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자본주의 생태계에서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살아가기

 

 

김소연 金素延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등이 있음.

함민복 咸敏復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울氏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이 있음.

 

 

ⓒ 오윤성

ⓒ 오윤성

 

누군가는 그가 남긴 업적이 부각되면서 뒤따라 그의 삶이 조명되고, 누군가는 그의 삶이 부각되면서 뒤이어 그가 남긴 업적이 조명된다. 그렇게 한 시대의 한 인물이 우리에게 온다. 업적과 삶이 한통속일 때는 순결한 영혼을 보는 듯 경외감이 들지만, 서로 아주 많이 달라도 이상한 수수께끼가 끼어드니 묘한 경외감을 또한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좀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의 삶이 그의 업적을 견인해 삶과 업적이 동시에 부각되는 사람. 그런 삶은 삶 자체가 업적이고 경이다. 모방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애가 타도록 가파른 삶. 진짜 몇 안되는 영웅들이 그런 삶을 산다. 결의와 도전으로 똘똘 뭉친 듯한 그 단단함을 우리는 존경해오곤 했다. 그런데 어떤 당위도 명분도 내세우지 않은 채로 무던하게 그렇게 사는 이들이 아주 드물게 있다. 그들은 도무지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다 말한다. 자신이 어떤 귀감이 되고 있는지를 전해주어봤자 손사래나 친다. 그냥 그렇게 단순하게 살아왔다고만 말한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서는 시인 함민복 이야기가 이런 손사래를 치는 삶이지 싶다. 자연스럽게, 삶이 시를 견인하며 살아온. 자연스럽게 그리되기. 자연스럽게 살아가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함민복은 어떻게 자연스러움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게다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워 모두가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그 가난 속에서. 나는 함민복에게 씌워진 ‘가난’이라는 대명사에 대해 오래 생각하다 이렇게 표현하기로 결정했다. 가난을 노래하며 견딘 시인이 아니라, 가난을 지켜낸 시인. 자본주의의 산업화된 살풍경과 한때는 치열하게 싸웠고 그 통속성에 대해 통쾌한 위트를 제시했던, 절반은 모더니스트였던 시인 함민복은 일찍이 가난에 대해 당당했고 지금껏 가난을 지켜내고 있다. 그런데 그 지켜냄은 도무지 억지스러움이 없고 자연스럽기만 하다. 그 자연스러움이 특히나 함민복을 자본주의의 생태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인이 되게 한 것 같다. 그가 살았던 곳이 어떤 곳이기에 그의 시가 점점 더 무공해・무가공의 절창들로 이어져갔을까. 나는 멸종 위기에 놓인 고귀한 생명체를 마주한 양, 그가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그의 생태계에 대해 정리해보기로 했다.

 

바다가 보이는 그 집, 빈 농가

 

金 素延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등이 있음.

金素延

김소연 함민복의 시를 읽고 자란 후배 시인이나 독자 들은 ‘강화도와 함민복’에 대해 제일 궁금해해요. 강화도에서 어떻게 살고 있길래 이런 시가 가능했는가 하는 감동이 호기심으로 옮겨간 것 같아요. 저는 ‘시인 함민복’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빈 농가’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예전 문예진흥기금 신청양식에 재산의 정도를 낱낱이 적도록 되어 있던 시절에, 주거형태를 ‘빈 농가’라고 적어 신청서를 내셨다고 들었어요. 강화도의 빈 농가를 찾아가게 된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어요.

 

咸敏復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울氏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이 있음.

咸敏復

함민복 1994년 버팀목이라는 출판사에 일하던 때였어요. 아는 사람이 장편소설을 출간하기로 했고 발문을 꼭 써달라 부탁하더군요. 발문을 맡고 보니 그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했어요. 어떤 ‘민족적 차원’의 일이라 설명하면서 강화도 마니산에 한밤중에 올라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글 쓴 사람의 행로를 쫓아가, 글의 태동장소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때 강화도를 처음 가봤어요. 새벽 2시에 마니산에 올라갔어요. 오가는 사람 하나 없고 무섭더라고요. 새벽의 강화 풍경을 그때 처음 맛봤지요. 그후 2년이 지나고, 시 쓰는 친구 김완수와 금호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조태일(趙泰一) 선생한테 공부를 더 배우기 위해 광주로 간다고 했어요. 그 친구한테 얹혀서 오래 살았는데 갈 데가 없어졌어요. 그때 떠오른 게 강화도에서 봤던 풍경들이었어요. 강화에 방을 구해보자 싶어 마니산에서 내려다보았던 바닷가로 가 동막리 쪽에 있는 빈 농가를 찾았습니다. 한 아저씨가 풀을 베고 있길래 빈집이 있는가 물었더니 동네에 한채가 있다면서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더군요. 그냥 공부한다고 말했어요. 강화도가 고향인 친구 하나가 있긴 한데 어디인지는 모른다고 했더니 이름을 대보래요, 해서 댔더니 내 조카인데 어떻게 아느냐고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동창이고 발전소 같이 다녔다고 했더니, 걔도 발전소 다니면서 늦게 공부하던데 자네도 공부하는 거 맞구만, 그러더니 본인 집에 들어가 여기저기 전화를 건 끝에 집을 얻어주셨어요. 그게 96년의 일입니다.

 

김소연 빈집이라면 버려진 집이었나요? 폐가?

 

함민 95일에 이사를 했어요. 그날이 우연히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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