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 다시 현실을 묻는다

 

작가들이 만난 현실

 

손홍규孫洪奎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톰은 톰과 잤다』,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 『이슬람 정육점』 등이 있음.

 

정지 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르뽀집 『벼랑 위의 꿈들』 등이 있음.

 

함성 咸成浩

1963년 강원 속초 출생. 199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56억 7천만년의 고독』 『聖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 등이 있음.

 

정홍수 鄭弘樹

1963년 부산 출생. 문학평론가. 199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평론집 『소설의 고독』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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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사회) 오늘 좌담은 작년 『창작과비평』 겨울호 특집 ‘고달프고 억울한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문학’의 문제의식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난번 특집은 최근의 소설 작품들, 그리고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르뽀르따주 장르 등을 통해 작금의 암울한 시대현실에 대한 문학의 대응 양상을 살펴본 기획이었습니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는 언제든 진지하게 묻고 따져보아야 할 과제겠지만, 이즈음 새삼스럽게 문학의 정치성이나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묻는 방식으로 이에 대한 다양한 물음이 제기되어온 맥락에 대해서는 굳이 재론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촛불시위가 있었던 2008년인가요, 진은영(陳恩英) 시인이 이곳 『창비』 지면에 ‘시인의 정치참여와 참여시 사이의 괴리’라는 질문을 들고 나온 이래 ‘문학과 정치’ 혹은 ‘문학적인(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미묘하고 복잡한 교섭 양상을 두고 많은 비평적 논의가 있었습니다. 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을 경유하여 다시 한국문학의 주요 의제로 등장한 이같은 ‘현실의 귀환’은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고 악화일로에 있는 지금 우리 시대의 어두운 현실이 용산참사나 쌍용차사태 같은 데서 보듯 어떤 임계점에 다다른 듯하다는 위기의식을 너 나 할 것 없이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만큼 지난 대선에 대한 기대랄까 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던 것 같고요. 우리 사회의 양극화나 분단체제의 위기 심화에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할 정치세력이 다시 집권을 연장하게 된 대선 결과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낙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어쨌든 박근혜정부의 출범은 다시 그 자체로 우리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일 텐데요, 요 며칠새 북핵문제로 한반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면서 그 가능성이야 극히 낮다고는 해도 ‘전쟁’ 이야기까지 나오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지금 우리 현실이 얼마나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는지 막막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만하면 ‘문학과 현실’ ‘문학과 정치’의 문제를 다시 질문해보려는 오늘 좌담의 시의성은 차고 넘친다고 해야 할 텐데요, 돌아보면 그간의 논의가 비평적 동어반복에 갇혀 있는 느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창작현장에 있는 작가와 시인 분들을 모시고 구체적인 실감을 동반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좀더 진전된 논의를 끌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 계신 문인들은 오늘의 시대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실감이랄까 현실 인식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걸로 좌담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지금 문학은 어디에 서 있나

 

손홍규 요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건 꽤 고독한 행위인 것 같아요. 단순히 얘기해서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사회현실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써도 사회가 반응을 하던 시대는 지나간 것 같았는데, 외려 지금 작가의 정치적인 인식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고, 작가들 중에도 그런 문제를 천착하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새롭게 인식하는 분도 많아요. 그런데 그런 문학적 행위 자체가 더 고독하고 쓸쓸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는데요, 이전 시대의 전형적인 고뇌가 작가라는 존재와 사회의 대립 때문에 느껴지는 고통이나 고독이었다면, 지금은 대립 이전에 이미 작가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괴리를 느낀다는 건 그전에 접합지점이 있었다는 뜻이잖아요. 살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느껴지는 감각이 전해지는 건데, 지금은 글쓰기가 사회에 속한 행위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에 원천적으로 부여되었던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 정치적・사회적 의미 같은 게 많이 박탈되고 희석되어서 오히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나 사이의 동질성이 약화된 것 같아요. 제게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이전 세상보다 더 낯설어 보이거든요.

정홍수 처음부터 상당히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네요.(웃음) 정지아씨의 르뽀집 『벼랑 위의 꿈들』(삶창 2013)을 읽어보니까 그 제목 그대로 꿈조차 꾸기 힘든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에 정말 한숨이 나더라고요. 이야기를 좀 이어주시죠.

정지아 저는 손홍규씨와 달리 굉장히 낙천적이지만, 문학의 역할이 많이 바뀌었다거나 축소되었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해요. 거기에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건 매체의 발달인 것 같고요. 또 1970~80년대에 진지한 소설들이 많이 읽혔다고 하는데, 그때는 어쨌든 이른바 인텔리겐차가 독재에 항거하고 민중을 이끌었던 시대였고, 그 과정에서 문학이 독재정권에 의해 왜곡된 사실, 혹은 눈에 보이는 사실의 이면을 선봉에서 알리는 역할을 해왔고, 문학작품 고유의 역할 이상의 선동·선전의 역할을 부여받기도 했고,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 역할이 너무 과중해져서 문학으로부터 멀어졌던 시기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역할을 문학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서 하고 있죠. 예전 같으면 삐라나 선전물이 했을 일을 SNS를 통해 각자 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에 요구되던 긴박한 선전의 요구는 사라져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떤 면에서 르뽀조차 옛날처럼 무언가를 급박하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미적 구체화가 되기 전의 현실을 SNS보다 좀더 깊게 쓰는 정도가 아닐까요. 그렇게 본다면 문학의 위상이나 역할이 대중의 역할 변화에 따라 이전과는 다른 지점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저도 아직 그 지점을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문학의 역할이 없어진 건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물론 오늘날의 대중이 우리가 원하는 정도의 진지함과 미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소설을 읽어주느냐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희망이 없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언제는 현실이 비참하지 않은 때가 있었습니까.

『벼랑 위의 꿈들』을 쓰면서 희망과 꿈조차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예전엔 더 많았죠. 그래서 저는 이 시대가 암담하다거나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이전과 같은 명료한 대안이 없을 뿐이고, 또 명료한 대안이 없는 것조차 저는 발전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쨌든 맑스주의가 그려왔던 세계가 단순명료하지만 그만큼 인간의 다양한 층위를 놓친 측면도 분명 있어요. 인류가 그것을 역사 속에서 검증해오기도 했죠. 그래서 당장 섣부른 대안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지금의 금융자본주의가 다변화됐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렇게 쉽사리 답을 구하려 하지 않는 태도도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쉬운 답을 구하기보다는 헤매고 견디면서 나아가는 과정도 언젠가 돌아보면 진보·진화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낙관적인가요?(웃음)

정홍수 정지아씨와 손홍규씨 두분이 넓게 보아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면, 함성호 시인은 그간 혼성적인 언어실험을 바탕으로 낯설고 전위적인 시를 써왔습니다. 건축가이면서 건축평론을 쓰기도 하시죠. 평소에도 기발한 생각으로 좌중을 압도하곤 하는데, 조금 다른 진단이 있으실 것 같네요.

함성호 저는 건축일을 하다보니 자본의 흐름에 아주 민감한데요. 제가 상대하는 건축주들은 주로 벼랑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일본에 의해 개방된 이래로 지금까지 한반도는 외세가 계속 장악해왔습니다. 구한말까지 만들어진 민족자본이 기독교자본이나 일제 식민지 지배세력에 붙지 않으면 다 죽어버렸고, 해방된 다음에는 기독교자본과 결합한 쪽만 살아났죠. 그게 지금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지아씨도 말씀하셨지만 문학뿐 아니라 문학 외부의 상황도 사실은 150년 가까이 변함이 없다는 거죠.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이게 정점인가, 바닥을 칠 대로 쳤나. 우리를 둘러싼 외부조건이 계속 그대로인데다가 엘리뜨는 무능하고, 문학도 그 안에서 현실적 감각 같은 걸 기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사실 엄정하게 보면 우리 문학이 뭘 건져냈는가, 자문해보면 참담합니다. 형제들끼리 피 터지게 싸워놓고 인간성의 보편에 다가가는 전쟁문학 하나 건져본 적이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현실 대응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80년대에 문학이 했던 역할이 미디어 환경이 변했다고 달라지는 게 참 이상한 거죠. 문학이 가진 본래적 의미는 계속 이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세계 금융자본주의에 휩쓸리면서 변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대선구도 속에서 제가 가장 절망했던 건, 투표권이 생기면서부터 제가 계속 지지했던 김대중(金大中)씨가 1997년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나서 대뜸 ‘신지식인’ 얘기를 꺼냈을 때예요. 지식을 달러로 환산하겠다는 거죠. 거기에 너무 질려버렸어요. 그런 생각이 팽배해지면서 결국 문학도 돈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변했고, 아시다시피 출판도 달라졌죠. 상업출판 쪽으로 완전히 쏠렸고, 작가들이 거기에 휩쓸려 전속계약하듯 작품을 생산해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제가 볼 때 지식은 돈이 안되는 게 맞아요. 그래야 가장 느린 걸음으로 가장 빠르게 현실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문학은 이 느린 걸음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입니다. 문학의 외부적인 상황과 문학이 같이 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문학은 그런 외부적인 상황을 견제하는 본래적 의미를 굳건히 지켜야 하는데 그 의미를 상실해버렸죠. 지금 현실의 문제는 거기에서 온다고 봐요. 문학이 본래의 의미를 스스로 던져버린 거.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은 그걸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거죠.

 

가능한 변화와 근본 변혁 사이에서

 

정홍수 현실과 문학의 관련 문제는 뒤에서 본격적으로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현실 진단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보기로 하겠습니다. 2012년 『창비』 겨울호에 실린 리베카 쏠닛(Rebecca Solnit)의 「당신의 승리들을 점거하라」 「우리의 가두행진에 내리는 비」는 오늘 좌담의 주제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월가 점거’ 일주년을 기념하는 이 글들을 읽으면서 경제정의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열망, 자본주의가 초래한 광범위한 고통에 대한 인식에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공통의 토대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확인한 것은 특별한 수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필자가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대목, 작은 승리들을 소중히 기억하고 챙기면서 더디더라도 한발 한발 희망의 길을 밟아나가자는 이야기는 상당한 호소력이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 이제 사실상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전제해놓고 거대한 절망과 비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우리 평단이나 작품에서 어떤 ‘포즈’처럼 자리 잡은 느낌이 없지 않은 터라, 작은 희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는 필자의 주장이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희망적이라는 것은 미래에 대해 못 박지 않는 것이자 가능성을 향한 예민한 감수성을 의미하며, 변화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헌신함을 의미”한다는 리베카 쏠닛의 이야기가 그런 것일 텐데요, 여기서 ‘가능성을 향한 예민한 감수성’이야말로 문학이 응당 지키고 키워나가야 할 자질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함성호 시인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함성호 저도 균형 잡힌 글이라고 생각했고 재미있기도 했는데, 사실 그런 글이 좀 위험하기도 하죠. 이제 선()적인 나아감이 아니라 점()적으로 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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