박근혜가 아니면서 그들을 말할 수 있는 목록이다. 아마도 저 목록은 그들이 권력의 힘을 바탕으로 기술했던 역사서술의 항목에서 은폐되거나 축소되기 쉬운 사실들일 것이다. “사실만을 말하려는 힘”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시는 감정을 누설하는 표현 하나 없이 우리를 아프고 화나게 만드는 사실들을 상기시킨다.
시인들이 사실4)에 좀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급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앞선 빠스의 언급처럼 시란 늘 역사와 공동체에 근거를 두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근간의 사정은 사실에 관심을 두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이 관심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한동안 문단비평에 등장한 문학과 정치에 관한 담론이 기여했을까. 혹은 한 시인의 투철한 현실의식의 발로일까. 분명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간극과 결합방식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알아버린 내용에 자극을 받은 면도 있을 것이고 한 개인의 정치의식이 작동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급박하게 시인들의 감각을 찌르고 들어온 사실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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