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 다시 현실을 묻는다

 

우리시대의 「객지

황석영과 김애란 소설의 현재성에 대하여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평론집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등이 있음.

 

 

전태일(全泰壹)은 분신하는 해인 19701월에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1) 오늘, 동시대 대중으로부터 사회와 문학의 일대 혁신을 요구받고 있는 지금, 고단한 삶과 열정적인 투쟁 속에서 튀어나온 그의 이 말은 깊이 되새겨볼 만하다. 문학을 당대의 사회현실과 정치로부터 절연한 채 자율성의 공간에 ‘안전하게’ 가둬놓으려는 경향이나 반대로 점점 가혹해지는 현실의 절박함에 사로잡혀 문학의 창조적 상상력을 못 미더워하는 편향이나, 문학에 거는 희망이 적은 결과가 아닐까.

다행히 최근에 문학인들 스스로 문학의 혁신을 도모하려는 조짐이 뚜렷하다. 지난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상당수 작가·시인·비평가 들이 시민사회의 간절한 변화열망에 동참했거니와 우리 문학의 현실과 문학의 정치성에 대해서도 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왔다. 한국문학의 큰 혁신이 이뤄지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먼저 ‘문학과 정치’ 논의와 최근의 르뽀 논쟁에서 제기된 중요 쟁점을 짚고, 그 연장선상에서 리얼리즘론의 현황을 점검한 다음, 황석영(黃晳暎)의 「객지」(1971)와 김애란(金愛爛) 『비행운』(문학과지성사 2012)의 몇몇 단편을 상호비교의 관점에서 논하고자 한다. 한 세대 이상을 격한 두 뛰어난 작가의 소설적 성취를 새로 논하려는 것은 양자가 알게 모르게 공유하는 문학적 성격을 짚어봄으로써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기여와 풍부한 가능성을 헤아려보기 위해서다.

 

 

문학의 정치성과 르뽀 논쟁

 

이명박정부 때부터 혁신의 움직임은 있었다. 2008년 촛불시위 이래 젊은 문인들이 이런저런 항의시위에 적극 참여하고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냈을뿐더러, 창작에서도 그간의 탈정치적인 풍조를 반성하고 문학의 정치성을 어떻게 성취할지 모색해왔다. ‘시(문학)와 정치’로 결집된 이 논의는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적잖은 부작용과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문학의 자율성과 타율성이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님을 일깨워준 뜻깊은 계기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의의를 일축하거나 의심하는 쪽도 있다. 가령 한 좌담에서 정과리는 “문학을 혁명에 복무시키겠다는 1980년대식 생각의 현대적 변용 같은 것”으로 평하고 강계숙(姜桂淑)은 “문학이 문화산업의 회로에 종속되면서부터 비평가들이 (…) ‘정치’라는 키워드를 끄집어내어 자기의 존재증명을 온당한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 숨어 있지 않는가”라고 의심한다.2) 문제는 논의가 엇비슷한 발상을 되풀이하는 양상을 보이고 그래선지 많은 작가와 비평가가 폭넓게 참여하는 논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은영(陳恩英)의 애초의 문제의식에서부터 어떤 중요한 진전이 이뤄졌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희철(權熙哲)은 “‘문학적인 것’은 (현실정치를 반성하고 해체하며 재구성하는) ‘정치적인 것’과 매우 가까운 자리에 놓일 수 있지만 그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현실정치’에 대한 압력으로 이행하게 되는 것일까. 그러한 ‘이행’은 어떻게 가능하며 그 이행에 문학은 다시 어떻게 관여하는 것일까”(383면)라고 논평하며, ‘정치적인 것’에서 ‘현실정치’—랑씨에르(J. Rancière)의 용어로는 ‘정치’(politics)에서 ‘치안’(police)—로의 ‘이행’ 과정이 선명하지 못한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는 이 ‘이행’의 문제를 해명하는 “결정적인 무엇인가”(같은 면)를 끄집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피로 속에서도 반복적인 논의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학에서 ‘정치적인 것’과 ‘현실정치’ 간의 이행 방식과 경로를 묻는 권희철의 물음의 취지는 높이 사줄 만하다. 하지만 논의가 반복적으로 되는 것이 ‘이행’의 문제와 관련된 ‘결정적인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지 못한 탓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결정적인 무엇인가’는 그가 생각하는 ‘문학적인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권희철에게 ‘문학적인 것’은 소설에서 르뽀로 전향한 김곰치의 글에 대한 논평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곰치는 1970년대 국내소설들과 도스또옙스끼의 소설을 읽고 “아, 문학 독서란 것은 약간 의미가 있는 ‘킬링 타임’이구나!”라고 소감을 밝힌다.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체르노빌을 경험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 사랑을 기록한 『체르노빌의 목소리』(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새잎 2011)의 절심함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김곰치의 최종 결론은 “그야말로 지금은 전 인류의 비상시국이고, 하늘을 우러러 떳떳할 수 있도록 지금 제대로 밥값 하는 문학은 그런 ‘절실함’이 아니고서는 안된다는 판단”이다.3) 그가 문학을 ‘킬링 타임’으로, 르뽀를 ‘절실함’으로 단순화시킨 데 대해 권희철은 이렇게 논평한다.

 

그런데 ‘문학적인 것’은 오히려 무엇이 ‘킬링 타임’이고 무엇이 ‘절실함’인지에 대해 확정하려는 의지 자체에 대해 반성하려는 의지가 아닐까. ‘문학적인 것’은 수많은 해석이 경합하는 어떤 흐름 안에서 단 하나의 해석만이 ‘현실’이라고 확정하려는 바로 그 힘을 비틀어버리는 힘이 아닐까. 문학은 저 역설적인 의지와 힘을 표현하는 한에서 문학으로 남고, 또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위력에 대한 포기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385~86면)

 

이 대목에서 특징적인 것은 “확정하려는 의지 자체에 대해 반성하려는 의지”라든지 “확정하려는 바로 그 힘을 비틀어버리는 힘”과 같은 표현이다. 이런 문학관을 뭐라 부를지 모르겠지만—경합주의 혹은 다원주의 문학관?—현실을 어떤 하나의 해석으로 고집하고 강요하는 독선을 방지하는 이점이 있는 반면 현실의 핵심적인 면모가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탐구하는 문학의 지적·감각적 작업을 공허하게 만들기 십상일 듯하다. 권희철에게 문학의 “저 역설적인 의지와 힘”은 현실적인 위력에 대한 포기를 감수해야만 발휘될 수 있으니, 그가 ‘이행’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유가 짐작이 간다.

그렇다고 김곰치의 입장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우선 문학의 ‘킬링 타임’과 르뽀의 ‘절실함’이라는 이분법적 설정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그런 구도가 그의 독서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체험은 다를 수 있다. 게다가, 절실함에도 여러 차원이 있으니 무엇이 ‘절실함’인지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절실함’인지도 따져볼 일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절실함은 주로 생존 차원에서 제기되는 절실함일 것이다. 이런 차원의 절실함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차원, 예컨대 생존이라기보다 삶의 차원 혹은 영혼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절실함도 있다. 그가 ‘킬링 타임’ 쪽으로 분류한 도스또옙스끼의 『백치』나 『악령』은 결딴난 영혼들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절실함’이 있다. 생존 차원의 절실함에만 집착하여 다른 종류나 차원의 절실함을 얕잡아볼 일은 아닌 것이다.

공지영(孔枝永)의 르뽀 『의자놀이』(휴머니스트 2012)를 세심하게 검토하려는 서영인(徐榮裀)의 태도에도, 김곰치의 과장된 단순화와는 차이가 있지만 생존 차원의 절실함에 휘둘려 다른 차원의 절실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물론 “『의자놀이』는 절박한 현실에 대한 공감과 실감을 잃어가고 있는 한국문학의 한계와 곤경을 그 자체로 표상하고 있다”4)는 그의 판단은 일리가 있다. 한국문학의 작가들이 ‘절박한 현실’의 맥락에서 동떨어져, 있을 법하지 않은 가상세계를 헤매면서 ‘사실’ 자체를 우습게 보는 풍조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면 상당정도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의자놀이』의 르뽀를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 황정은(黃貞殷)의 「옹기전」, 김연수(金衍洙)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모음 2012)의 판타지와 비교 검토한 후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판타지의 딜레마가 좀처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지점을 『의자놀이』는 르포의 방법으로 내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자체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방법으로, 그것이 가진 무한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우선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로써”라고 논평하는 데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서영인의 논지를 김곰치식으로 표현하면 르뽀의 ‘사실’과 소설의 ‘판타지’를 대립구도에 놓고 양자의 미흡함을 모두 지적하되 전자의 손을 들어주는 형국이다. 단박 드는 의문은 르뽀의 ‘사실’을 그렇게 사주면서 사실적인 작품이 수두룩한 김애란의 『비행운』에서 하필 사실주의 기율을 넘어서는 「물속 골리앗」을 택했는가의 문제이다. 황정은의 경우도 정도는 덜하지만 비슷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아마도 『의자놀이』에서처럼 크레인과 망루 같은 상징이 등장하는 소설을 고른 결과일 테지만, 이런 편의적인 비교는 사태를 왜곡할 수 있다. 더군다나 “현재의 한국문학장 내에서 발현되고 있는 판타지와 르포는 동일한 상황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실의 위력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것을 돌파할 문학적 방법이 묘연한 것, 이것이 판타지와 르포가 공통으로 부닥친 장벽이 아닌가. 부정적인 현실이 너무나 압도적이고 위력적이어서 판타지와 르포는 모두 그 현실을 파고들 동력을 얻지 못한다”(28~29면)고 논평하려면 사실주의 계열의 소설들을 필히 검토했어야 하지 않을까. 서영인이 르뽀와 판타지 사이에 상당수준의 리얼리즘 문학—최근의 알찬 결실이 바로 『비행운』과 『파씨의 입문』(창비 2012)인데—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문학의 정치성과 리얼리즘론

 

언제부턴지 리얼리즘론은 예술적으로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문학론으로 여겨지고 기껏해야 미학적 보수주의의 대명사쯤으로 취급되는 것이 평단의 현실이다. 물론 문학과 정치 논의와 관련하여 리얼리즘론을 재검토하거나 재구성하려는 작업이 없진 않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았다. 가령 “‘잔해’로서의 ‘리얼리즘’”이라는 발상을 제시한 고봉준(高奉準)은 “‘시와 정치’에 관한 평단의 논의는 ‘리얼리즘’에 대한 부채의식 없이도 문학이 정치를 사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최근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리얼리즘 개념과 무관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5)고 하면서 양자가 무관함을 기정사실화하려 든다. 리얼리즘의 급진적 재구성을 시도한 장성규의 경우는 “총체성과 반영론과 당파성의 틀에 갇힌 사물화된 리얼리즘”6)을 강력히 비판할 뿐 어떤 새로운 미학적 대안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런데 소설가 권여선(權汝宣)은 이와 다른 취지의 발언으로 주목을 끈다.

 

문학의 정치성과 관련해서 보면, 그런 관심이 시나 소설, 평론으로 곧바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문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이론적인 고민들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은 들어요. (…) 우리가 문학, 정치, 역사, 혁명 등의 거대한 테마를 오랜 시간 거쳐 왔잖아요. 리얼리즘이나 민족문학이 열정적으로 주창되기도 하고 또 폐기되기도 하고. 그런데 요즘 몇몇 문예이론가와 평론가들이 그 범주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총체성이란 게 뭐냐, 전형성이란 게 뭐냐, 예전에 우리가 규정했던 그 개념이 과연 그에 합당한 개념이었냐, 뭐 그런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보자는 거죠.7)

 

권여선은 앞선 논자들과 달리 문학과 정치 논의에서 촉발된 “근본적이고 이론적인 고민들”이 한때 ‘폐기’되기도 한 리얼리즘을 재검토하는 작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리얼리즘의 핵심범주인 총체성과 전형성을 다시 들여다볼 것을 요청하는 태도는 그 개념들을 재검토하지 않은 채 ‘잔해’ 혹은 ‘사물화’의 딱지를 붙이는 태도와는 다르다. 권여선의 발언은 분명 고무적이지만, 리얼리즘론을 주창하고 나름의 쇄신작업을 시도해온 평론가들의 노력까지 반영한 것은 아니다. 가령 리얼리즘과 민족문학의 열정적인 주창자라 할 백낙청()은 리얼리즘을 폐기한 적이 없을뿐더러 맑스주의 리얼리즘의 ‘총체성’ ‘전형성’ ‘당파성’ ‘현실반영’ 같은 핵심범주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을 처음부터 시도했고, 그 결과 중요한 입장 차이를 표명했다.8)

백낙청은 문학과 정치 논의의 바탕을 제공한 랑씨에르의 예술체제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검토를 시도했는데, 앞으로의 논의에 요긴한 논점만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랑씨에르의 사실주의(realism) 개념을 검토하는 부분이다. 알려진 대로 랑씨에르의 예술체제론은 플라톤이 대변하는 ‘윤리적 체제’(ethical regime),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도한 ‘시학적-재현적 체제’(poeticrepresentative regime) 그리고 근대/현대 특유의 ‘미학적 체제’(aesthetic regime)로 나뉜다. ‘시학적-재현적 체제’에서 ‘미학적-감성적 체제’로 도약하는 시발점에 위치한 랑씨에르의 사실주의는 결코 재현의 거부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닮음의 중시’(valorization of resemblance)보다는 ‘재현적 체제’의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위계질서의 전복’을 실감하는 데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 1856)에 대한 랑씨에르의 다음 논평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귀한 주제도 천한 주제도 없다는 것이 플로베르가 표명한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진술이다. 시적인 소재와 산문적인 소재를 나누는 경계도, 고귀한 행위의 시적 영역에 속하는 것과 산문적인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 사이의 경계도 없다는 뜻이다. 이 진술은 개인적인 신념이 아니다. 이것은 문학 그 자체를 구성하는 원칙이다. 플로베르는 이를 예술의 원칙으로 강조한다. 순수한 예술이란 소재에 어떤 위엄도 부여하지 않는 예술이라는 것이며, 이는 예술에 속하는 것과 비예술적인 삶에 속하는 것 사이의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 그렇기에 예전의 순수문학 수호자들이 작가와 인물 간의 공모를 맹비난한 것이다. 그녀〔에마〕가 자극의 원천과 쾌락의 형식을 가리지 않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듯 그〔작가〕는 어떤 주제도 평등하게 다루는 ‘민주주의’를 구현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 그는 인물들에 대해 똑같은 감정을 느끼며, 그들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의견은 없다. 인물의 민주주의적 자극과 작가의 민주주의적 무감함은 동전의 양면이거나 같은 질병의 두가지 변종인 것이다.9)

 

랑씨에르에게 사실주의란 사실적 재현보다 감각체험에서의 자율성, 즉 기존의 어떤 경계에도 매이지 않는 철저한 ‘민주주의’를 뜻한다. 작가와 인물의 관계에서도 작가는 자기가 창조한 인물들에 대해 어떤 선호의 감정 없이 똑같은 무감함으로 대하는 ‘민주주의’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백낙청이 제기하는 논점은 크게 두가지다. 즉 랑씨에르의 사실주의는 “‘재현적 체제’의 위계질서를 전복한 점이 강조되고 근대의 도래와 더불어 예술에서 사실적 재현이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된 점에 대한 인식은 미흡해 보인다”10)는 것이다. 그러고는 리얼리즘 문학의 도래가 뜻하는 바를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명제를 빌려서 해명한 자신의 글을 인용한다.

 

즉 문학은 실제로 일어났기보다 일어남직한 일을 말해준다는 대원칙만은 그대로 남는다 해도, ‘일어남직한 일’의 정립에 있어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 일어날 수밖에 없거나 일어나야 마땅한 일 등에 대한 사실적(事實的) 인식—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역사가’의 인식—이 전혀 새로운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주의의 사실성(寫實性)이 갖는 본질적 의의는 바로 이러한 역사인식·세계인식의 전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77면)11)

 

랑씨에르와 백낙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적-재현적 체제’의 원칙을 변혁하거나 수정한다. 랑씨에르의 사실주의가 시학적-재현적 체제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적인 예술체제로 전환한다면, 백낙청의 리얼리즘은 시학적-재현적 체제의 문학론에서 ‘역사가’의 인식—즉 역사와 세계에 대한 과학적·사실적 인식—의 의의가 새로워진 예술로 나아간 것이다.

백낙청의 또다른 논점은 랑씨에르가 3단계의 예술체제를 엄격하게 구분함으로써 생겨나는 부작용이다. 가령 미메씨스를 엄격한 위계질서의 시학이라는 의미의 ‘재현적 체제’로 규정함으로써 “일반적 의미의 미메씨스(mimesis) 내지 재현이 모든 예술체제에 공존한다는 사실이 흐려지고 만다”는 것이다. ‘윤리적 체제’의 구분에서도 비슷한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 후, “예술작품은 아마도 태곳적부터 윤리적이고 재현적이면서 미적(〓감각체험적)이기도 했으리라는 점이 랑씨에르적 분류법의 도식적 적용으로 간과되지 말았으면” 한다고 결론짓는다.

랑씨에르 사실주의의 ‘민주주의’와 백낙청 리얼리즘의 ‘사실적 인식’ 중시는 근대 예술론의 양축이라 할 만하며, 상호보완적인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랑씨에르 사실주의의 감각체험적 민주주의는 앞서 『보바리 부인』에 대한 논평에서 보듯 플로베르의 작품만큼이나 ‘무정부주의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삶과 예술에서 모든 경계, 모든 금기를 무너뜨리는 해방적인 측면과 아울러 쓸데없이 온몸의 감각을 혹사하는 소모적인 측면이 함께 있다. 또한 작가가 인물들에 대해서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인물들의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개인적인 의견이 없다는 것이 예술적으로 꼭 바람직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래선지 앞의 인용문에서 “인물의 민주주의적 자극과 작가의 민주주의적 무감함”을 “같은 질병의 두가지 변종”에 빗댄 표현 쪽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객지」의 탁월성

 

황석영의 「객지」는 1970년대 이래 오랫동안 리얼리즘 문학의 본보기로 꼽혀왔다. 그런데 발표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객지」는 ‘예술적’으로 얼마나 평가해줄 만한 작품일까. 반복적인 해석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통적(맑스주의적) 리얼리즘의 관점과는 다르게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랑씨에르가 「객지」를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정해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앞서 거론한 랑씨에르의 ‘미학적-감성적 체제’와 『보바리 부인』에 대한 논평에 근거하여 판단하건대 랑씨에르는 「객지」를 굉장히 인상적으로 보고 높이 평가할 가능성은 있지만 『보바리 부인』만큼 철저하게 ‘미학적’인 작품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 같다. 어쩌면 황석영의 초기작 가운데 오히려 「섬섬옥수」(1973)를 더 주목할지 모른다. 이 소설이야말로 한국판 『보바리 부인』이라고 부름직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장편과 단편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 여자가 세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겪는/즐기는 감각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령 「섬섬옥수」의 주인공인 여대생 박미리는 부잣집 아들 장만오와 시골출신 고학생 김장환, 아파트 관리실의 공인 상수와의 관계를 거치면서 “자극의 원천과 쾌락의 형식을 가리지 않는”다. 인물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서도 황석영 작품치고는 드물게 모든 인물에 대해—플로베르의 “민주주의적 무감함”까지는 아니라도—공평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냉정함이 도드라진다.

「객지」도 물론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이 소설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세상의 위계질서에 맞서는 서사적 차원의 ‘민주주의’뿐 아니라 ‘재현적 체제’의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미학적 차원의 ‘민주주의’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귀한 주제와 천한 주제, 시적인 소재와 산문적인 소재, 예술적인 것과 비예술적 삶을 구분하고 양자의 우열을 질서화한 재현적 위계질서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이 가로지름의 방식은 『보바리 부인』이나 「섬섬옥수」의 그것과는 다르다. 두 소설의 경우 가로지름은 여주인공에게 대립항의 양쪽이 우열 없이 똑같은 감각체험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지만, 「객지」의 경우 파업이라는 중심 사건이 진행되고 주요 인물이 변화함에 따라 작품이 대립항의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애매해지며 심지어 대립의 발상 자체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가령 밑바닥 노동자들의 궁핍하고 부박한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천한 주제, 산문적인 소재, 비예술적인 삶 쪽에 속하지만 그들이 삶다운 삶을 누리고자 함께 정치투쟁을 벌임으로써 주체로 변모하고 동료들을 위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소설은 어느새 고귀한 주제, 시적인 소재, 예술적인 것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중첩되게 된다.

「객지」는 그런 특이하고 발본적인 방식의 가로지름을 내장하고 있기에 보통의 사실주의(자연주의) 소설, 그리고 르뽀와 다른 깊이를 갖게 되었다. 당대 사회의 어둡고 비참한 구석을 들춰내 낱낱이 기록하려는 자연주의 서사와 르뽀 가운데는 고귀함과 천함,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영인이 『의자놀이』의 르뽀적 미덕을 높이 사면서도 “정작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작가에 의해 대행된 서술 속에서 밀려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이 연민과 관심의 대상으로 타자화되는 것”을 우려할 때(28면) 그것은 자연주의 서사 일반의 취약성과 통하는 지점을 짚은 것이다. 「객지」가 주는 감흥은 이와 전혀 다르다. 만약 서영인의 발언을 뒤집으면 그것이 바로 「객지」의 미덕을 짚는 논평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객지」의 인물들이 감각체험의 차원에서 『보바리 부인』의 에마처럼 ‘민주주의적 자극’을 구현하고 있지 않음도 분명하다. 서해안의 ‘운지 간척공사장’에 모인 날품 노동자들은 마치 고립된 수용소에서처럼 고된 노동을 반복하면서 노동력을 유지할 만큼의 음식과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뿐이고, 여흥이라곤 술과 노래가 고작이다. 그들의 감각에 ‘자극’을 주는 것은 한마디로 가혹한 노동과 감독자·착취자로부터의 부당한 압박이며, 파업과정에서 돈독해지는 동료들끼리의 연대감이 임계점으로 치닫는 그 ‘비민주적인’ 자극과 신경 압박을 겨우 견디게 해준다. 요컨대 그들의 감각체험은 가혹하고 ‘비민주적’이고 척박하다. 하지만 한가지 변수가 있다. 파업에 참여하는 주체들, 아니 파업을 방해하려는 사람들까지 흥미진진한 정치드라마 같은 역동적 현실을 상당기간 ‘온몸’으로 체감할 가능성 말이다. 이를 감안하면 「객지」는 감각체험의 차원에서도 결코 느슨하거나 빈곤하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인물들의 지적·감성적 감각이 한껏 ‘자극’되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 점은 중국의 비평가 쑨 거(孫歌)가 ‘정말 뛰어난 부분’이라고 지목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소설에서 정말 뛰어난 부분은 바로 정치투쟁, 특히 감정에 의지해 조직해낸 군중운동의 변화무쌍한 과정과 그 과정에서 매 순간순간 내려야 하는 판단의 중요성을 남김없이 잘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혁이라는 인물의 상당히 출중한 정치적 판단력은, 그가 현실정치라는 것은 추상적인 불변의 ‘그 무엇’이나, 추상적인 정의의 개념으로 실행하고 해석할 수 있는 정태적인 대상이 아니라 매 중요한 순간에 주체가 선택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동태적이며 역동적인 관계라는 것을 이해한 점에 잘 나타난다. 「객지」는 바로 이러한 순간의 내재적인 몇몇 장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 결정적인 순간에도 항상 불확정성으로 충만해 있고, 또한 그로 인한 초조함과 회의로 충만해 있다.12)

 

쑨 거는 이렇게 「객지」의 탁월성이 ‘정치투쟁의 역동적 과정’을 적실하게 드러낸 데 있음을 강조한다. 쑨 거의 주장은 전통적인 리얼리즘론과 랑씨에르의 사실주의, 그 어느 쪽과도 완전히 부합되지 않지만 양자와 겹쳐지는 지점도 있다. 가령 리얼리즘 논자인 하정일(河晸一)은 “「객지」에서 파업이 갖는 두가지 의미, 곧 자본주의의 허구성이 낱낱이 밝혀지는 장이자 자본에 대한 최후의 저항수단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지는데, 파업을 매개로 이 두 축을 결합시키는 데 성공한 점만으로도 「객지」는 70년대 한국문학의 최고봉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다”13)고 상찬한다. 하지만 문학의 본령은 ‘현실정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것’—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바꾸는 일—임을 강조하는 랑씨에르가 하정일의 주장에 동의할지 의문이다. 파업이라는 ‘현실정치’의 진행과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파업의 본질적 성격을 깊이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정치적인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용한 쑨 거의 마지막 문장은 ‘현실정치’의 사실적 재현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즉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체의 선택과 결단이 요구되는 정치투쟁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감각적인 것의 배분’에도 영향을 미치는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이 암시되는 것이다. 충만해 있는 ‘불확정성’과 ‘회의와 초조’는 그런 변화의 가능성을 일러주는 표지일 것이다. 쑨 거의 해석은 맑스주의 리얼리즘과 랑씨에르적 사실주의 개념 양자가 모두 놓치기 쉬운 「객지」의 예술적 탁월성—즉 ‘현실정치’(〓‘치안’)가 어떻게 ‘정치적인 것’과 결합되는지를 실감케 하는 부분—을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쑨 거가 탁월성으로 지목한 ‘정치투쟁의 역동적 과정’이란 것이 당대 한국의 현실과 노동자들의 일상에 대한 ‘사실적 인식’ 없이는 애초부터 재현하기 불가능하다는 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두 문학론이 가장 불일치하는 대목은 아마 인물(특히 주인공) 형상화의 문제, 그리고 그와 연동되어 있는 작가와 주인공의 관계 문제일 것이다. 맑스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성’ 개념은 장편소설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객지」 같은 중편에서도 흔히 준용되어왔다. 그런데 「객지」의 주인공 동혁의 형상화(그리고 그와 불가피하게 연동되는 결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리얼리즘 논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뉜다. 먼저 동혁이 발길에 채는 남포를 입에 문 상태에서 죽음을 결단하는 듯한, 결말 부분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그는 자기의 결의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거의 텅 비어버린 듯한 마음에 대하여 스스로 놀랐다. 알 수 없는 강렬한 희망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그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동혁은 상대편 사람들과 동료 인부들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그는 혼자서 다짐했다.14)

 

이에 대해 성민엽(成民燁)은 “감동적임에도 불구하고 낭만적 허위의 색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15)고 일격을 가하고 하정일 역시 “동혁에 대한 이러한 영웅주의적 형상화는 인물의 현실성을 상당히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리얼리즘적 성취를 제약하는 가장 큰 요인”16)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부정적인 견해들에 대해 임규찬(林奎燦)은 “‘동혁’의 형상화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향한 외침이자 미래에의 전망을 달성하고자 하는 당대 현실의 경향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손쉽게 낭만화 혹은 영웅주의화로 명명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맞받아치고 “전형적인 인물의 전인적인 창조보다는 ‘전형적 상황과 전형적 성격’의 창조에 주안점을 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17)

이 논의는 쉽사리 끝나지 않을 듯하다. 동혁의 마지막 결단은 어찌 보면 그 나이또래의 혈기왕성한 청년이 정의감에 이끌려 저질러버린 과한 행동—시쳇말로 ‘오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전태일처럼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 사심없이 자기 몸을 불사르는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후자를 의도했을지 모르나 작품에는 이렇게 애매하게 구현된 것이다. 그런데 이 애매한 형상화가 양쪽 중 어느 한쪽으로 확정될 때의 형상화보다 오히려 낫고, 그런 까닭에 분신이 암시될 뿐 확정되지는 않는 발표본이 수정본보다 낫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보면 쑨 거가 상찬한 동혁의 ‘출중한 정치적 판단력’에 대해 작가가 “오랫동안 노가다판에서 분쟁을 겪어 선택의 감각이 예민해진” 덕분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성격일 따름”(37면)이라고 서술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설명은 얼핏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동혁의 타고난 정치적 감각과 결말의 애매함이 맑스주의 리얼리즘의 다분히 상투화된 ‘전형성’—이를테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4) 이후에 굳어진 노동자상—에는 맞지 않을지라도, 종종 본인도 해명하지 못하는 살아 있는 한 개인의 결정적인 행동으로서는 더 실감나는 면이 있다. 중편치고는 상당히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작가는 그 각각에 대해 소설서사에 필요한 만큼의 형상화작업을 하면서 공감과 비판의 뉘앙스를 적절히 조절한다. 플로베르의 장편이나 자신의 「섬섬옥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형상화 방식인 것이다. 그 효과는 대위와 장씨 같은 주요 인물들이 고유한 개인으로서 실감되는 동시에 간척공사장 떠돌이 노동자 다수의 집단적 존재감과 움직임도 감지되는 것이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는 다짐으로 끝나는 결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 가령 황광수(黃光穗)는 “쟁의 자체의 의미에서 볼 때 ‘열려진 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이상의 가망성이 없는 ‘닫혀진 끝’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물론 작가 자신의 개인적 역량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60년대식 노동쟁의의 한계 (…) 무엇보다 떠돌이 노동자들로 구성된 공사판 그 자체가 지닌 소재적 한계이기도 하다”라고 비판한다. 황광수가 이처럼 「객지」의 여러 한계를 맹비판한 데는 소설의 결말이 조직적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를 ‘개인적인 결단’으로 처리했을뿐더러 동혁의 마지막 다짐이 ‘근거 없는 낙관’을 퍼뜨림으로써 현실의 노동운동을 어렵게 만든다는 판단이 작동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오히려 이런 비판을 추동했던 경직된 맑스주의 리얼리즘론의 한계들이다. 그후 한국사회는 산업화시기를 거치면서 세계적 규모의 대기업과 숱한 공장이 생겨나면서 상당수 작가들이 산업노동자의 삶을 소설화하려고 시도했지만 노동하는 사람들을 다룬 소설로 이제껏 「객지」만큼 확실한 소설적 성취를 내놓지 못했다. 신경숙(申京淑)의 『외딴 방』(문학동네 1999)2000년대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깊숙이 파고든 젊은 소설가들의 몇몇 작품만이 「객지」와 견줄 만하다는 생각이다.

 

 

김애란 소설의 실험성과 대중성

 

황석영의 「객지」를 다시 읽으면서 ‘우리시대의 「객지」’로 어떤 소설을 꼽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줄곧 떠올랐다. 독서로 실감한 「객지」의 현재성 혹은 여전한 생명력에 대한 고민이 꽤 깊어졌을 때야 비로소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이 말은 다른 소설들은 우리시대의 「객지」가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며, 「객지」와는 성격이 판다른, 예컨대 2000년대 이래의 각종 실험적인 소설과 장르소설이 한국문학의 다양성과 언어적 혁신에 기여했음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비행운』이 특별한 것은 「물속 골리앗」을 제한 대부분의 단편이 우리시대의 노동과 삶을 ‘사실적’으로 다뤘다는 것뿐이 아니다.18) 진정 주목할 대목은 대다수 비평가들이 전제하듯 소설의 실험성과 창조성이 반사실주의 혹은 반재현주의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시대 문학의 창조적 활력은 사실주의에 내포된 실험성과 창조성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에 크게 좌우되라는 것을 보여준 점이다.

중편인 「객지」를 『비행운』의 어느 한편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몇편을 함께 고려한다면 그럴듯하다는 생각이다. 「하루의 축」 「너의 여름은 어떠니」 「서른」을 사실주의의 실험성에 초점을 맞추어 논하기로 한다. 육체노동의 현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객지」와 가까운 작품은 인천공항 여자화장실 청소부의 하루를 추적한 「하루의 축」이다. 이 작품의 새로운 점은 한 평자가 재치있게 평했듯 “그간 김애란 소설의 중심인물이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인물’이었던 반면,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정말로 알지 못하는 인물’인 것”19)이다. 사실 소설은 기옥씨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제한된 인식밖에 가지지 못했음을 수시로 일깨운다. 이 소설은 이를테면 제한된 인식의 주인공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그가 처한 현실을 읽게 하는 일종의 ‘실험’이다.

먼저 김애란 소설에서는 생활과 삶이 밀접하게 연관되나 등치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의 소설만의 특성은 아니지만, 그의 소설문법의 기초이자 사실주의 실험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하루의 축」의 기옥씨에게도,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서미영에게도, 「서른」의 수인에게도 일상적으로 영위되는 ‘생활’의 차원과 “정말 살아있다는 그 느낌”20)의 충만한 ‘삶’이라는 또다른 차원이 있다.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만만찮고 ‘생활’이 무너지면 곧바로 ‘생존의 차원’으로 내몰린다. 「객지」의 동혁과 대위에게도 ‘생활’과 ‘삶’의 차이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노동판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살아가는 ‘생활’이 중요하긴 해도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삶’은 아니기에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기옥씨는 무식할지언정 ‘생활’과 ‘삶’의 차이를 ‘감’으로 구분할 줄 안다. 그녀에게 ‘삶’이 가능하려면 교도소에 있는 아들 영웅이 달라져야 한다. 아들이 불행한 상태에서 그녀가 ‘삶’을 제대로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아들이 교도소에 가는 순간부터 생긴 기옥씨의 스트레스성 원형탈모는 “어느새 수박만큼 커진”(191면) 상태이다. 그러나 기옥씨는 온전한 ‘삶’은 아닐지라도 그냥 ‘생활’의 차원에 머물지는 않으려고 애쓴다. 그래서 추석 전날 자신을 위해 음식을 장만한다. “기옥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 시간에게, 자연에게, 삶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제안하듯 말이다. 기옥씨는 그걸 ‘말’이 아닌 ‘감’으로 알았다.”(178면) 즉 소설은 기옥씨가 인식은 제한되었을지언정 ‘정말로 알지 못하는 인물’이라기보다 “‘말’이 아닌 ‘감’으로” 중요한 것을 많이 알고 기본적으로 건강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사건은 이렇다. 기옥씨는 하루의 노동이 끝난 후에야 아들의 편지를 읽는데 기대와 달리 “엄마, 사식 좀”(197면)이라는 딱 한마디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넋 나간 듯이 앉아 있다가 파트장에게 가서 ‘부평 아줌마’가 억지로 떠맡은 추석 근무를 자청한다. 그러나 모자를 챙겨 쓰지 못해서 “가운데 머리가 통째로 없어 마치 암 환자”(201면) 같은 그녀의 간청하는 모습이 파트장의 눈에는 괴상망측하게 보였다. 남는 물음은 기옥씨가 아들 편지에 낙심한 후 왜 야근을 자청하느냐이다. 그녀는 ‘감’으로 행동했을 터이므로 확답하기는 어렵다. ‘삶’의 희망이 사라지자 ‘생활’전선으로 돌아와 아들의 ‘사식’비라도 벌겠다는 건지 아니면 자기는 무산된 ‘삶’을 동료인 ‘부평 아줌마’라도 누릴 수 있게끔 해주겠다는 건지 애매하고, 아마 양쪽 다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마치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이라도 하듯”(201면) 부탁하는 기옥씨의 간절함과 원형탈모의 섬뜩함이 합쳐진 그 장면이 무척이나 그로테스크했다는 것이다.

기옥씨의 성공적인 형상화에는 특이한 시점 운용이 요긴한 역할을 한다. 독자는 마치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카메라를 따라가면서 기옥씨가 체험하는 노동과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그 카메라의 제한성을 일깨워주는 더 큰 시선을 느낀다. 이를테면 기옥씨를 따라가는 시선과 그 시선 너머를 비춰주는 시선이 동시에 작동하는데, 두 시선이 따로 움직이다가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면서 예기치 못한 소설적 효과를 빚어낸다. 즉 르뽀나 다큐멘터리 같은 자연주의적 사실성의 효과를 거두는 동시에 그 시선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기옥씨를 따라가는 시선이 포착한 장면으로 가령 이런 대목을 보라.

 

기옥씨는 양동이를 들고 이제 막 누군가 용무를 보고 나온 자리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훅하고 피비린내가 끼쳤다. 방금 전 덩치 큰 백인 여성이 어두운 얼굴로 지나간 자리였다. 어쩐지 눈도 안 마주치고 급히 자리를 뜨더라니. 기옥씨는 경험상, 가끔은 피 냄새가 똥 냄새보다 역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최악은 ‘생리 중인 여자가 똥을 누고 간’ 경우였다. 기옥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탈취제를 뿌리고 변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꽃처럼 활짝 벌어진 따끈한 생리대를 보며 역시 화장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더럽게 쓴다는 걸 확인했다.(185면)

 

기옥씨의 ‘공감각적’인 체험과 경험상의 논평을 통해 제시된 국제공항 여자화장실의 광경은 중년 여인의 시선과 감각이 스며 있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런 노동현장의 생생한 묘사, 나아가 기옥씨가 감지하는 세계에 대한 뛰어난 사실적 재현은 「객지」에도 뒤지지 않는다.

또 하나의 시선은 기옥씨가 이해하는 반경 너머의 세계를 보여준다. “현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정적(靜的)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때,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것이 공항에는 있었다. (…) 시커먼 타이어 자국이 밴 활주로 사이로 휘이- 시원한 가을바람이 지나갔다. 정차된 항공기들은 모두 앞바퀴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불어와 어떤 세계로 건너갈지 모르는 바람이었다. 몇몇 항공기는 탑승동 그늘에 얌전히 머리를 디민 채 졸거나 사색 중이었다”(176면)라고 서술할 때 그 시선은 기옥씨를 너머 자유롭게 움직인다. 소설의 서술 대부분은 이 두 시선의 조합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공항을 오가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흘리고 간 쓰레기들이 모이는 곳에 주인공을 위치시켜, 세계의 불가해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낸다”(582~83면)라고 해석하는 것은 두 시선의 의미를 충분히 감안한 독법은 못된다. 두 시선, 이를테면 작가와 인물의 시선을 가려서 읽으면 우리는 ‘세계의 불가해성’ 한가운데서도 자신의 노동에 충실한 한 중년 여자를 실감하게 된다.

기옥씨는 김애란 소설에서 작가의 ‘분신’ 같은 느낌을 완전히 떨쳐버린 새로운 유형의 주인공이다. 작가가 주인공을 자기화하지도 상투화하지도 않고 끝까지 직시했다는 느낌이 든다. 오래전부터 비정규직 중년 여성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그들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한국소설에 기옥씨의 출현은 뜻깊은 성취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주로 1인칭 화자 서미영의 시점을 따라가지만 준이 선배가 또다른 시점 역할을 한다. 여기서도 시선은 하나가 아닌 둘인데, ‘생활’과 ‘삶’의 두 차원을 놓고 두 시선이 벌이는 ‘대화적’ 관계가 눈길을 끈다. 이 소설의 주된 관심사는 한 구체적인 개인이 ‘타자’라 불리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에 맞춰져 있다. 소설은 이런 타자성의 탐구를 ‘삶’과 ‘생활’의 두 차원과 관련시키되 후자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미영은 선배에게 자신의 궁핍한 ‘생활’을 보이고 싶지 않지만 선배는 오히려 미영에게서 ‘생활’이 보여서 좋다고 한다. 그 순간 미영은 “이제부터 이 사람을 본격적으로 좋아해야겠다고 다짐”(24면)한다. 인생은 언제나 ‘삶’을 향하지만, 타자로부터 ‘생활’의 차원을 인정받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지점이 있다. ‘생활’이 ‘삶’의 보루이자 타자성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일차적인 지표가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타자성의 탐구에서 감각체험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케이블TV의 조감독이 된 선배는 미영에게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에 출연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선배의 꼬드김과 간곡한 요청에 멋모르고 출연한 미영은 숨기고 싶은 자신의 뚱뚱해진 ‘몸’을 오히려 적나라하게 강조해야 하는 곤욕을 치른다. 그것이 선배 쪽의 원래 의도였음을 알고는 배신감까지 더해진다. 더 의미심장한 감각체험은 피디로부터 쌍욕을 들으면서도 ‘생활’ 전선에서 살아남으려는 선배의 안간힘이 미영의 팔뚝을 잡는 행위를 통해 전달되는 대목이다. “선배가 다급히 내 팔뚝을 잡았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선배는 손에 계속 힘을 주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던지 팔뚝이 아릴 정도였다.”(33면) 선배는 삐쳐서 도망치듯 가버리는 미영을 달래려고 또 한번 미영의 팔뚝을 완강하게 잡는다(37~38면). 미영은 병만의 장례식 문상까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누워서 ‘여덟살, 여름방학 때의 일’을 떠올린다. 그 추억의 핵심은 병만이 물에 빠진 미영을 구하는 장면이다.

 

생전 처음 겪는 공포가 밀려왔다. 아득하고 설명이 안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더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순간 있는 힘을 다해 그 팔을 잡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손을 잡을 이가 아플 거란 걸 알았지만 손에서 힘을 뺄 수 없었다. 아니, 그럴수록 그 팔을 더욱 세게 잡게 되었다. (…) 그리고 가까스로 뭍으로 나왔을 때 물에 흠뻑 젖은 채 창백해진 병만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누군가의 손톱자국을 따라 깊게 홈이 파인, 살짝 핏물이 맺힌 채 시퍼렇게 멍이 든 그 애 팔뚝도……(41~42면)

 

병만의 팔뚝에 새겨진 손톱자국과 멍 때문이기라도 한 듯 얼마 후 미영은 통증을 느끼고 선배가 자기 팔뚝에 남긴 ‘멍’을 발견한다. 곧이어 깨달음의 순간이 밀어닥친다.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44면) 들었다. 그후 미영이 “손톱으로 그렇게 눌리면 아팠을 텐데……”(44면) 하면서 크게 울어버린다. 미영은 병만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김애란 소설에서 ‘물’이 지닌 원초적 생명력을 감안하면, 병만이 미영을 구하는 장면은 대단히 사실적이면서 고도로 상징적이다. 그것은 위급한 순간의 생생한 재현이자 구조자나 피구조자에게 모두 ‘재생’의 의미를 갖는 상징성을 띤다.

타자를 ‘타자화’시켜 배제하지 않고 존중하는 방식도 여럿일 수 있다. 하나는 들뢰즈(G. Deleuze) 식의 ‘타자-되기’(becoming)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아감벤(G. Agamben) 식의 ‘있는 그대로의 존재’(whatever being) 방식이다. 전자가 소수자인 타자 쪽으로 자기 존재를 변모시키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나는 나대로 타자는 타자대로 각각의 ‘고유성’을 지키는 방식이다. 이 소설을 통해 김애란이 보여준 방식은 그 중간쯤이다. 즉 타자의 필사적인 요청에 응하여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몸’으로 아파하되 나는 나됨을 타자는 타자됨을 지키는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이런 타자성의 심오한 문제를 ‘생활’인의 감각으로, 사실적이되 상징적인 언어로 탐구한 수작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주제를 이어받아 ‘타자성의 윤리’를 묻는 작품이 「서른」이다. 하지만 「서른」은 한 개인의 윤리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자본주의 현실의 핵심을 찌르는 깊고 애절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 이 울림은 「서른」이 편지 형식을 취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다. 「서른」의 비범함은 무엇보다 서간체 형식의 특성을 우리시대의 인간관계와 노동의 성격을 심층적으로 탐사하는 데 걸맞게 구사한 데 있다. 일견 소품처럼 보이는 「서른」은 이런 점에서 대담한 발상의 작품이다. 그 울림에 주목하여 몇몇 중요한 점만 거론하기로 한다.

“언니 잘 지내요? 언니를 언니라 불러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289면)라고 시작되는 편지는 서른의 나이가 된 수인이 10년 전에 함께 독서실 방을 썼던 성화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 평범한 인사가 이 소설을 다 읽은 다음에는 마음을 에는 절절한 언어로 변모한다. 수인한테는 ‘언니를 언니라 불러보는 게’ 바로 ‘삶’인 것이다. 수인의 말에 이런 애절함이 서리는 것은 그녀가 다단계판매 업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학원강사 시절 자기를 따르던 수강생 혜미를 끌어들인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떼어놓을 수 없다. 수인 자신도 예전 남자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인생 막장 같은 곳으로 들어갔던 것과 똑같이. 하지만 이런 직접적인 애절함의 표현은 편지라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신체적인 접촉은커녕 맞대면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감성적 강도는 앞서 거론한 두 작품의 경우보다 오히려 더 절절한 것이다.

이 점은 혜미가 수인한테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샘 여기 분위기 쩔어요. 원래 이런 건가염. 샘 배고파요. 밥 사주세염. 샘 왜 제 문자 씹어요. 샘 전화 좀. 샘 어디세요. 샘 전화 한번만. 샘 저 좀 꺼내주세요……”(317)—도 마찬가지다. 요즘 신세대의 시시껄렁한 SNS 어투지만, 마치 어린 미영이 물에 빠졌을 때 느꼈던 공포와 절박감이 묻어나는 것이다. 독자인 우리가 혜미로부터 직접 문자를 받은 것도 아니고, 혜미가 수인한테 보내고 수인이 성화한테 편지로 알려준 문자를 훔쳐보듯 읽을 뿐인데도 그 감성적 울림이 마음에 직방으로 와 닿는 것이다. 수인의 편지와 혜미의 문자는 감각체험 없이 곧장 독자의 마음에 꽂히는데, 이 점이 오늘의 역설적 현실에 방불하다. 직접적 감각체험 역시 그 종착지가 ‘마음’이라면 오늘날 젊은이들의 감각이 가상성에 직접 노출되어 있는 꼴이기 때문이다.

가상성이 높을수록 직접적이고 본질적일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노동의 성격에서도 관찰된다. 「객지」의 공사장 막노동에서 「오늘의 축」의 화장실 청소,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방송서비스 노동, 「서른」의 ‘전화질’을 통한 판매에 이르는 변화는 노동의 성격이 근력 중심에서 감정-신경 중심으로 이행하면서 노동에서 가상성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변화는 노동이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변질을 겪는 것이라기보다 노동의 본질이 더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측면이 있다. 가령 수인은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팔고 있는 게 물건이 아니었더라고요. 제가 팔고 있던 건 사람이었어요”(307면)라고 말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는 다단계판매의 특수성—즉 안면있는 사람한테 터무니없는 값으로 물건을 파는 일은 ‘인간관계’를 파는 일이라는 것—을 가리키지만, 자본주의체제의 근본 속성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노동하는 것은 노동력을 파는 일인데, 다단계판매 노동은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파는 일이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객지」에서 간척공사 막일이 노동의 막장이라면 청년실업, 고액등록금 등의 기제를 통해 대학생들을 ‘객지’ 노동으로 동원하는 다단계판매야말로 우리시대 노동의 막장이 아닐까.

「객지」에서 ‘객지’의 의미는 산업화초기에 농민들이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이농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객지」의 떠돌이 노동자들은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상당수 흡수되지만 그것은 한국민의 상당수가 객지에 정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수도권집중화가 전일화되면서 지방학생들이 수도권에 몰리는 현상이 점증했다. 수인이 “과거에는 대학생이 학생운동을 했고, 지금은 다단계판매를 하게 됐다”(305면)고 말할 때의 지금의 대학생은 수인처럼 주로 지방학생들이다. 그 「객지」의 떠돌이 노동자들의 후예가 바로 (지방출신) 대학생들인 것이다. 그들의 자리를 이어받을 ‘산업예비군’도, 수인이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297면)라고 할 때 그 아이들(고등학생, 재수생)이다. 우리시대의 노동현실은 교육현실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혜미의 문자메시지는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영미가 물에 빠졌을 때 누군가에게로 손을 뻗친 필사적인 몸부림 혹은 준이 선배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화로 “안되겠니? 안되겠지?”(28면)라고 애절하게 간청하는 것과 진배없다. 다행히 병만이 영미에게 손을 내밀었고 영미도 선배의 간청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러나 수인은 혜미의 간절한 요청을 회피한다. 빚과 인간관계의 파탄으로 자살을 시도한 혜미는 지금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 있다. 수인이 깊은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혜미의 문자메시지가 수인의 팔뚝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수인의 마음에 또렷한 멍을 남긴 것이다. 수인이 혜미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느냐 마느냐의 여부를 ‘열린 결말’로 처리한 데 대해 정홍수(鄭弘樹)는 “‘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망각과 부인, 회피의 환상이 불가피하다. 혜미의 병실 방문을 주저하고 망설이는 대목에서 소설을 끝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의 타협이 아닌가”21)라고 반문한다. 어느 쪽을 택해야 타협이 안되는 것인지 궁금한데, 적어도 예술적으로는 이 열린 결말이 가장 ‘윤리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수인의 고독한 결단은 피해자-가해자의 연쇄를 끊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고, 소설을 읽는 독자는 수인의 윤리적 결단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비극을 낳는 사회를 직시하게끔 마음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21)

 

 

맺음말

 

황석영의 「객지」를 다시 읽을 때의 감흥은 특별했다. 그 현재성이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해보니 소설 속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그와 대조적인 건조하고 정확한 소설언어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황석영 소설서사 특유의 긴장감과 박동감이 결코 부차적인 예술적 자원이 아님은 앞서 웬만큼 짚어보았다. 그런데 이와 결합된 이야기의 내용 자체가 설득력을 잃는다면 예술적 긴장감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객지」는 「한씨연대기」와 아울러 한국전쟁기에서 산업화시대에 이르는 한국사회의 모순과 갈등의 핵심을 예리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예술적 생명력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부박한 떠돌이 일용노동자들의 파업(정치투쟁) 이야기에 새겨진 그때의 모순과 갈등이 설령 그때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도 지금 계속되고 있기에 「객지」의 이야기가 절절이 와 닿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황석영의 「객지」는 ‘우리시대의 「객지」’ 1호인 것이다.

김애란의 「하루의 축」 「너의 여름은 어떠니」 「서른」은 우리시대의 각각 다른 노동현장을 답사하면서 ‘생활’과 ‘삶’의 차원 혹은 ‘생활인’과 ‘예술가’의 감각을 오가면서 종요로운 예술적 실험과 탐구 작업을 수행한다. 각각의 단편은 그 울림과 방향은 다르지만 모두 ‘생활’이라는 시련의 불길을 거치는 ‘삶’이라야 참된 예술임을 암시한다. 사실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언어, 생활감각적이면서 ‘삶’의 꽃피움에 민감한 감수성은 그의 소설이 널리 읽히면서도 예술적인 활력과 긴장을 잃지 않는 이유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이런 소설언어와 창의적인 이야기는 대중이 실제로 쓰는 언어와 대중적 삶에서 끌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리얼리즘 문학의 총체성과 전형성을 다시 들여다보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단편들에서 이런 개념을 적용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김애란의 단편들은 우리시대 현실의 핵심적인 면모가 무엇인가에 대한 예술적 촉각이 곤두서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임을 실감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 소설은 모두 나름의 전형성을 띠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서른」의 실험성과 창조성은 놀라우며, 여러 「객지」들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인다. 황석영 「객지」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김애란 소설의 ‘열린 결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필자가 실감한 바로는 그의 소설의 중심인물들은 섣부른 낙관도 절망도 하지 않고 가혹한 시대현실의 한복판을 통과하고자 한다. 그가 새 장편 연재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절망의 감미(甘味)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섣부른 낙관에 기대지 않고 이곳에서 걸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싶다”(문학동네 2013년 봄호 365면)고 밝힌 것은 문학에 큰 희망을 건 작가만이 보일 수 있는 자세일 것이다.

 

 

1) 조영래 『전태일평전』(개정판), 돌베개 1995, 211면.

2) 정과리·우찬제·김형중·강계숙·이수형·강동호 좌담 「도전과 응전—세기 전환기의 한국문학」, 『문학과사회』 2012년 겨울호 359~60면. 매사를 상업주의 탓으로 돌리는 이 좌담의 흐름에 대해 권희철은 “참담한 현실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저 절실하고 다급한 물음조차도 ‘상업주의’와 연관지어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이 역설적으로 상업주의에 사로잡힌 비평의 불만”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권희철 「너무나 여리고 희미한 능력」 『21세기문학』 2013년 봄호 394면. 앞으로 이 글에서의 인용은 면수만 밝힘.

3) 김곰치 「킬링 타임이냐, 절실함이냐」, 『실천문학』 2012년 겨울호 56~57면.

4) 서영인 「망루와 크레인, 그리고 요령부득의 자본주의」, 『실천문학』 2012년 겨울호 19면. 앞으로 이 글에서의 인용은 면수만 밝힘.

5) 고봉준 「리얼리즘, ‘억압적인 것’에 대한 문학적 반응」, 『리얼리스트』 2호, 2010년 6월, 341~42면.

6) 장성규 『사막에서 리얼리즘』 실천문학사 2011, 5~6면.

7) 권여선·심보선·정홍수·신용목 좌담 「한국의 문학 현실과 문예지의 역할」 『21세기문학』 2013년 봄호 277면.

8) ‘총체성’과 ‘전형성’에 대해서는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및 「로렌스 소설의 전형성 재론」, 『창작과비평』 1992년 여름호, ‘당파성’과 ‘객관성’에 대해서는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 5절 ‘레닌의 똘스또이론’과 「사회주의현실주의 논의에 부쳐」,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396~426면, ‘현실반영’에 대해서는 「모더니즘에 덧붙여」 중 ‘리얼리즘론에서의 “현실반영”의 문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창작과비평사 1985, 443~46면 및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 『안과밖』 1996년 하반기호 참조. 이 가운데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에 대한 논의로는 졸고 「문학의 새로움과 리얼리즘 문제」, 『창작과비평』 2009년 여름호 참조. 백낙청이 리얼리즘을 폐기한 적이 없음을 지적했으나, “지혜가 한층 보편화된 세상의 예술은 아마도 ‘리얼리즘’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말썽 많은 낱말을 더는 부릴 이유가 없기 쉽다”(『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412면)라고 그 자연스러운 해소를 전망하기는 했다.

9) Jacques Rancière, “Why Emma Bovary Had to Be Killed,” Critical Inquiry 34 (2008년 겨울), 237면. 강조는 원문의 것이며, 번역은 필자의 것이다.

10) 백낙청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29면.

11) 백낙청 「리얼리즘에 관하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 창작과비평사 1985, 372면에서 재인용.

12) 쑨 거 「극한상황에서의 정치감각」, 최원식・임홍배 엮음 『황석영 문학의 세계』, 창비 2003, 220면.

13) 하정일 「저항의 서사와 대안적 근대의 모색」, 민족문학사연구소 현대문학분과 엮음 『1970년대 문학연구』 소명출판 2000, 28면.

14) 황석영 『객지』, 창작과비평사 1974, 103면. 작가는 발표 당시 뺐던 분신 부분을 『황석영 중단편전집』(창작과비평사 2000)을 내면서 되살려놓았다. 추가된 부분에서 동혁이 남포의 심지 끝에 불을 붙이자 “작은 불똥을 올리며 선이 타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말로 끝난다. 이렇게 분신자살의 정황이 분명해지면서, 그 전해인 1970년에 분신한 전태일과의 연관성이 더 뚜렷해졌다. 이에 대해 작가는 최원식과 나눈 대담에서 “어떻게 보면 발표본대로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하는 데서 자른 것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라는 소감을 표했고 최원식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황석영·최원식 대담 「황석영의 삶과 문학」, 『황석영 문학의 세계』, 43면.

15) 성민엽 「작가적 신념과 현실」, 『한국문학의 현단계』 , 창작과비평사 1984, 139면.

16) 하정일 「민중의 발견과 민족문학의 새로운 도약」, 민족문학사연구소 엮음 『민족문학사 강좌』 하, 창작과비평사 1995, 264면.

17) 임규찬 「「객지」와 리얼리즘」, 『황석영 문학의 세계』, 창비 2003, 165~67면.

18) 「물속 골리앗」을 논의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사실주의적 규율을 벗어나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이 소설의 비범함에 대한 논의는 숙제로 남겨둔다.

19) 정실비 「돌아오는 문장, 실패하는 독서」, 『문학동네』 2012년 여름호 583면. 앞으로 이 글에서의 인용은 면수만 밝힘.

20)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예담 2009, 300면. 박민규 소설에서도 생활/삶의 구분이 중요하다.

21) 정홍수 「세상의 고통과 대면하는 소설의 자리」, 『창작과비평』 2012년 겨울호 3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